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아름다운 축구인 차범근

好學 2011. 12. 17. 06:13

아름다운 축구인 차범근

 

 



1980년 독일생활 2년째를 맞은 차붐은 상대팀 수비수의 고의적인 반칙으로 척추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를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는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형사고발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차붐은 분명한 어조로 말하였다.

“고소는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는 그를 용서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도 어쩌면 평생을 두고 짝사랑해온 사람이 있었다. 차범근이다.

그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가슴 설레고, 활력이 되며, 인생의 절정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그를 한 번 취재하였고, 그의 집을 한 번 방문하였다. 내겐 아주 특별한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하여 많은 글을 썼다. 내가 만드는 잡지들 속에는 언제나 그의 이름이 가끔 등장하였다.

그는 타고난 재능을 가졌으나 그것만으로 자신의 실력을 삼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연습하고 노력하여

완전하고자 한 선수였다. 성공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면서도 그는 고비마다 좌절의 시간 앞에 맞닥뜨려야

했으며, 그 시간을 극복하고 다시 우뚝 섰다. 언제나 성공만 있는 인생은 싱겁다.

타고난 재능으로 탁월해진다면 그 또한 남의 일처럼 와 닿지 않는다.


차범근은 인생의 쓰고 단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맞닥뜨린 모든

환경 앞에서 도전하고 성취한 사람이었다. 그의 좌절을 보면서 함께 아파할 수 있었고,

성공을 보면서 함께 즐거워할 수 있었던 까닭도 그래서였다.


그는 나의 레전드였다


열 살이 되어 가던 무렵 그의 이름을 알았고, 지금 마흔이 넘은 시간까지도 그의 기사 하나하나는

나를 주목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40년 가까운 세월을 그와 함께 환호하고 아쉬워한 셈이다.

그가 프랑크푸르트나 레버쿠젠의 유니폼을 입고 초록의 그라운드를 누비는 장면은 마치 나의 젊은 날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반갑다. 결코 남 같지가 않다. 그는 나의 전설이었다.

어디 나와 같은 사람이 한둘일까?

스타들은 그들의 인기만큼 안티팬을 갖는 법이지만 차범근은 그 시절, 선진국이라 불리는 잘나가는

나라들의 주변이었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네들 모두의 사랑이고 희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시절 차범근은 당대의 레전드였다.
우리 국민들뿐이 아니었다. 걸출한 세계의 축구스타들도 차범근을 우상으로 삼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자.

독일 국가대표 미하일 발락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서울에 왔을 때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가 차붐의 조국입니까?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영국의 원더보이 마이클 오언도 그랬다.
“나는 차붐을 존경한다. 어릴 때부터 그를 보면서 그와 같이 되는 게 소원이었다.”
감독들도 그랬다.
“우리가 풀지 못한 숙제는 차붐이었다. 그는 해결 불가능한 존재였다.”

이 말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인 맨유의 퍼거슨 감독이 1979년 당시 에버딘 감독으로

있을 때 프랑크푸르트와 맞붙은 경험을 두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한 말이다.

차범근은 그런 존재였다. 불세출의 스타란 그를 일컫는 말이었다.




아름다운 예수쟁이 ‘차붐’

독일에서 뛸 때 팬들은 그를 ‘차붐’(Cha Bum)이라 불렀다.

차붐은 한 번도 유럽의 정상에 오르지 못한 두 팀,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을 유럽의 정상에 올려놓은

장본인이었다. 독일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세 경기 당 한 골을 넣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골들 가운데 단 하나의 패널티킥 골도 없었다는 점이고,

그가 뛴 그 수많은 경기에서 그가 받은 경고는 단 한 장이 전부였다. 그는 그라운드의 모범생이었다.

독일축구협회가 차범근을 독일의 국가대표로 뛰게 하려고 귀화를 추진한 사실을 아는가?

그러나 차범근은 그 제안을 사양하였다. 그가 독일 국가대표로 뛸 길을 단호히 거절한 까닭은 조국을 떠날 때

그가 국민들과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 약속이란 독일에서 축구를 배운 뒤 꼭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일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독일인들에게 차붐의 기억은 무엇보다 훌륭한 인격을 지닌 선수로 남아 있다.

1980년 독일생활 2년째를 맞은 차붐은 프랑크푸르트 팀의 핵이었다.

상대팀 수비수들은 고의적인 반칙을 해서라도 차붐의 공격을 차단하느라 안달이었다.

그 해 8월 차붐은 나중에 자신이 몸담게 될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상대팀 수비수 위르겐 겔스도프의

고의적인 반칙으로 척추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결과는 심각하였다.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를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물론 레버쿠젠의 팬들까지 겔스도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는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겔스도프에게 형사고발을 추진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차붐이 나섰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하였다.
“고소는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는 그를 용서한다.”
이튿날 차붐이 입원한 병원에는 수많은 꽃다발이 쌓였다.

뛰어난 기량에 관용과 사랑까지 겸비한 동양의 위대한 축구스타를 향해 보내는 독일인들의 찬사였다.

축구인들 가운데는 골을 넣고 운동장에 꿇어앉아 기도를 하는 종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그런 종교행위보다 더 위대한 종교적 용서를 차범근을 통해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차범근이 국가대표팀이나 프로팀의 감독으로서 초조하게 자신의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무릎에 얹고 기도하는 모습은 그가 경기장에서 보여준 아름다운 인품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웠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차범근은 한 TV방송사의 해설자로 나섰다.

그의 해설은 선수들의 호흡, 예민한 심리변화까지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선수들의 자리에서, 때로는 선수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선배로서, 그들의 움직임을 전하였다.

그의 해설을 통해 우리는 축구의 전술이 갖는 전문적인 영역들을 공유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풍경이 있다. 이태리를 꺾고 8강에 진출했을 때이지 싶다.

승리가 확정되자 감격에 겨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 맛에 축구를 해요.”
차범근의 말은 어쩌면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한 사람이 비로소 정상에 섰을 때

고백할 수 있는 최고의 언어처럼 들렸다. 축구를 하며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차범근은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자랑스러워하였다. 여러분들도 즐겁지 않으냐, 축구란 게 이런 것이다, 그리 말하는 듯 보였다.


스스로 레전드가 된 사람 차범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차범근은 감독으로 있던 수원의 선수들은 가끔 차범근 감독과 함께 미니 게임을

즐겼다고 했다. 그럴 때면 차범근은 현역 선수 못지않은 기량을 뽐내었다. 선수들은 그런 감독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철저히 자기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자기관리를 그렇게 철저히 하는 축구선수를 본 적이 없다고,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증언하였다.

차범근을 인터뷰한 축구전문지 <포포투>에는 차범근의 독일생활에 대한 이야기 한 편이 실렸다.

“차범근은 팀에서 ‘사감선생’으로 통했다. 철저한 몸 관리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원정 경기를 갔을 때 그와 한 방을 쓰는 룸메이트는 밤 아홉 시면 어김없이 TV를 끄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의 가방 안에는 늘 체중계가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체크하며 가장 좋은 경기력을 내는 79.2kg을 유지했다.

그것이 10년 간 차범근이 독일에서 성공하며 지킨 원칙들이었다.

아내 오은미 씨는 ‘인간이길 거부하고 사는 사람 같다’고 남편을 표현했다.”

차범근은 축구를 위해 일상을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아마 그런 차범근을 향하여 “그렇게 재미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차범근의 재미는 축구에만 있었다. 그래서 축구에 미쳐서 산다는 말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경기장에서 얻는 승리를 어떤 즐거움보다 앞세웠던 사람, 그래서 다른 어떤 즐거움도 희생시키면서

오직 자신이 서야 할 자리 곧 경기장에서의 승리를 꿈꾸었다.

그래서 차범근은 축구의 고결함을 신봉하는 ‘순수 풋볼리스트’라고 불렸다.

언젠가 선거가 펼쳐지는 정치의 계절에 한 정치인이 어린이들과 축구하는 차범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 큰 일을 하셔야죠.”
정치계에 입문해 보라는 뜻이었다. 정치를 해서 체육부장관이라도 된다면 전 국민들을 위한 체육정책을

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입담을 폈을 것이다. 그러나 차범근은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일이 그것보다 더 큰 일입니다.”

차범근의 눈에는 어린이들에게 축구교실을 열고,

그들이 위대한 축구선수로 자라는 것을 돕고 독려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차범근이었으므로 그는 동시에 수많은 축구선수들의 레전드가 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차범근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였더라면, 또는 돈이나 권력이나 여성편력에

함몰된 그런 존재였더라면 축구스타 차범근은 존재했겠지만 인생을 걸고 짝사랑할 만한

‘레전드’는 아니었을 것이다.

차범근을 향한 ‘레전드’의 명칭은 인생을 통하여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꽃피워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일 것이다.

하여 차범근은 내게 그저 축구선수 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내게 준 기쁨의 총량과, 아쉬움에 가슴 앓았던 수많은 시간들과,

그의 승리를 통해 내게 깨우친 삶의 지혜들이 너무 커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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