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사상가 4
4명의 주요 종교개혁 사상가 와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차 례
I. 종교개혁 신앙과 사상의 부활
II. 마틴 루터
III. 존 칼빈
IV. 토마스 뮌쩌
V. 존 웨슬리
VI.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성서 이해
뮌쩌는 성서 자체는 증거를 주는 것이지 신앙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성서에 대한 권위가 아무 의심 없이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뮌쩌가 성서를 무시했다기 보다는 성서 자체는 그 자체를 능가하는 것을 가르친다 성서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외적인 증거일 뿐 신자 안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뮌쩌는 문자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성서에 한정하지 않으며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인간의 마음 속에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뮌쩌는 자연신학적인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뮌쩌도 성경 말씀을 교회의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롤란드 베인튼과 칼 홀은 뮌쩌를 감정 혹은 경험의 수단으로 구원받은 자의 정체를 확신시킨 개척 종교 개혁가라고 해석했다. 고든 랍은 뮌쩌를 그의 성화 사상 때문에 최초의 감리교도 라고 부르고 있다. 웨슬리는 로마서 8장을 중심으로 성령의 내적 확증을 주장한다. 뮌쩌도 웨슬리처럼 성령의 내적 확증의 교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거듭남과 성화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고 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역사라고 강조한다면, 뮌쩌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역할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성령의 내적인 확신을 가진 인간의 동참이 더욱 강조되므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는 그의 영성에서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을 이룸에 있어서 뮌쩌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반대하고 '율법에 의한 칭의'와 그것을 통해 성령이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자발적인 도구가 되게 하는 구원의 완성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행함, 곧 인간의 사역을 중요시하고 있다. 루터의 슬로건 '오직 믿음으로만'이 뮌쩌에게 와서 '오직 율법으로만'으로 바뀌었다. 그의 기본적 관심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뮌쩌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형벌을 받음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분들 중 최초의 수난자라고 간주된다. 그리하여 죄인의 의인화는 신앙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형벌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취된다. 그 자신이 율법에 의해 야기되는 고난을 통한 변혁을 느꼈기 때문에 전 세계도 연약한 피조성으로부터 강한 왕국으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뮌쩌에게 있어서는 객관적인 의인화의 단계가 없는 주관적인 성령의 내적인 사역만이 강조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내적인 확증에 대한 출발은 기독교의 외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의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뮌쩌는 신비주의적 영성으로 성화를 말하면서도 신비주의나 경건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서 교회와 사회의 구조 개혁을 혁명적으로 시도하는 정치적 신비주의를 강조한다.
뮌쩌의 민중은 역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고, 능동적으로 구원 완성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에서 자라나는 영혼은 지고의 혁명적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뮌쩌의 고난 신학은 종교적 경험의 권위로 집중된다. 루터적 개신교에서 잊혀진 종교 경험의 역동성과 신자들의 개인 생활의 변혁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뮌쩌는 루터를 달콤한 그리스도를 외치는 설교가로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은 고통 당하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생각했다. 고난을 통하여 구원의 과정은 계속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외적 고난과 내적 고난이 극복될 수 있다. 그 고난 속에서 민중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실천하는 역사 변혁의 행동을 강조한다.
뮌쩌는 말씀 신앙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성령 변혁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었다. 개인적 구원으로서의 계시 대신에 계시는 사회적 변혁으로 이해된다. 그는 어거스틴으로부터 루터에 이르는 시민 복종의 정통 교리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드온으로부터 엘리야 까지 불의한 무신론에 대항한 거룩한 투사들의 예들을 뮌쩌는 발견했다. 뮌쩌는 자신을 다니엘과 동일시할 뿐 아니라, 예레미야와도 동일시했다. 그의 성화 신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개입의 생생한 기대와 연결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일으켰다. 하나의 능력 있는 사회적 신비주의가 뮌쩌로부터 태어났다.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 인간의 성화와 역사의 종말 를 선포했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그는 신정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뮌쩌는 어떤 종류의 세속적 정부도 거부한다. 그는 무정부주의자요 과격한 혁명가였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완전한 혁명과 역사적 변혁을 이룩하기를 원했다.
뮌쩌는 지상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폭력(정의로운 칼의 사용)을 선택하였다. 뮌쩌는 비록 농민 전쟁의 상황이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전제로 하는 혁명적인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마르크시스트 농민 전쟁과 뮌쩌를 역사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연구는 엥겔스의 {독일 농민 전쟁사}라는 작품 속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사고와 연구의 발전을 배경으로 본격화하였다.
뮌쩌와 농민 전쟁은 혁명적 노동자들의 운동과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싸움의 중심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뮌쩌 신학의 본질은 혁명적 이데올로기보다는 내면적, 영적 성화 사상의 외연화, 사회화, 정치화이다. 그리고 그의 폭력 이해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다르게 반동 폭력(counter-violence)적 요소가 많다. 뮌쩌의 폭력에 대한 이해는 그의 신앙적인 열정과 상황 이해에서 유래된 반동 폭력의 요소가 많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뮌쩌 자신은 능동적인 폭력의 선동자라기 보다는 정부나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인데 이 일을 행하지 않으면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의 제창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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