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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5

好學 2012. 1. 15. 22:57

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5

 

 

초기 선교사·한국인, 신구약 번역에 매진…성경 보급은 매서인이 결정적 역할
성경번역위원회.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창식 김명준 김정삼 게일 언더우드 레이놀즈. 이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한국 교회는 초기 급속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사진제공 한국기독교회사(생명의 말씀사))
한글성경 번역 없이 대부흥운동이 가능했을까. 지금이야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고 성경도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100년 전으로 돌아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1900년대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온 지 20년도 되지 않았기에 한글 성경을 갖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보다 먼저 선교사들이 활동을 시작한 중국은 50년 만에 중국어 신약 성서를 출판했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 대부흥운동이 가능했던 중요한 이유가 숨어 있다.
대부흥운동이 사경회를 통해 일어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복음과상황> 제160호 '사경회를 아시나요' 참조).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선교사를 불러 배웠다. 1902년 평양에서 열린 남자 사경회에 전라도 목포와 무안에 사는 사람이 참석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신앙 선배들이 보인 말씀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단적인 예다. 1903년 원산과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 역시 사경회에서 출발했다.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의 핵심 사업도 성경을 보급하고 가르치는 일이었다.

 

출간 첫 해 8천권 팔려 '베스트셀러'
▲ 최초의 권사인 백홍준 서상륜 최명호(왼쪽부터)는 존 로스 선교사와 성경을 번역한 뒤 직접 성경을 보급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사진제공 한국기독교회사(생명의말씀사))
이것은 모두 한글 성경이 번역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사역은 성경 번역'이라고 보았다. 1887년 한국에 도착한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마가복음을 출판할 정도로 성경 번역에 힘을 쏟았다. 같은 해 선교사들은 성서번역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에는 두 선교사를 비롯해 알렌, 스크랜톤, 헤론 등 장로교와 감리교의 대표적인 선교사들이 교단의 벽을 넘어 힘을 합쳤다. 이들은 1890년부터 본격적으로 번역 작업에 착수해 10년만인 1900년 신약성서를 완역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성경 번역에 보인 열정은 대단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어 사전을 출간했고, 게일은 <천로역정>을 번역할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다. 레이놀즈는 존스홉킨스대학 라틴어 교수 출신이어서 성경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번역 과정에 시련도 있었다. 신약에 이어 구약 번역에 박차를 가하던 1902년, 아펜젤러가 목포에서 열린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려고 제물포에서 목포로 가던 중 조난당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같은 해 스크랜톤이, 다음해는 게일이 안식년으로 한국을 떠났다. 언더우드도 병을 얻어 본국으로 잠시 귀환했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여러 차례 개역 작업을 통해, 평양대부흥 1년 전인 1906년 한국 최초의 공인역본인 <신약전서>를 출간했다. 5년 후에는 구약까지 출판해 신구약성경 번역을 완료했다. 이것이 이른바 구역(舊譯)이다. 성경은 출간 첫해 8천 권이 팔릴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다.
한글성경 번역은 어느 선교 역사에서도 쉽게 찾기 어려울 만큼 단기간에 나왔고, 내용도 알찼다. 선교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 번역을 오로지 선교사들의 공로로만 보는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한 예로 일본에서 성경을 번역한 이수정과 서상륜 등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의 활약을 들 수 있다.
일본에 있던 이수정은 1884년 한문 성경에 토를 단 현토성경 <신약성서 마가전>을 출판했고, 이듬해 순 한글로 된 마가복음을 발행했다. 언더우드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한국에 들어와, 이 성경을 바탕으로 번역에 착수했다. 청년성서연구원 연구실장 양진일 목사는 "선교사가 선교지에 입국할 때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와 선교를 시작한 경우는 없다"라며 한국인의 주체적인 성경 번역을 높게 평가했다.

 

서북지역 기독인, 선교사보다 먼저 번역
서북 지역에서 활동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서상륜 백홍준 등과 함께 1887년 <예수성교젼서>라는 신약 성경을 번역한 일이 있다. 최초의 한글 성경인 이 책을 흔히 '존 로스 역(譯)'이라고 부르지만, '서성륜역'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서상륜과 백홍준이 한문 성경인 <문리성서>를 한글로 번역했고,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헬라어 원문과 대조하는 일 그리고 재정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와그너(Ellasue Wagner)는 잡지 <코리아 미션 필드> 1938년 5월호에서 "로스 박사가 한국말을 배울 충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한문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할 수 있었는지 더욱이 의심스럽다"라며 이 성경을 <서상륜 번역성경>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들 외에도 성경번역위원회에 이창식, 김명준, 김정삼 등이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했고, 여러 한국인들이 선교사들의 국어 선생이나 조사로 활동하며 성경 번역에 힘을 보탰다.
성경이 빛을 본 것은 번역과 출판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도 번역 작업 못지않게 중요하다. 1892년까지 57만8천 권이 보급되었고, 1895년~1939년에는 1807만9466권이나 되는 성경이 보급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보급소가 있었고 성경 일부는 무료로 배부되었다. 지금처럼 우편 판매도 가능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역할은 매서인(賣書人·혹은 권서인)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매서인은 영국 성서공회(BFBS)가 1908년과 1940년 사이 보급한 성경 가운데 85.3%, 같은 기간 미국 성서공회(ABS)가 발행한 성경 97.79%를 보급했다.
매서인은 성서공회에서 월급을 받거나 성경을 할인받아 정액으로 팔아 마진을 남기는 자들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1~2명에서 많게는 8명까지 매서를 두었다고 교회사가 박용규 교수(총신대)는 말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이만열 위원장에 따르면,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매서인 2천 명이 활약한 것으로 추산했다.
매서인들은 단순히 영리를 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매서인들은 성경과 찬송가를 비롯해 각종 신앙 서적과 선교 달력 등을 짊어지고 전국을 누비며 서당이나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돈을 받은 것은 성경이 값진 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쌀이나 콩, 감자, 계란 등을 받고 팔았다.
이만열 위원장은 <기독교사상> 1990년 6월호에서 하루 한 끼를 때우는 여인에게 복음서를 팔았던 매서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 여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매서인이 자신이 값을 치르고 돈을 내겠다고 말했지만, 그 여인은 옆집에서 돈을 빌려와 값을 치렀다는 이야기다. 이들의 활약을 두고 영(L. Young) 선교사는 "매서인들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어려운 일을 즐겁게 수행하고 예외 없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라고 말했다.

 

한글 대중화에 기여
개신교 선교사와 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열정이 대부흥운동을 일으킨 것은 물론 오늘 한국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장신대 김인수 교수(교회사)는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100년이나 일찍 전래되었음에도 오늘 교세가 개신교의 3분의 1에 불과한 것은 성경을 빨리 번역, 보급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또 당시 지식인 언어인 한문 대신 민중 언어인 한글로 성경을 번역한 것은 한글을 대중화시킨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로교공의회는 정부가 국문연구소를 설치한 1907년보다 3년이나 앞서 국문을 공식적으로 연구했고, 이보다 10년 전에는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한글로만 기록한다'라고 결의한 바 있다.
당시 교육 사업에 관심이 높았던 선교사들은 한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초등교육 중심'으로 사업을 펼쳤다. 최현배 김윤경 등 한글학자 가운데 유독 기독교인이 많은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독교의 '무식'을 혹독하게 비판한 이광수도 한글성경 번역에 대해서만큼은 '야소교가 조선에 준 은혜'로 칭송할 정도였다.
민중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던 100년 전 선배들의 노력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옛말을 고집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 교회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