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과 의의

好學 2012. 1. 15. 23:05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과 의의

 

 

 

‘비정치화 현상으로서의 부흥운동’ 그 해석의 논지
그동안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은 학계 일각으로부터 비평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예일대학교 조지 래드(George T. Ladd)교수였다. 친일파였던 조지 래드는 평양대부흥운동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던 1907년 여름 평양을 방문하여 부흥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는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하고 이와 같은 영적각성이 한국인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적 성품’에서 나온 것으로 혹평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경배교수와 이만열교수를 비롯한 일련의 학자들에 의해 초기한국교회 부흥운동에 대한 평가 작업이 새로운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다. 이들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비정치화 내지 몰 역사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해왔다.
이들의 논지의 핵심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당시 정치적인 소망이 사라지면서 기독교에서 그 분출구를 찾으려는 현상이 나타나, 정치적인 소망이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되면서 부흥운동이 발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해석은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이들이나 독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민경배교수는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다루면서 ‘경건과 피안의 교회 신앙-비정치화의 신앙’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을 비정치화로 규정한 것이다. 일제의 정치적 득세로 인해 야기된 좌절감이 온 백성을 지배하고 있을 때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휩싸여 선교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의도적으로 부흥운동에서 그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좌절 속에 방황하는 한국이 찾아 갈 유일한 보루’였고, 자연히 교회로 대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결과 ‘교회의 정치적 성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소망이 끊기고, 미국마저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국제정세 속에서 선교사들은 교회의 정치화를 막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들의 정치적인 절망을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를 받아들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현상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민교수의 비정치화 해석은 상당수의 학자들에 의해 수용돼 왔다. 대표적인 것이 이만열교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멤버들이다. 이들은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됐고, ‘신자와 선교사간의 이해 증진’에도 기여했지만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교수도 ‘한국 기독교사 특강’에서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비정치화 해석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 신자들이 회개하며 가슴을 치는 동안 선교사들 중에는 이를 한국 민족의 운명과 일제의 한국 강점과의 관계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이 운동에 관심이 쏠리게 됨으로써 한일합병이 진행되어 가는 동안 국내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 운동은 민족적 울분을 종교적으로 카타르시스 하는 역할도 하였다는 것이라는 점이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비정치화라는 민교수의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교수 역시 전체적인 톤이 민교수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이교수는 그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민교수보다도 더 강하게 부흥운동 자체를 ‘종교적 카타르시스’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부흥운동 전반으로 확대한다.
유동식교수도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 1884~1992’에서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의도적으로 망국의 시련을 신앙부흥운동에서 찾았다는 유동식교수의 논지 역시 비정치화 해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덕주교수도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에서 ‘비정치화’로 풀어갔다. 부흥운동의 결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비정치화가 한층 심화’되었고, 기왕의 정교분리 원칙이 더욱 고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서는 몇 가지 공통적인 측면을 관찰할 수 있는데,
첫째, 한국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엽 강대국의 침략 정책으로 정치적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둘째, 이 같은 정치적 위기 앞에 그리스도인들 일각에서는 교회로 찾아들었고, 교회가 열국의 침략 앞에 민족적 구심점의 역할을 해 주기를 고대하였으며, 자연히 정치적인 현상이 교회에 등장하게 되었다.
셋째,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선교가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고, 교회가 정치적인 내분에 개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았다.
넷째, 한국민족이 일본의 정치적 침략 앞에 무너져 내리며 정치적 소망을 상실하고, 믿었던 미국마저 일본의 손을 들어주자 한국인들 사이에 반미운동과 폭동이 일어날 움직임이 있어 정치적인 울분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하려고 의도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적 부흥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발흥
과연 1907년 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산물이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와 같은 주장이 1907년 부흥운동의 성격을 깊이 연구하면 논리적인 비약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주변국의 침략과 민족적 위기가 한국인들의 심성을 가난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적인 소망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하면서 부흥운동이 촉발된 것은 아니다.
비정치화 해석은 다음 몇가지 면에서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정치적인 소망이 끊긴 상황에서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대치시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됐다는 주장은 부흥운동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 곧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 특히 1903년과 1907년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살펴보면 회개운동으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회개운동이 강하게 나타났다. 회개운동은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이 개신교의 신앙이다. 따라서 민경배, 이만열, 유동식, 이덕주교수를 비롯하여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의 부흥운동의 해석은 부흥운동이 1차적으로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평가절하한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순수 종교적인 운동, 신앙적인 운동, 곧 죄에 대한 회개, 성결한 삶, 복음전도를 특징으로 한 말씀과 성령의 역사였다. 당시 자료를 분석하면 한국인들이라면 민족적 위기 앞에 민족의 시련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민족의 위기가 영적인 축복의 수단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위기 앞에 그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고민한 것도 사실이지만, 부흥운동이 종교적인 방향으로 틀었기 때문에 발흥한 것은 아니다.
둘째, 비정치화 해석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독자적으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당시 일고 있던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맥락 속에서 발흥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은 당시 영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일고 있던 ‘웨일즈부흥운동’, ‘인도부흥운동’, ‘아프리카부흥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그해 영국의 동아프리카 Toro의 수도, Kabarole에서도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미 웨일즈, 인도, 한국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이어 아프리카 부흥운동의 소식을 접한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어떤 인종 혹은 지역에 제한되지 않고 인도, 중국, 한국, 아프리카, 웨일즈, 미국에 있는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을 알려는 이들 모두에게 나타난다는 표식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가운데는 이미 무디부흥운동, 케직운동, 나이아가라사경회운동 등 19세기 말의 부흥운동을 경험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부흥운동은 해외선교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어 부흥운동의 결과 태동된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으로 한국에 파송된 이들이 상당수였다. 1907년 1월 14일 부흥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 모두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었다.
셋째,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말씀과 기도로 특징되는 사경회운동이나 기도회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해석이다. 원산부흥운동, 평양대흥운동 모두 기도회나 사경회 동안에 일어났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양일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 사경회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한국에 임했던 것이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숭실대학과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비롯 미션스쿨들로, 평양 남산현감리교회를 비롯하여 교파를 초월 평양 전역으로, 다시 이북지역은 물론 서울과 경기를 비롯하여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던 것이다.
민족의 위기 앞에 한국교회가 정치적으로 흐를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비정치화를 추구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면 왜 일제의 압박 속에 있던 한반도의 다른 주변국에서는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전 세계적으로 웨슬리부흥운동, 미국의 1차 2차 대각성운동, 무디부흥운동,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운동, 그리고 한국의 원산과 평양대부흥운동 모두 성령의 역사로 인한 영적각성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인 소망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전환시키고, 교회를 비정치화시킴으로써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비정치화 해석은 춘생문사건 이후 교회 안에 일기 시작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교회 지도자들 간의 대립을 풀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와 깊이 맞물려 있고, 그 사경회는 1890년 채택된 네비우스선교정책에서 기원됐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박용규교수 /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