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2

好學 2012. 1. 15. 22:52

평양부흥운동 후 100년전 회고록 2

 

 

 

부흥운동의 실제적 기반이 된 성경공부 모임…전국 각지에서 자비로 참석

한국교회 교인이라면 부흥회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갖고 있다. 밤새 뜨겁게 기도한 일, 눈물로 부르짖었던 일, 부흥강사 목사의 조금은 거친 설교에 매료된 일, 믿지 않는 친구 손을 잡고 교회로 인도하던 일까지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기억이다.
100년전 부흥회에는 성경공부와 설교, 전도가 균형을 이뤘지만, 지금은 '성도에게 부담을 주는' 설교만 남았다.
그러나 부흥은 추억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부흥은 한국 교회의 영원한 숙제다. 지금도 한국 교회는 부흥을 이야기하고, 부흥을 소망한다. 특히 2007년이 다가올수록 100년 전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을 다시 지피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00년 전 부흥의 열기를 다시 한번 맛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한 마음 탓일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부흥과 100년 전 선배들의 부흥에는 차이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00년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인 '사경회(査經會)' 운동이다.

 

1900년대 초 전국이 '들썩'
사경회는 지금 한국 교회에서 벌이고 있는 부흥회나 우리 기억 속의 부흥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전통이다. 그러나 사경회운동을 떼어놓고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원산부흥운동은 하디(R. A. Hardie) 선교사가 인도한 사경회 겸 기도회에서 일어났고, 평양대부흥운동은 평안남도 남자도(都) 사경회 기간 중에 일어났다. 백만인구령운동 역시 사경회와 전도를 결합한 운동이었다.
당시 대부흥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던 선교사 스위러(R. E. Shearer)는 "사경회는 부흥 운동의 진정한 수단이고 한국 부흥 운동의 실제적인 기초"라고 말했고, 블레어(W. M. Blair)는 '사경회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 시대 한국 교회의 급성장과 부흥 운동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사경회의 기원은 18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새문안교회를 목회하던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한국인 사역자를 집으로 불러 한 달간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나 사경회가 한국 교회에 정착하게 된 것은 네비우스 선교정책 덕분이다. 중국 지푸에서 사역하던 네비우스(J. L. Nevius)는 1890년 6월 10일간 서울을 방문해 젊은 선교사들에게 선교 방법을 전수했다. 언더우드(26) 아펜젤러(27) 게일(25) 알렌(27) 스크랜톤(29) 등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패기와 열정은 있었지만, 선교 경험이 일천했던 '신출내기'들이었다.
이때 네비우스 선교사는 10개 조항의 선교 정책을 전수했다. 여기에는 한국 선교의 기준이 된 '한국인 스스로 전도하고(自傳), 한국인 스스로 교회를 치리하며(自治), 한국인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自立)'는 유명한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10개 조항 가운데 여섯 번째 조항이 사경회에 관한 것이다.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領袖)와 순회 조사(助事)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한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조사는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영수는 조직이 아직 완전하지 못한 교회를 인도하는 임시 직분으로 장로 사역을 수행했고, 조사는 선교사들의 개인 조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선교사들이 순회하는 구역의 교회를 맡아 목회하는 목회자였다. 영수가 안수받지 않은 장로라면 조사는 안수받지 않은 목회자인 셈이다)
초기 사경회는 영수나 조사 등 사역자를 위한 모임이었으며, 기간이 한두 달 동안 계속되는 경우도 있었고 신학 공부까지 가르쳤다. 1892~1894년 이후에는 전국으로 펴졌고, 대상도 전교인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기간도 열흘에서 두 주 정도로 조정되었고 이후에는 한 주로 줄었다.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인도했으나 나중에는 한국인 영수나 조수가 인도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새벽기도회 기원으로 보기도
1900년대 초는 사경회로 전국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기록을 보면, 도 사경회에 5백~1천 명이 모이는 것은 보통이었다. 평양 선천 재령 등 교세가 급속히 팽창하는 곳에서는 참석자가 1천 명을 웃돌았다. 이 세 곳에서는 백만인구령운동이 한창이던 1909년 6백회 이상 열렸고, 4만1천 명이 참석했다. 한국선교 사상 가장 큰 사경회는 1917~1918년에 열린 사경회로 북장로교의 경우만 전체 교인 11만7천 명 가운데 65%인 7만6천 명이 참석했다. 1910년부터 20년 동안 129만2천 명이 참석해 한 해 평균 참석자가 6만4천 명을 넘었다.(<한국 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곽안련(C. A. Clark) 선교사에 따르면, 1936년 전국에서 2334회의 사경회가 열려 17만8천 명이 모였다. 당시 교인이 34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절반 이상이 참여한 셈이다. 사경회는 말씀 연구가 중심이었지만 기도와 전도가 빠지지 않았다.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교회사)에 따르면, 당시 사경회는 보통 새벽 5시부터 1시간 동안 열리는 기도회로 시작했다. 이 사실 때문에 사경회를 새벽 기도회의 출발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기원은 아닐지라도 새벽 기도회의 영성이 한국 교회에 뿌리내린 결정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한국새벽기도운동본부'라는 이름을 가진 부흥사회가 있는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9~10시까지는 각 반별로 나누어 성경을 공부하고 45분간 기도회를 개최했다. 그리고는 11시부터 1시간, 2시부터 1시간을 성경 공부에 투자했다. 그 뒤에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도해 저녁 집회에 사람들을 초청했다. 저녁 집회는 선교사나 유명한 강사의 설교로 채워졌다. 사경회는 농한기인 1월과 7월에 주로 열렸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된 장대현교회의 도 사경회도 1월 초에 개최했다.
사경회에 참석하려는 선배들의 신앙은 눈물겨웠다. 이만열 위원장(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1901년 평양에서 열린 여자 사경회에는 1백50리에서 3백리 이상 떨어진 삭주 창성 의주 지역에서도 몇 주일 동안 먹을 쌀과 옷을 짊어지고 왔다. 다음해에 평양에서 열린 '사나히 사경회'에는 4백명 가량이 모였는데, 이들 지역뿐 아니라 황해도와 서울, 전라도 목포 무안에서도 올라왔다.
특히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자립' 정신에 따라 참석자들이 경비를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멀리서 사경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곽안련 선교사는 1910년 자기가 인도한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왕복 여행비와 체류 비용을 부담하면서 강원도 동해안에서 200마일(리로 환산해라)을 걸어온 14명을 소개했다. 그는 먼 거리에서 오는 교인들의 경우 쌀자루나 땔감을 지거나 이고 참석하는 이들도 있다고 증언했다.
말씀을 연구하고 강연과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은 이들은 과거 자기가 도둑질한 물건이나 돈을 돌려주고, 교회 안팎에서 범한 죄악을 토로하며 용서를 구했다. 이길함 박사와 블레어 선교사가 1907년 2월 영유에서 개최한 사경회에서는 한 사람이 교회 가까이에 있는 계곡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하고 기절한 일도 있었다. 이렇듯 선배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지녔지만, 분별없이 행동하지는 않았다.
사경회에서 일어난 회개에 대해 박용규 교수는 <한국기독교회사 1>(생명의 말씀사 펴냄)에서 "센세이션이 없었으며, 종종 사용되는 '감정'도 없었고, 자기 기도에 완전히 집중해 있었다"라는 매큔(George McCune)의 지적을 인용해 설명했다.

 

'고도의 부담만 주는' 현대 설교
박용규 교수는 사경회가 부흥사 한 사람에 의해 진행되는 일반 부흥회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또 그는 블레어 선교사의 주장을 길게 인용했다.
"이(사경회-편집자 주)는 회중에게 고도의 부담을 주어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케 하는 식의 부흥사에 의한 전문적인 부흥회보다 훨씬 낫고 오래 지속되는 것같다. 물론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식의 부흥회도 없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나는 교회 생활 속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성경 공부와 개인 전도 사역이 잘 맞물릴 때 교회가 부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속히 예수를 믿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두란노 펴냄)
당시는 성경도 완전히 변역되지 않았다(1911년에 와서야 구약성서까지 번역되었다). 한글을 모르는 이들은 성경을 읽으려면 먼저 한글을 배워야 했다. 오전에는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한글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았다. 한글을 배웠더라도 성경을 읽는 도중 모르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사경회는 당연히 필요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일까. 요즘 부흥 집회에는 성경에 매달려 씨름하는 전통을 찾아볼 수 없다. 부흥 강사의 '고도의 부담을 주어 결단케 하는 식'의 설교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