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55과 룻기(3): 룻과 보아스(3장) 10

好學 2012. 1. 7. 20:37

제55과 룻기(3): 룻과 보아스(3장) 10



남아 있는 여백


룻, 보아스, 나오미는 다 한결같이 자신들의 능력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일이 진행되면 될수록 자신들이 결코 채울 수 없는 무엇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여백'을 자신들이 채워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생의 여백(餘白)을 하나님께 드린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갈 수 없는 '여백'을 하나님께 드릴 줄 알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수단으로 무엇을 해 보려고 하는 욕망을 일지감지 포기한 것이다.  그것만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에 좋은 여건이 또 있을까?  

이쯤에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태풍이 쓸고 간 황량한 들판처럼 볼품없는 사람들로 전락한 룻과 나오미가 걸어 온 인생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잃었으나 두 여인의 가슴에 남아있는 작은 불꽃과도 같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절규를, 오직 소망이 주께 있음을 믿으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들었던 두 여인의 인생을 버리시지 않았다.

그들은 실패했으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두 여인이 실패한 인생의 너덜너덜한 파편들을 부둥켜 안고서, 아무도 그 가능성을 보지 못했던 아직은 실낱처럼 남아있는 그들의 '여백'을 바라보셨다.  

우리는 여기서 신약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품꾼의 하나로 여겨 달라고 할 정도의 패인이었다.  아름답던 모습은 온대 간대 없고, 완전히 거지가 되어 귀향하고 있었다.  그의 소생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없다.  그러나 보라!  아버지는 달랐다.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아버지는 일그러진 아들을 다시금 새롭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렇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탕자를 보았으나 하나님은 아들을 보았고, 우리는 실패를 만들었으나 하나님은 잔치를 만들었다.  모든 인생은 이처럼 제로 포인트에서 시작한다.  

15,17절

  "보아스가 가로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가로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보아스의 여백은 15절이다.  아무도 이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본 사람도 없다.  증인이 없는 셈이다.  마치 지난 밤의 일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한들 그 누가 이 일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보아스는 지금 룻 앞에 당당하게 서 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지난 밤이나 지금이나 하나님 앞에서 산 것이다.  그는 이미 지난 밤 룻과의 약속을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13b)라고 말했었다.  참으로 멋진 사람이다.  우리가 보아스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정직할 수 있고,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의 행복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쁨의 몫까지를 지혜롭게 배려한다.  분명 보리 여섯 되를 룻이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나오미의 것이다는(17) 보아스의 말은 룻과의 약속이 룻만의 것이 아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즉, 나 보아스는 룻 뿐이 아니라 나오미 두 사람 모두에게 '기쁨'의 여백이기를 원한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여백을 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