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救援論]구원.신앙.계시.

구원론(3)

好學 2011. 12. 25. 14:28

구원론(3)


6. 중생이란 무엇인가?

말씀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거듭 나게 된다. '거듭 난다' 곧 중생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7). 거듭 나도 좋고 그렇지 아니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거듭 나지 않으면 안될 (must) 당위성을 띤 것으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중생이란 무엇인가?

1. 그 낱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새롭게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2) 새롭게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3) 위로부터 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4) 낳는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5) 새 생명의 생산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6) 함께 살린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

2. 중생은 이적이다.

중생은 피조물의 동의 없이 성령님이 직접 행하시는 일이므로 그것은 큰 이적이 아닐 수 없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니 만큼 기적 중의 기적이다. 즉 중생은 사람 안에 새 생명이 들어옴으로 그의 주관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인데 그 변화는 성령의 감화 아래 하나님 편으로 향하여 움직이는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 변화는 인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1) 그의 지력에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2) 그의 감정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3) 그의 의지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이런 지, 정, 의에 걸치는 변화는 홀연히 변화하는 것이며 불가항력으로 되는 것이므로 비일하고 헤아릴 수 없는 변화인 것이다.

3. 중생은 시작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했기 때문에 회개하고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며, 항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전적으로 나는 피동적이며 홀연히 되어지는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인것이다.

4. 천국 백성은 중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 천국 백성이 되려면 중생하여야 하는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알게 된다.

1)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2)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샘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3)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다"(시 51:5).
4)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5)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6)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5. 중생은 성령으로 된다.

중생에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과 협조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마치 죽은 자가 살아남에 있어서 그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음과 같다.
오직 성령님만이 안으로부터 영혼에 즉각적으로 동작하는 것이며, 성령의 창조적 권능의 행사에 의하여 새로운 도덕적 성질 혹은 행동의 원소를 심어 들이시는 것이다.

7. 니고데모는 거듭났는가?

니고데모가 중생했는지 아니했는지 성경이 말하지 아니하므로 알 수 없으나 요한복음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세번이나 나온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께 와서 중생에 대한 신비로운 교훈을 듣고 돌아갔다. (요 3:1-15).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위해 변호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요 7:50).
니고데모가 죽은 예수님의 몸에 바르기 위하여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요 19:39).
이쯤 되면 그는 성령으로 중생한 것이 틀림 없다. 중생한 사람은 적어도 세 가지의 새로운 열매가 성령 안에서 일어남을 보게 된다.

1. 산 소망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 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소망은 분명히 중생한 자가 가지는 축복이다.
소망은 성령님의 산물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2. 믿음의 시련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5-7).
소망의 사람은 곧 믿음의 사람이기도 하다.

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살아있는 신앙이 발견되는 곳마다 영원한 구원의 소망이 불가분적으로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시작이 되고 그것을 가능하게도 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성실을 믿으며, 소망은 적당한 시기에 그것이 실현 되기를 기대한다. 신앙은 소망이 서 있는 기초요, 소망은 신앙을 양육하고 계속케 한다.'

3. 예수님을 사랑함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니고데모가 주님을 변호하는 동기도, 또한 향유를 가지고 온 동기도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자를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