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4
진솔한 회개로 부흥운동 확산…부와 권력 축적에 몰두, 목회자 키우기 꺼려
대부흥운동의 불을 지핀 이도, 불씨를 이어간 이도 선교사였다. 중국에서 사역하던 여선교사 화이트(Mary C. White)가 인도한 1903년 원산 기도회에서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가 참회 기도를 한 것이 대부흥운동의 시발이다.
하디 선교사는 중국 선교사의 고난을 듣고, 값비싼 사택과 화려한 생활 도구를 소장하고 피서지를 확보하는 등 자신의 사치스런 삶과 백인으로서의 우월의식 등을 사람들 앞에서 회개했다. 그리고 그는 "교만하고 완악하며 신앙이 부족하였기에 선교에 실패했다"라고 털어놓았다. 하디의 진솔한 회개에 감동한 한국인들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내어놓기 시작했다. 하디는 서울, 평양, 제물포 등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했고 가는 곳마다 회개의 봇물이 터졌다. 하디 자신도 "본국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다"라며 뜨거운 반응을 회고했다.
이후 부흥운동은 더욱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장감연합공회를 결성해, 1906년 설날을 기점으로 부흥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에서도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헌트(William Hunt)의 설교와 리(Graham Lee)의 통성기도 인도에서 대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선교사들은 권위주의를 회개하고 조선인들은 선교사를 미워했던 마음을 털어놓으며 화해했고, 사소한 것까지 돌이키려는 열기가 평양을 넘어 공주, 대구 심지어 중국까지 번졌다.
나라 빚 몇 배 넘는 이익 챙겨
알렌은 주한 미공사관과 선교사로 활약하면서 조선의 각종 이권을 챙겼다. (사진제공 사진으로 본 한국의 백년)
시들해진 평양대부흥운동을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이어간 것도 갬블(F. K. Gamble) 리드(C. F. Reid) 스톡스(M. B. Stokes) 등 선교사들의 '한국교회 부흥을 염원하는 기도 모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의 기도가 확산되어 장감연합공회에서 백만인구령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백만인구령운동 실행을 위한 위원회에 게일(James S. Gale)이 의장을 맡고, 밀러(Hugh Miller) 언더우드(H. G. Underwood) 벙커(D. A. Bunker)가 서기를 맡는 등 한국 선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렇듯 대부흥운동의 핵심에는 선교사들이 있었고, 이들은 우리에게 회개를 통한 부흥 경험을 안겨주었다. 아울러 감리교와 장로교 등 교파가 자유롭게 연대하고 협력하는 일치운동의 역사도 남겼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다른 행보를 보면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대부흥운동에서 민족 현실에 참여하려는 흐름을 배제했기 때문에, 친일 선교사가 일으킨 전략적 운동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복음과상황> 161호 '나라 망하는데, 교회 부흥이라…' 참조). 하디가 자신의 사치스런 생활을 회개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선교사들의 본분을 망각한 행보가 한국 교회사의 한 장을 어둡게 수놓고 있다. 특히 초기 선교사들은 사업가적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알렌(Horace N. Allen)과 언더우드가 두각을 나타냈다.
알렌은 미국과의 관계 발전을 열망하는 고종의 각별한 대우를 받아 금광채굴, 철도와 전기 부설 등 각종 이권을 따냈다. 특히 한국 최대 금광으로 '노다지(No-touch)’라는 유행어를 남긴 운산금광 채광권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상상을 초월한다. 알렌은 이 금광을 미국인에게 넘기면서 거액의 구전을 챙겼다. 운산금광에서 총 900만t의 금광석을 생산, 5천6백만 달러의 산출고를 올렸다. 1천3백만 원을 일제에 빚져 나라를 빼앗겼는데, 한 금광에서 나라 빚의 몇 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그 돈이 고스란히 선교사를 통해 외국으로 빠져나갔다는 점은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는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밖에도 알렌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J. Morse)에게 넘겨 수익을 챙겼다. 이후 모스는 170만여 원을 받고 일본에 넘겼고, 일본은 침략과 수탈의 발판으로 삼았다.
한국인 멸시하며 오만한 태도 보여
▲ 알렌이 미국인에게 채굴권을 넘긴 동양 최대 광산인 운산금광. (사진제공 사진으로 본 한국의 백년)
▲ 일제의 강제 추방으로 1942년 철수하기 직전에 기념 촬영한 장로교 선교사들. (사진제공 사진으로 본 한국의 백년)
백만장자 선교사라고 불리던 언더우드는 선교 활동을 위한 자금 확보와 한국인들에게 서양 문명의 이기를 전한다는 명분 하에 석유, 석탄, 농기구 등을 수입 판매하였다. 또한 미국이나 프랑스 공사관보다 호화스런 집에 살면서도 만족하지 않을 만큼 사치를 누린 빈톤(C. C. Vinton)은 재봉틀 1백여 대를 들여다 팔았고, 심지어 서울의 한 선교사는 여관업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교회 보수 신앙의 대부로 칭송받는 마펫(Samual A. Moffett:한국명 마포삼열)과 리 선교사조차도 압록강 연변의 나무 3천여 그루를 세금 지불도 하지 않고 벌채하려는 이권에 관계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897년 주한 영국공사였던 힐리어(W. C. Hillier)는 "선교사들이 아니었으면 동양에 대한 상업 진출의 정보를 서구 국가들이 얻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죽했으면 타운센트(L. T. Townsend) 선교사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선교 단체에 기부하는 일을 중지할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한국 기독교의 역사Ⅰ>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 <개화기의 한미관계-알렌 박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일조각, <대한예수교장로회 백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일제 시대에도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각종 규제를 완화해주고, 법인을 허가하여 재산 유지를 편리하게 하도록 배려한 일제의 회유 정책에 말려들어 친일 행보를 보였다. 일제 만행을 촬영하여 외국에 알린 이유로 추방당한 스코필드(Frank W. Scofield)조차 1922년 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송별연에서 당시 <동아일보> 간부 김서수와 송진우에게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일선(日鮮) 공존의 온건한 사상을 지니는 것이 이롭다"라고 충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과 일제 당국으로부터 비호를 받으며 부와 권력을 누린 선교사들은 하디가 회개한 대로 한국인을 멸시하는 편견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허시모(C. A. Haysmer)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허시모 선교사는 자신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치다 들킨 김명섭 군의 얼굴에 염산으로 '도적'이라고 새겼다.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실리면서 한국인의 분노를 샀다. 결국 허시모는 경성 고등법원에서 징역 3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뒤 조선인에게 공개 사과문을 낸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밖에도 선교사들은 여러 구타 사건과 성추행에 연루되었다.
미국 장로교, 유학 금지 주장도
선교사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개인의 독선과 죄를 넘어선다. 그들은 교인과 목회자의 지적 수준을 높이려 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종속되게 만들었다. 특히 장로교가 심각했다.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는 1896년 '현지 교육자 영성책'이라는 논문에서 '목회자의 지적 수준은 일반 평신도보다 약간 높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또 외국에 유학 보내는 일도 금지할 것을 주장했다. 대신 그는 '신령한 훈련을 많이 쌓도록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만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선교사들이 신학자나 교회 지도자를 키우지 않고 그들의 지휘 아래 두다 보니, 장로교는 선교사들이 소개해주는 것만 받는 꼴이 되었고, 신학적으로도 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라고 평가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그릇된 정책은 당시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1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교회가 크게 반성하고 돌이켜야 할 과제를 떠넘겼다. 이 위원장은 "장로교가 수적으로는 번창하면서도 지도자가 부족한 것이 이후의 문제였고 오늘날에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라며 "장로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이것과 통한다"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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