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54과 룻기(2): 엘리멜렉과 룻(2장) 7

好學 2011. 12. 16. 22:24

제54과 룻기(2): 엘리멜렉과 룻(2장) 7

 

4. 룻 스타트(룻 2:8-16(c))

축복의 통로


룻은 IS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인 셈이다.  
우리는 룻에게서 바울의 영적 통찰을 발견한다 :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Rom. 10:14-15,17)

그렇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모압에 선교사로 파송하셨다.  룻은 나오미에게서 하나님을 알았고, 신앙을 배웠다.  그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10년동안 단 한사람을 구원시킨다.  이는 노아와 비교해 볼 때 대단한 것이다.  노아는 120년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8명의 가족 외에는 한사람도 구원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라.  온 모압은 룻을 비웃었을 것이다.  마치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행복과 모든 것을 버리고 고생의 인생길을 자원해서 선택한 룻을 경멸했을 것이며, 옹기종기 모일 때마다 룻은 입가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룻의 편이었다.  소돕과 고모라가 그랬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사위들은 소돔의 멸망을 농담처럼 여겼다.  역사는 사위들의 편이 아니었던 것처럼 결코 시어머니를 버리고 모압에 남은 오르바 편이 아니었다.
 

룻 스타트


룻의 축복이 점점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나오미를 따라 IS 공동체 안으로 편입될 때부터 예고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화가가 컨버스에 스케치를 시작할 때는 몇 개의 선과 점이 불규칙적으로 나열되는 듯 하지만, 그러나 스케치에 이어서 서서히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룻에게 이처럼 보응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 안으로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Rom. 8:30).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품으로 향하는 결단의 순종이다.  아무나 이러한 결단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는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믿는 자만이 '믿음'으로 결단할 수 있다.  결단의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여는 열쇄와 같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다(Jen. 12:1- ).  생각해 보자.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리려 3일 길을 가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자(Gen. 22:1-14).  아브라함이 한 것은 끝까지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수풀에 한 숫양을 준비하셨다(vs. 13).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둔 숫양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 숫양이 있는 곳까지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숫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의 믿음, 바로 그것이 없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러했다(Luke. 5:1-11) :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vs. 11)  또한 바울이 그러했다(Acts. 20:24)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2 Tim. 4:8)  그 누구보다 또한 예수님이 그러했다(Phil. 2:5-11, Jn. 1:1-14).

아직 나에게 룻과 같은 축복이 없는 것은 먼저 그녀와 같은 결단(순종)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축복이 없다고 아우성 하지 말고, 순종(결단)의 믿음 없음에 눈물 흘리며 회개의 탄식을 해야 한다.  이 둘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룻의 프로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고향 모압과 그 문화, 부모, 친척, 삶의 양식, 등등-- 나모미와 그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자신의 삶을 U-tern 했다.  이러한 결단이 옳은 (선한, 정당한) 결정이라고 보아야 할 그 어떤 미래의 보장이 확실치 않았다.  시계(視界)가 완전 제로(zero)였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미래가 불확실하면 할수록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겼다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1 Pet. 5:7)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 없는 모든 것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택했다.  이것음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아무 장래의 보장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빈 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찬송가 188장 3절),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그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축복으로 응답하셨다.  오직 하나님, 오직 믿음, 오직 시모 나오미의 편에 설 때부터 이것은 충분히 예견되는 결코 역류할 수 없는 거대한 축복의 물줄기였다.

비록 룻의 결단은 훗날 하나님의 큰 은총으로 보상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복된 미래가 보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그러한 미래를 조건으로 축복을 도적질(도박)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이 믿음이 서는 자리이다.  무명시절 다윗이 그러했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택하셨으나, 그는 묵묵히 준비했고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1 Sam. 16:1- ).

룻은 이방인이었다(vs. 10).  그렇다면 그녀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 유대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룻의 한계다.  그녀는 은총 밖, 그리스도 밖, 구원 밖에 있었던 소망없는 사람이었다(Ep. 2:1).  인생은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됨,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란 결단코 없다.  그렇다면 룻이 구원받은 것은 그녀의 선행, 즉 시모를 봉양한 효도의 반대급부(or 논공행상)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녀는 최악의 상황에 있었다.  그녀는 이때 고집 부리지 않았다.  동양식 사고방식에서 볼 때 이때는 자존심이 상한 때요, 창피한 때다.  그래서 흔히들 다시 일어선 다음에, 그럴 듯 하게, 보란 듯이 입성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룻과 같은 형편에 있을 때에는 예수님 식으로 표현하면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 할 일 많아 지금은 아니올시다!"(Luke. 14:20)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장가 가고, 소도 사고" 했는데 소식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인생의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바로 그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Eccl. 12:1).

룻은 전 삶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결코 절망하지 않았으며, 보다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자세로 자신을 둘러싼 한계상황들을 돌파해 나아갔다.  하나님은 바로 그 룻에게 보아스를 준비시키셨다.  하나님은 룻의 고백(Ruth. 1:16-17)을 보아스의 화답(Ruth. 2:12)으로 하모니를 이루셨다.  보아스는 룻에게 있어 '여호와 이레'였다(Gen. 22:14).  아브라함이 3일 길을 걸어 가서 여호와 이레를 만났던 것처럼, 룻은 시모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고 거기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보아스'를 만난다.  이것은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다.

보아스와 룻은 어느 날 갑자기 <가면무도회>에서 첫 눈에 반한 그런 저급한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  축복은 결코 우연히 주어지지 않는다.  자고 일어났더니 밤 사이에 유명해 지는 것, 그런 것은 없다.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Ps. 126:5-6).  이것은 오늘까지 진리이다.
보아스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룻으로 준비하라.  마찬가지로 룻을 만나고 싶은가?  예, 그렇다면 먼저 보아스가 되라!  룻이 아닌데 보아스를 만날 수 없고, 보아스가 아닌데 룻을 만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우연은 결코 없다.

이제 룻이 만났던 외적인 요인으로 일어났던, 아니 만났던 고통의 창(그늘)이 서서히 아침 안개처럼 걷힌다.  아니다.  보다 깊게 생각해 본다면, 외적인 환경이 --가난, 고향에의 향수, 낮선 땅, 외로움, 혈혈단신, 잃어버린 가정, 등등-- 룻을 결단코 넘어뜨리지 못하자 --이것이 넘어야 할 영적 고비(분수령)다-- 그 안개 뒤로 태양이 힘차게 떠 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본문의 밑그림이다.  


부스러기 묵상

작품 no. 1
우리는 룻에게서 '믿음'이 무엇이며, 그 믿음을 따라 결단하며 헌신할 때 하나님이 시작하사 이루(완성하)시는 작품을 보게 된다.  룻은 비록 오늘은 고달프고, 가난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외롭고, 험했을지라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Heb. 11:1)라는 말씀을 따라 살았다.  

그녀는 오늘 때문에 내일을 버리지 않았다.  어제가 모여 오늘이 되고,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된다.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 없다.  처참하게 짓뭉개졌던 성 금요일의 십자가 죽음의 어두움은 안식 후 첫날의 찬란한 부활의 아침으로 밝아 왔다.  이것이 기독교다.  영광의 부활의 아침은 죽음의 골고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룻은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고통에도 뜻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통이라는 장애물 앞에 넘어진다.  여기까지는 성도나 불신자나 비슷하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일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고통(시련)은 또 하나의 기회다.  이것만 넘어서면 축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룻는 Gal. 6:7-10절 말씀의 구약적 성취이다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