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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7

好學 2012. 1. 15. 23:00

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7

 

 

선교사와 한국인의 가교…토착신앙을 새벽기도 영성으로 승화
▲ 길선주 목사는 선교사와의 관계에서도 주체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진은 게일 선교사(뒷줄)의 아들에게 세례를 베푼 뒤 게일 선교사 가족과 찍은 기념사진. <사진으로 보는 연동교회 100년사>

 

1백 년 전 대부흥운동은 영계 길선주(1869~1935)라는 걸출한 신앙인을 낳았다. 반대로 길선주가 없는 대부흥운동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영향력을 절대적이었다. 지금도 그에게는 "부흥운동의 대변자", "한국교회의 아버지", "한국 신학을 결정한 인물"이라는 수식어들이 따라 붙는다.
수치로 그의 활동을 들여다보면 쉽게 접근하기 힘든 신앙의 열정이 드러난다. 총신대 박용규 교수에 따르면,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한국인 최초의 일곱 목사 중 한 명으로, 장대현교회를 20년간 담임하면서 수많은 부흥집회에서 2만 번 넘게 설교하고, 3천 명에게 세례(당시 세례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엄격하게 집례됐다-편집자 주)를 주었으며, 60개 교회를 설립했다. 380만 명이 그의 설교를 들었다. 특히 장대현교회 담임을 사임한 1927년 이후에는 1년에 30주를 부흥회 인도로 보냈다. 평소 지인들에게 "부흥회를 인도하다 죽고 싶다"고 하던 그는 말처럼 평서노회 사경회의 새벽기도를 인도하다가 쓰러져 다음날 운명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35번의 부흥회가 예약이 되어 있었다.

 

선교사와 한국 교인의 화해 이끌다
길선주가 초대 한국 교회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1907년 1월13일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다. 평안남도 남자 사경회 주일집회에서 평양신학교 졸업반 길선주 장로는 잊을 수 없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는 끈으로 자기 허리를 묶고 교인 한 사람을 불러 뒤에서 끈을 꽉 잡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저쪽에서 오라고 손짓하는 맥큔(G.S. McCune) 선교사에게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이 마치 죄책감에 사로 잡혀 괴로워하는 사람 같았다. 결국 줄은 끊어지고 길 장로는 맥큔에게 달려가 얼싸안았다. 숨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회중은 이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바닥에 쓰러졌고 그 중 여러 명이 죄를 자백하겠노라며 손을 들고 일어섰다."
회개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한국인들에게 온몸으로 회개의 본질을 전한 것이다. 평양신학교 교수 리(G. Lee) 선교사가 기록한 이 장면을 필두로 회개의 열풍은 숭실, 숭덕, 광성중학교와 숭실전문 등 평양의 학교들을 거쳐 전국으로 펴졌다. 대부흥의 불길이 이는 곳마다 길선주는 부흥회 강사로 초빙되었다.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둘의 포옹은 자신을 얽매고 있는 죄로부터의 해방만을 상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국 교인과 선교사 사이의 갈등과 장벽까지 무너뜨린 화해를 연출한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 선교사들 가운데는 민족적·문화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한국인을 야민인 취급하고 한국 문화와 전통을 미개하게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복음 위에 서구, 특히 미국식 기독교 문화까지 이식하려 하였다. 게다가 호화스런 생활을 누린 것까지 더해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을 '양대인'이라고 불렀다.
1903년 원산 대부흥운동을 이끈 하디(R.A. Hardie)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이런 생활을 하나님과 한국인 앞에서 털어놓고 회개한 것으로 대부흥운동의 불씨를 모았다면, 길선주는 선교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한국 교인들의 마음을 열어 선교사가 일으킨 회개의 불을 한국 교인들에게 퍼트린 셈이다.
그렇다고 길선주가 선교사들에게 굴종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챙겼다거나, 선교사들의 문제를 덮어 놓고 화해만 강조한 인물로 여기면 오산이다. 길선주는 평양신학교 수업 중에 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발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제로 선교사들과 가장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인물이었고, 선교사들이 방방곡곡을 돌며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사라지는 것을 늘 경고하던 사람이었다. 이후에도 '목회자의 지적 수준은 일반 평신도보다 약간 높게 해야 한다'는 그릇된 정책을 편 선교사들에 맞서, 길선주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의 수직적 관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어거스틴이 준 선물, 새벽기도
▲ 길선주 목사가 20년간 목회한 장대현교회는 대부흥운동의 발원지다. (사진제공 한국기독교박물관)

 

길선주가 대부흥운동에 족적을 남긴 것으로 새벽기도를 제도화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새벽은 복음이 들어오기 전부터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불교에서 '새벽 예불'은 중요한 의식이었고, 도교 수행자들이나 무당들도 새벽에 찬물에 목욕하고 기도하는 수행을 했다. 꼭 종교인이 아니어도 동트기 전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는 일은 흔했다. 인시(새벽 3~5시)에 신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기에 그 시간에 신령과 통하기 위해 기도하는 전통이 동양의 종교계는 물론 서민들의 삶에 깊숙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새벽기도는 단지 기도의 대상이 천지신명, 북두칠성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뿐이다.
한국인들은 몸에 밴 습관처럼 새벽에 기도했고, 오히려 선교사들이 만류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길선주는 이런 분위기를 깨고 새벽기도를 공식화시킨 장본인이다. 1906년 가을 그는 당회의 결의를 얻어 전 교인이 참여하는 새벽기도회를 시작했고, 교회 단위의 정기 집회로 정착시킨 것이다. 한국교회사가라면 이듬해에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을 촉발시킨 요인으로 새벽기도회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새벽기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한국 교회에 정착시킨 것은 그의 독특한 종교 이력에 기인한다. 독실한 유교 가정에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는 글공부에 전념하다가 병을 고치기 위해 우연히 용악산에 들어갔다가 관성교(觀聖敎․관우를 섬기는 무교)에 심취한다. 이후 20살 무렵부터 29살까지는 선도 수련에 몰두했다.
길선주가 평생 두꺼운 안경에 의존하고 말년에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 이동했던 것은 고행에 가까운 수련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교회사학자도 있다. 잠을 자지 않고 수련하기 위해 얼음물을 눈에 부어 각막이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로부터 만족감을 얻지 못한 그는 게일 선교사가 번역한 <천로역정>을 읽은 뒤 기독교로 개종을 결심하고, 1897년 30살 때 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로 개종한 뒤 그의 지독한 열정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의 설교는 암송으로 시작해서 암송으로 끝났다. 구약을 30번, 신약을 1백 번 읽고,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는 5백 번을 읽었다. 계시록은 통째로 암송했다. 1900년부터 4년간 장님으로 지낸 바 있는 그는 성경 통독에 대한 그의 편력으로 시력을 아예 잃을 뻔 했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다소 회복됐다.
어거스틴의 회심을 연상케 하는 길선주의 개종으로, 한국 교회는 동양 종교의 새벽기도 전통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새벽기도는 한국 기독교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민족의 고난 묵시적 설교에 담은 목회자


길선주가 전국을 누비며 신명나게 대부흥의 불을 지피고 있던 1907년 나라의 꼴은 거센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촛불과 같았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이 길선주라는 인물의 한계를 읽는 중요한 열쇠이다.
우선 명암이 엇갈린 나라와 교회의 상황부터 들여다보자. 1907년 길선주 목사 등이 이끄는 사경회가 전국을 휩쓸 때,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왕위를 순종에게 넘겼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이준 열사 등을 밀사로 파송한 것이 이런 화를 부른 것이다. 민중들은 곧바로 의병을 일으켜 방방곡곡에서 항일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의병이 교회를 습격한 이유
그런데 당시 항일 게릴라들의 무장투쟁 대상에는 교회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자료들이 눈에 띈다. 특히 영호남 지방에서는 의병들이 교회를 습격하고 교인들을 박해해서 피난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국예수교장로회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한국기독교회의 역사>(김인수 지음) 재인용)
왜 의병들은 일제와 싸우기도 힘이 부치는 판에 교회를 습격하고 교인들을 탄압했을까. 목숨을 내걸고 나라를 지키는 것만큼 유교 사상을 지키는 데도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의병 입장에서, 조선 사회의 뿌리를 흔들면서 평등 세상을 만들어 가는 교회가 눈엣가시로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동족의 교회를 공격할 만큼 치명적인 적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문제는 역사인식과 역사참여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 있다. 당시 교회를 지도하던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웠다. 1901년 9월 장로회공의회에서 선교사들이 '교인의 정치 운동은 가능하나 교회가 정치 운동을 하는 곳은 아니다'라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을 결의한 것이다. 이 원칙은 대부흥운동 기간은 물론 일제시대까지 이어졌다. 선교사들이 나서서 교인대중의 눈을 피안적인 곳으로 돌린 셈이다.
선교사들이 깊게 개입한 대부흥운동은 역사현실과 호흡하기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죄의 회개를 통한 영혼의 구원과 성도의 생활 등에 대한 영역에 치중한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이만열 위원장(국사편찬위원회)은 "선교사들의 종교분리 결의안이 채택된 뒤 한동안 사람들이 교회를 뛰쳐나갔고, 이러한 원칙을 근거로 교회에서 출교당한 사람도 있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신민회를 이끌던 안창호 같은 교계 인사마저도 "부흥운동이 교회의 비정치화와 몰역사화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비판할 정도.
심지어 "1907년 대부흥운동은 교회가 을사조약 후 '영적 종교적 차원을 잃고 민중의 항일 민족해방 의지를 수렴하여 정치혁명의 기구적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초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교단도 있다. (<한국기독교100년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 펴냄)
역사인식의 한계는 대부흥운동의 선봉 길선주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평양 지방에 들끓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설교를 했다. 장로교선교회는 길선주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혜로운 교회 지도자인 길 장로가 그 일(의병활동-편집자 주)의 희망 없음을 간파하고 백성들에게 도망가지도 말고 저항하지도 말라고 설득하였다. … 그러므로 북쪽에서 이 혼란을 자제시킬 수가 있었고, 한국을 온통 피투성이가 될 운명에서 구출할 수 있었다."
이 기록을 발굴한 장신대 김인수 교수는 "길선주의 충고가 비애국적인 행위로 보일 수 있지만, 일제에 의해 유린되어버린 마당에 힘도 무기도 없는 백성이 중무장한 일본군과 싸운다는 것은 피 흘리는 것 외에 수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힘을 비축하여 때를 기다리는 길을 택하도록 권유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상당히 긍정적인 해독이다. 그러나 안창호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교회나 선교사들의 행동은 '아편'과 같은 종교로 비쳤다. 의병에게도 반민족적인 단체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고, 매국노를 처단하듯 교회를 습격한 것이다.

 

감옥에서 깨달은 말세학
그러나 여기까지만 논한다면 길선주의 역사인식을 너무 편협하게 보는 것이다. 물론 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의 역사인식은 계몽운동적 수준이었다. 그는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곧잘 기독교인은 담배를 피워서도 안되고 담배 공장에서 일해도 안된다고 설교했다. 일제는 이 일조차 국가를 반하는 행위로 보고 구금했다.
그러나 그의 행보가 피안적이거나 비정치적이었다고 보면 곤란하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했다. 길 목사는 황해도 장연교회에서 열린 사경회 인도 때문에 선언문을 낭독한 1919년 3월1일 현장에는 동참하지 못했지만, 곧 스스로 잡혀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일제가 그를 무죄로 석방한 것을 두고,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사학자 민경배 총장(서울장신대)은 "무언가 걸리는 데가 있다"고 평가하고, 나아가 "교회가 3·1운동을 주도한 게 아니라 통로로서 공헌했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상당수 교회사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오해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일제가 길 목사를 매국노로 매장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 시기를 거치면서 길선주 목사는 신학적·신앙적 전환을 맞이했다. 감옥에서 요한계시록을 외울 정도로 ‘말세학’에 심취한 것이다. 출옥하자마자 그는 전국을 돌며 말세학 사경회를 이끌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말세학이 탈역사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반대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희망의 선포였다. "대부흥운동이 민족지도자들을 숙청하고 민중의 해방 열망을 피안적인 관심으로 돌렸다"고 평가한 기장의 <한국기독교100년사>도 길선주 목사의 말세학에 대해서만큼은 "민족이 처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민중에게 영적인 위로와 희망을 주는 보수적 부흥신학으로 민족 현실을 그의 구원론에 수용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했다.
금연하자는 설교조차 금지되고 자신이 잡혀가는 절망적인 현실이 보수적이고 열정적인 신앙인 길선주에게 '새하늘 새땅'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서 발견한 희망을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 나아가 민족과 함께 나누려 했다.
그러나 희망에 대한 묵시적 선포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3·1운동 이후 시대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인 해방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는 사회주의에 더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해방운동의 주도권은 기독교에서 사회주의로 넘겨주게 됐다.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1907년 입교해 고려공산당을 조직한 이동휘, 새문안교회 장로 김규식, 평양신학교 출신 여운형 등 사회주의자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대신, 민족의 고난과 절망적 현실을 포용한 성령운동을 이끈 길선주 같은 인물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길선주 목사가 20년 동안 목회한 장대현교회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청년들에 의해 물러난 것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