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56과 룻기(4): 룻과 다윗(4장) 2

好學 2012. 1. 24. 12:09

제56과 룻기(4): 룻과 다윗(4장) 2


보아스
그런데 우리는 이와는 전혀 반대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았다(1).  무엇 때문이죠?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려고?  어떤 음흉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려고?  다른 사람 골탕 먹이려고?  다 아니다.  그는 지금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성문에 앉았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 룻과의 약속(3:11), 그러니까 다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곳까지 나아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룻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   

(1) 그는 두 가지가 불리했다.

하나는, 자신보다 순위가 높은 제1순위 기업 무를 자가 있는데, 그는 그 '아무개'가 누구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룻과 결혼하여 엘레멜렉의 가문을 이어가야 하는가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자신 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조금 불리해 보이는 이러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말씀'이 보아스에게 불리했다.  말씀이 이미 기업 무를 자의 순위를 결정해 주었는데 보아스는 우선순위자가 아니었다.  그것까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말씀이 보아스의 계획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 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3:12-13)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자기에게 불리한 말씀이면 모르는 척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경험, 계획, 상식, 의도, 목표에 따라 행동하며 결정하게 된다.  기도하다가, 거기까지는 참 좋다.  그런데 기도해도 안될 것 같으면 자기 방식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보아스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 일이 진행되어야 하고, 말씀의 법이 지지하는 사람이 룻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고수하였다.  보아스는 말씀보다 앞서지 않았다. 언제나 말씀 바로 뒤에 서서 말씀이 이끄는대로 따라가고 있다.  그 역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말씀이 오히려 불리한데도 그는 말씀을 앞 세운다.  그 보아스가 무대에 서서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하면서 질문한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은가?  축복된 삶을 살고 싶은가?  그럼, 말씀보다 앞서지 말라.  말씀이 앞서면 따라가고, 말씀이 멈추면 함께 멈추고, 말씀이 입을 열면 목숨이 경각간에 있게 되거나 혹시 손해가 된다 할지라도 입을 열고, 말씀이 침묵하면 함께 침묵하라!  그 사람은 하나님이 성공을 보장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 자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마6:33).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말라!  나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 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 나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 전도가 필요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 복음을 만나야 할 사람, 죄사함 받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야 할 사람,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어야 할, 아니 회복해야 할 사람을 향해 보아스처럼 자신의 전부를 드릴 준비가 된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2) 그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룻' 중심이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정신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9-4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2-14)

(3) 보아스는 순리대로, 정도(正道)를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마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과 권세, 즉 세상적인 너절한 것들을 동원해서 자기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더욱 이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과 환경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는 뒷짐지고 수동적인 자세로 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살았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섭리하실 것을 믿었다.  자기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다.  룻 보다도 룻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룻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 만 한 가치가 있다.  왜냐?  '나'가 아니라 '너'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직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은 충분히 살 만 한 가치가 있다.  그래도 교회에는 아직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보아스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하여 비록 고독하지만 하나님의 방법대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성도가 아직은 있다.  그래서 아직 교회는 희망이다.  

(4) 보아스는 성읍 장로들을 청하여 기업 무를 자의 증인을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말씀대로 증인을 세웠다.  물론 율법에는 두 세 증인으로 할 것을 명하였으나 그는 10인을 세움으로써 룻을 맞이하는 일이 결코 그 어떤 것들로도 취소될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 보인다.  그는 빨리, 서두르다가 일을 망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