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8

好學 2012. 1. 15. 23:01

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8

 

 

 

대부흥운동의 원인과 한계를 동시에 봐야 한다
한국교회는 1백 년 만에 다시 한번 '기적'을 꿈꾼다. 각 교단의 총회장들은 1백 년 전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명나는 부흥의 축제를 다시 재현해보겠다며 출사표를 던진다. 2005년 한국교회는 각종 세미나와 기도회 등 부흥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평양대부흥운동 2년 전에 원산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과 닮은꼴이다. 지난 4월 8일에는 조용기, 강원룡 등 굵직한 '어른'들이 가슴을 치며 자신의 인생을 회개했다. 이 역시 정확히 1백 년 전 선교사 하디의 회개와 흡사하다. 그런데 2%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1백 년 전 대부흥운동을 돌아보는 기획을 쓰기 시작했다.

 

선배 노력 본받지 않고 열매만 따먹으려나
▲ 대부흥운동은 성경을 연구하는 사경회를 빼고 생각할 수 없다. 사진은 1909년경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를 한 뒤 기념촬영한 모습. <한국기독교회사>

 

첫 번째 기획 '온몸으로 보여준 진정한 참회'(<복음과상황> 159호)에서는 지금 교계 지도자들의 회개와 당시 선교사들의 회개를 비교했다. 회개의 진정성이야 쉽게 평가하기 어렵지만, 지금 지도자들의 발언에는 '회개만 하면 자동으로 교인 수가 늘어난다'는 식의 사고가 짙게 깔려있다. 회개를 부흥으로 가는 간이역쯤으로 생각하면 결코 한국교회라는 기차는 부흥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할 수 없다. 1백 년 전 신앙의 선배들은 부흥을 바라고 회개하지 않았다. 회개 자체가 목적이었고, 종착지였다. 우리의 회개가 뭘 바라고 하는 것이서는 안되지 않겠나.
두 번째와 다섯 번째 기획에서는 사경회와 한글성경을 대부흥운동의 일등공신으로 다뤘다. 대부흥운동은 신앙 선배들의 성경을 배우는 열정에서 출발했다. 함경도의 부흥회에 전라도 사람이 쌀을 지고 찾아오고, 경기도 사경회에 강원도에서 보름 넘게 걸어오는 사례가 교회사를 수놓는다. 지도자들도 이들의 열정에 화답했다. 성경을 민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부흥회는 성경을 깊게 파고들기보다 대중을 웃기는 스타 강사의 '말발'만 난무하지 않는가. 더구나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은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옛말이다. 꼭 고어를 써야만 성경의 권위가 사는 것도 아닌데, 성경을 번역하고 채택하는 교계 어른들은 '한문'과 진배없는 옛말을 고집한다. 성경을 상고하는 선조들, 민중을 배려하기 위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지도자를 본받지 않는 한 21세기의 대부흥은 없다.
일곱 번째 기획은 교회 안의 신분제 문제를 다뤘다. 1백 년 전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신분제를 극복하고 평등공동체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이명직 같은 천민이 목사가 되고, 교회와 기독교 교육기관을 통해 여성지도자들이 배출됐다. 천민과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철저히 배제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교회로부터 ‘특혜’를 누린 여성과 천민들은 민족과 교회의 당당한 일꾼으로 사명을 다했고, 이들 덕분에 교회는 자연스럽게 양적 성장뿐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도 키웠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1백 년 전 선배들이 버린 신분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복원하고 있다. 장로나 권사 등 직분을 놓고 암묵적인 돈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봉사직은 장로나 권사 직분이 교회의 신분이 되었고, 돈이 없으면 교회에서 일꾼으로 봉사하기도 힘든 시대가 되었다. 또 아직까지 성경을 근거로 여성에게 목사안수조차 주지 않는 교단이 많다. 이렇게 교회 내 여성의 활동을 법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인력 낭비라를 비판을 안팎으로 받고 있다. 1백 년 전 교회는 사회가 차별한 이들에게까지도 기회를 주면서 성장했는데, 지금 한국교회는 새로운 신분제를 만들고 기회도 제안하면서 선배들이 누린 대부흥의 영광만은 누리려는 것은 아닐까.

 

피안적 신앙은 극복 과제
▲ 선교사들의 공과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떠받드는 풍토른 버려야 한다. 사진은 하인을 대동하고 나들이에 나선 아펜젤러 부부. <사진으로 본 한국의 100년>

 

세 번에 걸쳐 대부흥운동의 어두운 면을 짚었다. 나라가 망해가는 현실을 외면한 피안적 신앙을 강조하는 풍토가 당시 대부흥운동을 이끈 이들에게 나타났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했기에 안창호 같은 교계 민족지사들이 교회를 비판했고, 의병들이 교회를 습격한 것이다.
우리에게 복음의 씨를 뿌린 선교사들도 민족 반역적 행동을 저질렀다. 일제의 침략을 비호하는가 하면, 금광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을 따내 거액을 챙긴 사례도 있다. 게다가 선교사들은 한국인 목회자의 신학적 소양을 '평신도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 머물게 하는 우민화정책을 폈다. 물론 여섯 번째 기사 '단일 교회를 꿈꾸다'에서 소개했듯이, 선교사들은 하나의 민족 교회를 만들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긍정적 유산만을 강조한다면, 주체적인 신앙을 세울 수 없지 않을까.
대부흥운동의 대명사 길선주 목사를 두 번에 걸쳐 소개했다. 그는 선교사들과의 관계에서 주체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줬고, 선교사와 한국인의 불신의 벽을 허무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일제시대에는 요한계시록을 집중 강연해 내세적인 신앙이 아닌 새하늘 새땅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었으며, 한국교회의 대표 브랜드 새벽기도도 길선주 목사가 정착시켰다.

 

민중의 신앙, 날연보와 성미
그러나 선교사나 길선주와 같은 지도자들의 활동만으로는 대부흥운동 전모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선교사들의 회개를 진심으로 받아주고, 길선주가 이끄는 새벽기도와 사경회에 적극 호응한 민중들이 없었다면 대부흥운동을 불가능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방방곡곡을 돌며 소개하고 팔았던 매서인들의 공로를 배제한 채 대부흥운동을 논하기 어렵다. 이뿐이 아니라 돈이 넉넉지 않은 민중들은 날연보를 통해 하나님나라운동에 헌신했다.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쓰겠다고 날을 바친 것이다. 1904년 11월 평북 철선 사경회에서 처음 시작된 날연보운동은 2년 사이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1910년의 경우, 1년 동안 전국에서 바친 '날연보' 날수는 10만 일이 넘었다. 274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사경회 중 서약한 날에는 보수를 받지 않고 전도하는 일에 나섰고, 필요한 비용도 본인이 부담했다. 날연보운동은 1910년 후반 들어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성미(誠米) 제도 역시 1백 년 전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모인 쌀은 전도인 등 교역자들의 생활비로 활용했다. 이렇게 교인들이 '정성어린 쌀'(성미)을 바쳤기에 선교사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교회를 운영할 수 있었다. 새벽기도가 그렇듯이 성미도 역시 민중들의 토착신앙을 기독교신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새벽에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던 어머니가 이제는 새벽에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성주라는 집지킴이 귀신에게 바칠 쌀을 모아두었던 성주단지가 '주단지'(Lord's Pot)가 되었다.
이러한 선조들의 적극적인 신앙을 본받지 않고 대부흥운동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또 과거 대부흥운동의 한계와 선교사와 신앙 선배들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성실한 노력 없이는 그들이 이룬 아름다운 유산을 이어가기 힘들다.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초대형 집회보다, 우리를 끊임없이 웃겨주는 스타 부흥사의 설교보다, 신앙 선배들의 길을 성찰하며 하나님이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성실하게 찾는 '공부'가 한국교회에 절실하다. 그것이 사경회 전통을 잇는 일이다. 대부흥을 꿈꾸는 한국교회여, 성경과 역사를 공부하자. 그리고 아는 만큼 철저히 행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