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3

好學 2012. 1. 15. 22:54

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3

 

 

 

친일 선교사들, 정교분리 고수…개인 윤리 치우쳐 '전략적 운동' 비난받기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지 장대현교회의 당회원. 왼쪽부터 김선두 목사, 정의로 장로, 마포삼열 목사, 길선주 목사, 이길함 목사, 옥경숙 장로, 위참석 장로. 뒤줄 왼쪽부터 김성택 목사, 박치로 장로, 안봉주 목사. (사진제공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해 아래 있는 것들은 밝은 면과 그림자가 지는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갖고 있듯이, 한국 교회가 그토록 재현하고 싶어 하는 100년 전 대부흥운동에도 그림자는 있다.
대부흥운동의 그림자에 대한 추적은 '나라는 망하는데 어떻게 교회는 부흥했을까'라는 삐딱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1903년과 1905년 원산 등에서 벌어진 대부흥운동 시기는 한반도가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터로 변한 때와 일치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찬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고종의 폐위 그리고 군대해산 등의 조처를 이어가던 때,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힘을 받고 있을 즈음 대한제국은 일본에 넘어갔다.
불안한 시기였기에 종교적 위안을 얻으려고 교회를 찾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산과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 입문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또 안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한 방패로 교회를 이용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 사람도 많았다. 어떤 경우든 정치적 혼란이 교회 부흥에 일정 정도 도움을 주었다는 데는 보수와 진보 진영 역사학자 모두가 동의한다.

 

민족·종교 운동 갈린 분기점
문제는 당시 한국 교회의 대부흥운동이 신앙과 민족 운동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신앙운동 노선으로 기울었다는 점이다. 양진일 목사(기독청년아카데미 교회사 강사)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1907년은 민족운동 노선과 종교운동 노선이 갈라진 분기점"이라며 "그때부터 교회에서 민족 지도자들의 이탈이 가속화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물론 당시에도 '나라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1905년 장로회공의회는 11월 감사절 다음날부터 7일간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전덕기·정순만의 인도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1주일간 연합 위국 기도회를 개최했다. 1907년 정미조약으로 고종이 퇴위하자 세계교회가 한국을 위한 기도를 했다. 순종이 1909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서북 지방을 방문했을 때는 평양 교회들이 순종을 환영하는 식과 함께 '눈물의 기도회'를 개최했다. 또 백만인구령운동 때는 한국교인 가운데 일부가 십자군병을 일으켜 일제를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해 일제가 '백만 십자군병 확보 운동'으로 주목한 바 있다.(<한국기독교사특강>, 성경읽기사 펴냄)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대부흥운동의 대세가 아니었다. 대부흥운동 기간에 사람들의 회개는 진솔하고 경건했지만, 지극히 개인적 윤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흥운동에 대한 기록은 모두 개인적인 죄에 대한 회개를 기술하고 있지, 민족을 위한 기도회나 집회를 열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평양대부흥운동 관련 기사를 <런던 타임스>에 송고한 해리스 선교사(M. C. Harris)는 '수천 명이 글 읽기를 배우고 기독교를 알아보려고 문의하며,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 오입쟁이 살인강도 유학자 불교도 등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오히려 의병운동을 자제하는 경향이 강했다. 1908년 장로교선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초이자 상징인 길선주 장로가 그 일(의병운동)의 희망 없음을 간파하고 백성들에게 도망가지 말라고 설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아가 '그가 북쪽에서 혼란을 자제시킬 수 있었고, 한국을 피투성이가 될 운명에서 구출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김인수 교수(장신대 한국교회사)는 길 장로의 활약(?) 덕분에 평양 지방에서 파죽지세로 일어나던 의병운동이 급속히 수그러들었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가 출교당하기도
▲ 1903년 평양에서 열린 부흥집회 광경. 알락산더 선교사가 인도했다. (사진제공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선교사들도 정교 분리의 원칙을 고수했다. 1901년 9월 장로회공의회에서 선교사들은 '교인의 정치 운동은 가능하나 교회가 정치 운동을 하는 곳은 아니다'라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가지 조건'을 결의한 바 있다. 그리고 대부흥운동 기간과 일제시대까지 이 원칙은 유지되었다.
당시 상당수 민족 지도자들은 일제 식민지로 변해가는 현실에서 교회가 민중의 눈을 피안적인 곳으로 돌렸다고 우려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신민회를 이끌던 안창호였다. 그는 부흥운동이 교회의 비정치화와 몰역사화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이만열 위원장(국사편찬위원회)은 "선교사 결의안이 채택된 뒤 한동안 사람들이 교회를 뛰쳐나갔고, 이러한 원칙을 근거로 교회에서 출교당한 사람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교회가 비정치적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와 담을 쌓고 순수 신앙 공동체를 유지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당시 지배세력, 즉 일본에 호응했거나 최소한 유익을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은 정교 분리를 주장하던 선교사들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북장로교 게일, 북감리교 해리스(당시 한국·일본 교구 감독) 등 지도층 선교사들은 일본의 식민 통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선교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초대통감 이토오 히로부미는 "정치상 일체의 사건은 본인에게 맡기고, 정신적 방면의 계몽은 귀하 등이 맡아 달라. 이렇게 해야 조선 인민의 유도 사업이 완전을 이룰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에 해리스 선교사는 <요미우리신문>에 '이토오 후작의 통치는 가장 큰 칭찬을 받아 마땅하며, 우리들은 통감 정략의 열성 있는 지지자임을 고백한다'라고 화답했다.
미국장로교 외국선교회 브라운(Arther. J. Brown) 총무는 "일본 통치는 한국이 다른 어느 나라에게 지시받는 것보다 낫고 또 한국이 자기 손으로 다스리는 것보다 낫다"라며 일제의 한국 지배에 지지를 표명했다. 스크랜톤 선교사(W. B. Scranton)는 개신교 청년 모임인 엡워드청년회가 반일운동을 전개하자 해산 명령을 내렸다.

 

자국 이익에 묶여 일본 지지
대표적인 선교사들이 친일로 기울었던 것은 자국의 세계 전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1905년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고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을 상호 허락하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체결했다. 미국과 일본의 우호 관계는 태평양전쟁 전까지 유지되었으며, 지도급 선교사들도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국가 존망은 세상사인 만큼 영혼 구원에 주력하자고 주장했다. 베어드 선교사(W. Baird)는 "백만인구령운동에 관심이 쏠림으로써 한일 합방의 시련기에 조선에 평화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게다가 기독교서회의 전신인 대한성교서회가 귀한 책이라는 점을 가르치기 위해 돈을 받고 팔던 성경을 백만인구령운동 때 낱권 성경 70여만 권을 무료로 뿌렸다는 점도 의혹을 사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교회 역사가들이 "대부흥운동은 기울어가는 국운 앞에서도 신앙을 통해 흩어진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는 원동력이었다"라고 평가함에도, 여전히 친일 선교사가 전략적으로 일으킨 신앙운동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