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54과 룻기(2): 엘리멜렉과 룻(2장) 6

好學 2011. 12. 16. 22:22

제54과 룻기(2): 엘리멜렉과 룻(2장) 6

3. 사랑교향곡(룻 2:8-16(b))

축복의 통로

보아스와 룻은 각각 상대방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일구어 낸다.  
보아스는 룻을 받아 들인다.  인간(세속)적인 사랑이었다면 불가능했다.  이방인이요, 가난한 거지요, 어떠하든 이미 결혼에 실패한 과부인 룻을 말이다.  이것은 보아스의 깊이다.  하나님이 그 중심에 서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보아스는 룻을 주목한다(11-12).  
우리는 여기서 먼저 보아스의 높은 신앙을 엿보게 된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전 영역에 대한 올바른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정확한 '판단력'과 '통찰'을 통해 룻과 연합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총까지를 내다 보았다.  따라서 저급한 사랑이 비집고 들어올 일말의 틈도 없었다.  보아스는 철저한 신본주의자(神本主義者)였다.  그렇다.  그는 멋진 사나이다.  인간 룻만이 아닌, 그녀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후자를 더 비중 있게 생각할 줄 아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11a, 1:16-18, 2:2)  

룻은 효성(孝誠)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방인이었으나 -우리도 이방인이었다- 결혼 이후 시모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았고, 홀로 된 시어머니를 괄시하지 않았다.  그렇다.  룻은 이미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셨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16)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Ep. 6:1-3).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11b)  

우리는 룻에게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발견한다(Gen. 12:1- ).  하나님은 룻을 이처럼 변화시키셨고, 그녀를 통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셨다.  룻은 시모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왔다(vs. 19,22) :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7)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앞서 보아스의 보호가 보이지 않게, 또한 조심스럽게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8-9절)  

이는 성(性)적인 순결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그렇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고도 순결한 하나님의 작품이 무르익어 간다.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하여 룻을 축복하셨고, 룻을 통하여 보아스를 사랑하셨다.

 만남은 점진적이다.

하나님은 보아스와 룻을 통하여 구속사의 여백을 채워나가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들은 잘 박힌 보석과 같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Matt. 1:1)에 우뚝 서 있다.
 
아브라함 → 이삭 → IS → 유다+다말 → 베레스 … 살몬+라합 → 보아스+룻 → 오벳 → 이새 → 다윗 → 그리스도(1 Chr. 1:1-2:15)

완성품으로의 만남이 아니었다.  한사람은 보리를 베고, 또 한사람은 이삭을 줍는 그런 상태에서부터 시작된 만남이었다.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주례하신 것도 아니다.  서서히, 그러나 인간의 감정이 앞선 그런 '3류 소설'과 같은 사랑놀이가 아니었다.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핑크빛 환상을 좇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은 평범했고, 또한 정직했다.  이 두 사람은 그 중심에 하나님을 세웠다.  마치 삼각형의 양 꼭지점(보아스 對 룻)처럼 위의 중심점(하나님)을 향해 절묘하게 서 있다.  그들은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  이것이 삼각형의 사랑 원리이다.

사실 보아스에게 있어서 룻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것이었다.  개의 이빨을 빼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개를 시장하시게(?) 만들어 놓고서 뜨거운 감자(무우)를 찬물에 잠깐 담근 후에 그것을 던져 준다.  그러면 마치 이빨이 보석처럼 무우에 순서대로 박혀 있단다.  그랬다.  보아스에게 있어서 룻은 혹시 잘못 건드렸다가는 벌집을 건드리는 격이 되는 그런 폭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사랑을 무기로, 다시 말하면 이 땅의 어설픈 풋사랑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각각 상대방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일구어 낸다.  보아스는 룻을 받아들인다.  이방인이요, 가난한 거지요, 어떠하든 이미 젊은 나이에 가정을 잃어버린 과부인 룻을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보아스의 영적 수준(건강)을 본다.  그는 포장지를 보지 않았다.  내용을 본 것이다.  
-오늘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바꾸어서 생각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포장지를 보고 마치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듯이 만남이라는 승부수를 던지기 때문에, 남-녀의 만남 그 자체가 이미 그 속에 불행의 씨앗을 품고 출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룻기 스케치


마침내 하나님의 작품이 그 형체를 들어내기 시작한다.  
전혀 질적으로 다른 삶의 양식을 따라 살아 왔던 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안에서 조우한다.  한사람은 추수하는 밭의 주인으로, 또 다른 한사람은 단 사이에서 이삭(부스러기)을 줍는 관계에서 말이다.  이 구도(構圖)가 처음에는 불균형이었다.  어울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완전히 한 쪽으로 기우는 -보아스가 손해 보는 만남(교제)이다- 관계였다.  이것은 세상이 언제나 실수하는 부분이다.  


천생연분(天生緣分)

이 두 사람의 중매를 친히 하나님이 하셨다.  그리고 주례(主禮)도 역시!  관객은 IS 백성들이다.  사실 교회에서 곱게 자란 청년들은 교제의 경험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너무 순진하다 보니까 전혀 아닌 사람과 기를 쓰고 교제하겠다는 고집을 부리기가 일수다.  조금만 잘 해 주면 그저 "뿅 간다."  생각해 보라.  한 번 무엇엔가 씌우게 되면 어떻게 되죠?  '막가는 인생'처럼 "내가 좋은데 뭔 말이냐?"는 식으로 차고 나온다.
또한 세속적인 기준에서 소위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나려는 욕심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좀 더 좋은 사람"을 선택하려는 그릇된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다가는 '노'(老)총각-처녀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게 될 뿐이다.  요즘 이것이 각 교회마다 문제꺼리가 되었다.

이제 사랑 좀 합시다.  '말씀과 기도'로 충만해 있으면 사랑이 보인다.  보아스만 만나려 하지 말고 룻처럼 준비하라!  룻만 만나려 하지 말고 보아스처럼 준비하라!  그러나 사랑하는 것만큼 그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많은 경우에 "어떤 배우자를 원하십니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 "다른 것 다 보지 않고 믿음만 있으면 되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  솔직히 자수하여 광명 찾자.  아니죠?  믿음은 기본이고, 다른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추가시키죠?  아닌가요?


부스러기 묵상

사랑의 그릇을 키우라!
쫀쫀하게 굴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의 모습만을 보지 말고, 미래의 모습까지를 바라 보라!  이것은 말이 쉽지 대단히 어렵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