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영성신학

好學 2011. 12. 13. 21:12


 

영성신학


 

( 1 서론 )

교회는 사회적 조직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고 존재

이유를 갖는 공동체이다. 구성원인 인간도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나

물론적 존재가 아닌 하나님과 교재할 있고 세상의 조건을 초월할

존재로 보아야 것이다. 신령한 생명체인 인간 생명은 정화, 극기,

순화, 자기 부정, 연단, 절제, 단순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딴을

신비한 빛을 발하고 능력을 얻는 존재이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고 모든것이 물질 중심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회도 어느사이엔가 하나의 사회조직 처럼 되고 말았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의 조직이 되고 것이다.

교회에서도 모든 가치의 평가에 대한 척도가 물질이 되어 버렸다. 물질의

풍요가 축복의 표식이 되어 버렸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기대하기

커녕 세상의 타락을 방관하거나 더욱 조장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까

한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등한시 해왔던 영성의 새로운 조명을 필요로 하게

.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왔던 영성의 물줄기를 현대에 와서 다시한번

아야 필요가 절실해 것이다. 특히 중세기 타락했던 교회에 새로운

힘을 주었던 것은 수도원의 영성이었다.

수도원 운동의 자기 정화와 철저한 자기 부정은 부패한 그들 시대에

로은 생명력을 부어 넣었고 종교로 하여금 형태만 남은 껍데기로서가

니라 살아 숨쉬는 영이 되도록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당시

정치적 상황의 불안, 급변하는 사회 경제적 상황, 사회 전반의 도덕적

타락과 가치의 아노미 현상, 특히 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영적 능력의 상실

대한 강력한 저항과 정화운동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신학과 예배의식 중에 은총의 충만이나 정열이 없었고 체험

고백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 부정신학적 동기가 핵심을 이루는

신비적 직관 체험, 침묵, 묵상, 관상을 통한 신과의 합일경험을 추구하려는

신비주의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체현, 신비적 합일을 통한 신과의 일치, 마침내 인간 영혼의 신적 상승과

영화를 궁극 목표로 하는 종교운동이 일어나게 것이다.

현대의 교회는 신학적으로 볼때도 신학과 영성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고에 젖어 있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철학이나 신학적 사고에서 기인하는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의 갈등,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 신과 인간의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1970년대) 이러한 사고방식은

서서히 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타종교와의 대화라는

원인 이외에도 문화적이며 상황적인 요인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김외식 교수는 최근에 한국에서 급격히 관심하기 시작하는

'영성' 대해서 논하였는데, 그는 먼저 영성신학에 대한 관심이 증가된

인을 서양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아노미 현상을 극복해 보고

하는 노력의 결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영성이 한국에 들어와서도 경재

발전의 과정 속에서 똑같이 요청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부흥회에서 성서연

운동을 거쳐 한국 개신교의 성장과정 속에 당연히 나타나는 마지막

귀결이라는 것을 들고 있다.

이제 교회는 지금까지 외곡되게 취급해 왔던 영성의 문제를 다시한번

찰해 보아야 것이다. 시대에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노력

절실하기 때문이다.

글에서는 먼저 지금까지 있어왔던 영성신학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들

가지고 있는 신학적 개념을 복음의 권고를 중심으로 살펴보며, 영성

신학의 현상학적 구분의 시도를 통해 현대에 요구되는 목회구조를 탐구해보

까지 이르고자 한다.

( 2 본론 )

A. 신학적 검토 ; 영성신학의 역사

기독교의 수도원 운동은 묵시적 종말집단의 영향 하에서 안토니의

집트 수도원 창설에서부터 시작하여 6세기 베네딕트 수도원, 12세기에

스터시안들이 수도원의 부흥을 이루고 13세기 탁발승단 프란시스 교단의

출현, 도미닉 교단의 결성으로 찬란한 절정을 이루었다. 시대는

회적으로 혼란되고 사람들이 구심점을 잃었을 교회의 갱신과 사회의

, 구호 구제사업, 학문적 업적의 성취, 농업기술의 개발, 수많은 종교적

사상가 배출,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존재가 주위 환경이나 세계와 욕망에

매이지 않고 얼마나 위대하게 자기를 초극할 있는가를 보여준 위대한

정신력과 인간 영성의 승리의 시기였다.


 

1. 동방 수도원의 발흥과 특징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시조로는 이집트의 Anthony 있다. 그는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성서 19:21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의 삶을

청산하고 산중에서 기도하고 고행하며 명상과 노동의 생활을 하였다.

이들 수도원 운동의 초기 특징을 들자면, 철저한 은둔주의 , 광야생활,

독거생활 형태등이다. 그들에게는 육체적 고행이 성화의 수단이나 방편이

었다. 이들은 후대에 노동 신성의 귀중한 유산을 남겼다.

한편 초기 수도사들의 완전한 독거생활은 대부분의 신자들에게는 맞지

았으므로 공동생활적인 수도원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바로 파코미우스

수도원 형태이다.

그후 바질은 공주수도원 제도를 발달시켰는데, 지도자의 권위에 복종

하고 가족 공동체로서 몸을 이루는 생명의 공동체를 주장했다. 여기

에서는 노동, 묵상, 과묵 또는 침묵, 학문적 독서와 연구, 기도, 관상,

빈한 생활이 강조되었다.


 

2. 베네딕트 수도원 규칙과 생활

8세기에서 11세기 까지는 베네딕트적 세기라고 불리울 만큼 수도원

동이 시대를 주도해 나갔다. 그중에는 켈틱 수도원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는데, 개인적 금욕, 은둔 생활, 수도 생활의 방편으로서의 공주 생활

등이 주장되었다. 또한 명상과 기도, 과묵과 침묵, 거칠은 육체 노동과

소한 식사, 철저한 복종과 엄격한 참회의 고행은 필수적이었다.

베네딕트 (480-583) 짐승 가죽의 옷을 입고 절대 고독의 독거와

, 아사 지경에 이르는 금식과 절식, 금욕 생활, 종교적 자만과 도덕적

만감과의 싸움의 생활을 했다. 그는 학교와 공동생활의 기초를 놓았다.

수도사의 일은 기도, 겸손, 고행, 봉사 등을 통한 신을 찾고 신을 모시고

신에게 봉사하는 인간의 완덕을 향한 고행의 길이었다. 그들은 세가지

항을 준수했는데, ) 수도원장에게 절대 순명과 조직 구성원의 참여 )

서약과 세가지 서원 : 순결, 청빈, 순명 ) 수도사의 몸을 통한 봉사와

몸의 훈련등이었다.

특별히 수도사들은 노동의 가치를 주장했는데, 그들의 노동 속에는 깊은

사색과 명상, 위의 빵과 하늘의 신령한 말씀이 노동과정 속에서 하나로

통일 되었다. 노동은 기도와 명상과 함께 예배에 속한 것처럼 성화 시켰

.


 

3. 13세기 탁발승단과 프란시스의 영성신학

11-12세기 수도원 개혁운동의 중심이 클루니 수도원이었다면, 13세기

탁발승단의 운동은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깔멜회, 어거스틴회등의

태로 전성을 이루었다.

이들 운동이 12세기 수도원과 다른점을 들자면, 1) 수도회 정신을 사회

까지 확산 구현한 . 2) 12세기까지의 모든 수도원 재산을 포기 3) 12

세기가 교구 중심의 농민계층을 상대로 운동이었다면, 13세기는 도시

빈민 계층과 도시 상업계층을 중점으로 4) 평신도 운동 - 이노센트

3세에게 평신도가 설교할 있는 권한을 받은 등을 지적할 있겠다.

특히 프란시스칸의 영성신학 전통은 네오플라토니즘과 어거스틴 정신을

맥맥히 이어오는 빛의 신비주의, 존재 신비주의, 그리스도 신비주의로

설명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안에서 만물은 형제요

자매가 된다. 특히 작은 안에서 주님을 보고 그들을 섬길것을 강조했

.

이들 수도원의 영성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 첫째는 명상

(contemplatio)이다. 이는 청빈과 순결과 금욕을 통한 정화의 단계와 하나

님을 깊이 인격적으로 알기 위한 계몽과 조명의 단계, 그리고 중세 신비주

요소로서 결합(연합) 단계를 거치게 된다. 둘째는 봉사와 빈곤의

인데 영성생활은 일상생활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4. 개신교의 말씀의 신학과 영성신학

종교개혁의 전환이 의미하는 것은 말씀이 모든 신학적 사고와 신앙생

활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 중심의 태도는 성서 해석과

중심의 예배 종교가 되는 발판을 만들었다. 성서 속의 무진장한 영적

보화와 진리의 샘터 속에 개신교 영성 신학의 뿌리가 내린 것은 진실로

대한 전환이다.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리적이다. 영은 말씀을 통하여 말씀

안에서 역사한다. 그들은 말씀의 내적 증거를 통한 확신과 거기서 나오는

참된 힘을 주장했다.

 

5. 현대의 영성신학

현대에 들어오면서 말씀의 영성과 신비주의의 영성이 만나야 한다는 주장

높아져 가고 있다. 이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라고 보여진다. 또한

3 세계로부터 고난의 현장 속에서 창출되는 영성의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다.

앞으로의 영성신학은 전통적(카톨릭) 영성과 말씀 중심(개신교) 영성

우리의 문화와 인간성의 깊이에 접목되고, 보다 밑바닥의 인간 전체의

영적 고뇌와 삶의 갈등을 해결하는 차원이 요구된다 하겠다. 또한 신학적

으로는 존재 신비주의와 유일신론적 인격주의 신학 전통의 화해와 통전이

이루어져야 것이며, 신앙과 지식, 계시와 이성, 성령의 내적 감화와

간의 진지한 성서 연구가 합쳐진 영성신학이 되어야 것이다.

B. 복음의 권고에 대한 현대적 의의

기독교 영성훈련의 개념 중에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것들은 순명,

, 순결의 세가지로 요약될 있을 것이다. 현대에 영성신학을 재정립하

려는 시도는 위의 세가지 개념의 현대적 의의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 여기서는 시도를 U.T. 홈즈의 "목회와 영성" 부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순명

훈련과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다. 순종은

영성신학의 흐름에서 복음적인 지도 지침 하나, 3 복음서

하나이다. 훈련은 "가르침" 뜻하는 라틴어 disciplina에서 유래

했는데, 이는 신약성서에서 자주 나오는 "제자" 뜻을 가진 희랍어 마데테

스의 라틴어 번역인 discipulus 이어져 있다. 제자란 자기 스승의 훈련

따르는 사람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무엇인가를

여주는 말이다.

제자의 혹은 순종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 진부한 것이 아니라, 외적인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이상의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내면적으로 전환한다. 전환은 우리의 기억, 이해, 의지를 향한 것이다.

기억이라 함은 우리 안에 있는 의미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상을 본다는 뜻에서 이미지를 의미한다. 이해는 교회와의 대화에서 우리의

경험을 조명함으로 목적과 방향을 가지게 되는 능력이다. 의지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반성적으로 행동할 있는 용기이다.

현대에 와서 순명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말씀은 있으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적은 시대에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이루려면 말씀에 전적으로 자신을 투신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의 영성생활은 순명으로 훈련되고 표현될 더욱 성숙한

상태에 이르게 것이다. 이는 말씀에 대한 연구와 상황에 대한 동시적인

연구를 요청하리라고 보여진다.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상황이 묻고있

구원에 대한 요청을 올바로 이해할 보다 적절하고 확실한 순명이

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묻고, 깨닫고, 실천하고, 다시 재평가된 물음을

지는 과정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2. 청빈

성서에서 보면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셨고, 초대교회

자신을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 했던 것을 있다. 이러한 가난한

자들과의 동일화는 기독교 영적 성장에 있어서 항상 도구적인 가치로 생각

되어 왔다. 가난은 복음적인 권고 가운데 하나이다. 과거 성자들은 가난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한 자들

이었다.

여기에 반해서 개신교 윤리는 재정적인 성공을 하나님의 촉복의 표시로

보고 있는데, 이것이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적 사고에 침투하였다.

이러한 결과 지금 이순간의 실제적인 가난한자에 대해서는 둔감해지는 결과

가져왔다. 풍요로운 목사는 가난한 교인들의 하나님꼐 대한 정성의

징과 저들 자신의 투사가 되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 남미 해방신학이 다른 교단에 확산 되면서 가난한자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되었다. 기독교적인 덕은 가난의 의미에 대해 보편

적인 의식을 요구한다. 마더 테레사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적인 증거

우리의 양심에 이르는 길이 되며, 도시 빈민들과 압제받는 자들의 곤경

항상 최선을 다해 감싸왔던 공동체의 상징이 된다.

현대에 있어서 교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것이

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참된 용기와 말씀에

대한 순명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데서 나온다.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

그만큼 말씀을 듣는데 둔감하다. 현대와 같이 물질주의가 판을 치는

세계 속에 교회가 주장하고 나서야 것이 공동의 삶이며, 그것을 위해

서는 청빈이 우선적인 과제라고 하겠다. 내가 나의 것을 절제함으로써

에게 생명을 분여해 있다는 생각은 개독교인으로서 마땅해 가져야

생각일 것이다. 요한 웨슬리도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후에는 그것을

선한 일에 쓰라고 했다. 우리의 것이지만 우리 안에서 소비해 버리지

않는 정신이 중요하다 것이다. 우리의 자비행위는 임기웅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교인 다운 자세로서의 가난, 미음

청결, 그리고 화평케 하는 일에 대한 일관된 이해가 필요하다. 거기에

복음의 증언에 성실하며, 욕심과 탐욕의 악마를 예리하게 무찌를

도록 해주는 분석적인 명확성이 필수적이다.

3. 순결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의 교훈과 실천에서 생긴 상식적인 가설은 영성과

() 대립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신학을 잘못 이해

결과라고 보여진다. 여기에서 3 복음적 권고인 순결이 재평가

어야 시점에 이르게 된다.

성은 사람의 몸만 아니라, 그의 정신, , 그리고 감정을 망라하고

있다. 성이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 속에 있는 욕구이

, 그것은 그러한 관계의 양식을 규정 짓는다. 단성이란 없고, 우리

두는 성적인 인간들이다. 우리의 육체에 뿌리를 성은 관계성에서,

리의 언어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서 "밖으로" 드러나게

것이다. 순결의 의미는 "나의 경험을 면밀히 체질화 하되 이를 감퇴시

키거나 파괴시키는 대신 확장하고 풍성하게 있도록 하는 역량"이다.

성을 우리의 영성과 통합시키기에 어려운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우리 문화와 종교적 상징이 남성들 속에 있는 명백한 여성다움의 의식을

정하지 않으려는 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 안에서 인간적인 성의 궁극

성을 인정하게 된다면, 남자들은 여자들과 함께 성관계의 아름다움의 차원

참여해야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육체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제외해 버린 영성은 전인의 구원에 필수적인 현세성

결핍하고 있다. 그것은 비실제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제 우리는 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아야 것이다. 전인적인 인간

으로서, 서로 보완해 주는 상대로서의 성은 또한 순결이라는 모습을 유지해

한다. 모든것에 때묻은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순결한 모습을 유지한

다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순결은 사람에게 참된 용기와 힘을 준다.

참된 마음과 건강한 육체야말로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요청되는 복음의 요청

것이다.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은 비단 성직자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

.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가난

청빈은 물질만능주의에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있게

삶의 주제라고 하겠다. 순결은 시대 속에서도 재삼 강조되어야

문제이다. 영성신학에서 다루는 위와 같은 개념들은 현대의 기독교인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삶의 스타일일 것이라고 보여진다. 물질적인 축복과

현실전인 안일을 추구하는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철저히 그리스도와 자신

삶을 일치시켜 나가려고 하는 영성신학의 주제들은 많은 시사를 준다.

C. 영성의 현상론

훗설 이후 "인간의 내면적 지향성"(inner intentionality) 영성신학을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든지 내면의 의식이 있고, 의식의

사고작용과 의식의 대상의 관계성의 상관관계가 있는데 이를 영성신학에

용하면 두가지 결과가 나온다.

수직적 스케일 (speculative-affective)

수평적 스케일 (apophtic-kataphetic)

여기에서 speculative 측면은 사색적이고 합리적, 논리적인면을 강조하

것이고, affective 측면은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표현한다.

apophtic 무념적인 측면으로서, 자기를 비우는 것을 강조하고,

kataphetic 상념적인 측면으로서 풍요한 이미지들과 표현들을 강조하는

측면이다. 다음의 도표는 이러한 측면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신앙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

합리주의적 신앙은 성서연구와 풍성한 개념을 갖고 있지만, 실천적 측면

약하고 심하면 신비주의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경건주의는 열정적이

고도 풍부한 표현을 가진 영성의 경향성을 대표한다. 엣센파는 사색적이면

서도 금욕과 절제와 금식을 하는 부류이고, 정적주의는 퀘이커 교도, 모라

비안, 무교회주의자들과 같이 자기를 비우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령의

접성과 즉각적 임재를 강조한다.

이들은 영성의 중요한 측면들 중에 면이 강조된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이들의 요소는 모두 중요하며, 어느 쪽이 간과되어서는 안된

다고 생각한다. 성숙한 영성가들은 모든 면을 고루 갖추고 있는 것을

있다.


 

Speculative

(사색적)

Encratism | Rationalism

(금욕주의) | (합리주의)

|

|

Apophatic ------------+------------- Kataphatic

(무념적) | (상념적)

|

|

Quietism | Pietism

(정적주의) | (경건주의)

Affective

(정의적)

* 수덕신학과 신비주의

수덕이란 말은 의랍어 askesis에서 나왔는데, 육상 경기자의 연습이나

련을 뜻한다. 하나의 초점은 신비신학인데, 이것은 초월적 경험의 능력

소유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 현존의 은사에 관심을 두었다.

이는 영성생활에서 차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홈즈는 이러한 술어들을 좀더 신학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

구적 이미지(instrumental image) 종착적 이미지(terminal image)라는

바꾸어 것을 제안한다. 수덕신학은 기독교 훈련의 실천, 어떤

람이 자기의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목적하고 사용하는 수단과 관계하

있다. 종착적 이미지는 도구적 이미지를 통해 도달할 궁극적 목표를

심하는 것이다.

D. 현대적 목회구조

현대적 목회구조는 지금까지 고려해 왔던 영성의 전통과 복음의 세권고,

그리고 현상론적 요소가 균형을 이룬 구조여야 것이다. 형태는

아래와 같다.

현대 교회는 모든 면에서 세분화 되고 분업화 됨으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통전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있다. 예배에서의 순서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설교와 성만찬은 서로 공존하지 못하며, 설교-교육-선교-

속에 있어야 일관된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목회구조 속에서 영성의 전통을 회복시키려면 먼저 교회구조 자체를 새롭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다. 개념의 이면에는

나의 집합적인 혹은 총괄적인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이 있다. 그리

스도의 사이에는 하나님에 의해 임명받은 교회 안의 다양한 직무들 사이

상호 협력이 강조된다.

그러나 지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스도의 몸이다. 신앙과 세례,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증여에 대한 통전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몸이

없다. 안에서 교회는 성령의 친교를 이룰 있다. 이렇게 살아있는

유기체, 영성체로서의 교회를 통해 교회는 어느 기능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차원에서 영성이 강조 되어야 것이다.

교회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몰트만의 교회론을 보기로 한다.

교회를 '카리스마적인 공동체' 본다. 교회는 전체 피조물의 자유와

화해를 위해 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고난, 하나님의 열망, 하나

님의 행동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삼위일체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디아코니아와 케리그마와 코이노니아이다. 몰트만의 공헌은 기능들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맥락 안에서 다루었다는 것이다. 설교, 교육,

목회, 혹은 세상에 대한 봉사가 어떤 때라도 교회의 사역의 유일한 형식으

여겨질 없다는 것이다.

1. 설교

설교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며,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헌신하며, 그의 제자가 것을 고무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며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삶으로의 헌신을

요구한다.

오늘날 교회의 선포에서는 이러한 제자됨의 문제 보다 물질에 대한 축복

성공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있다. 이제 교회는 지금까지 추구

왔던 것에서 벗어나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명과

이웃과 함께 나누는 청빈, 하나님의 아래서의 순결과 십자가의 삶이

포되어야 것이다.

2. 교육

기독교 양육의 실천을 목표로 삼고 있는 인간형성 변화는 사람들을

리스도에게 접붙이는 일과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접붙임으로 표현되는

일시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겨난 하나님과의 화해와 세상에

화해의 사신이 "소명" 받아들임으로써 성장하게 된다. 기독교

인으로서 양육된다는 것은 깊은 영성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체험을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이러한 체험은 이웃과 나누는 공동체의 체험에

이어져야 하며, 거기에 기꺼이 자신을 있는 까지 이끌어져

한다.

3. 개인 사목 (Pastoral Care)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의 영성생활이다. 목회자는 사람들에

그들이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대답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목회

자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신념과 긍지를 지니는 것과 동시에, 그는 자기

정을 통해 자기를 비워야 한다. 자기 부정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타인

에게 관심을 가질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정체는 자기

긍정과 자기 부정, 자아 실현과 자기 비움에서 생기는 긴장관계에서 얻어진

.

이러한 목회자는 야훼와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처럼 보상을 요구하지

사람들을 돌볼 것이다. 자기를 비우는 가운데 남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있는 마음이야 말로 진정 목회적 돌봄에서 필요한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4. 사회 참여

영성을 평가할 가지는 물음은 그것이 종교적, 윤리적 가치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는 하나의 윤리적 평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영성생활을

흔히 "Christian Life Style"이라고 말할때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수훈에서 찾을 있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것이다.

샤머니즘이 기복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영성을 지녔고, 유교의 영성이

가족적인 영성에 머물렀다면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의 의와 이웃을 위해서

라면 스스로 자신을 희생할 있는 영성이라고 있다. 오늘날 자신

만을 생각하는 교회에 이러한 기독교 영성의 부활이 시급하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삶의 현장과 동떨어져서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이웃의 아픔과 함께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있는 것이다.

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가졌으면 나가서 행동하게 되고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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