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신학
1.이해를 위한 접근 ; 포스트모던신학이란 무엇인가?
포스트모던 신학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그 이전 시대의 신학에 대한 간략한 언급은 우리에게 약간의 도움을 제공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현대 이전의 세계의 신학은 그리스의 사변적 우주론과 유대의 신학적 우주론의 결합으로 형성되었다. 기독교 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낼 무렵의 그리스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그에 따른 문화적 통합 체제가 붕괴되자, 11,12세기의 서방 기독교에서는 고전 그리스 사상의 회복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확고한 결합이었다. 이러한 종합에 있어서 대표적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이런 확고한 결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우주론에 대한 도전은 신학적 정통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의 결과를 낳았다.
시간이 흘러 코페르니쿠스,갈릴레오,케플러,뉴튼에 의해 이전의 우주관은 무너지고 새로운 지동설의 우주관이 나오게 되면서 2000년을 이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무너지고 동시에 신학도 변모하게 되었다. 이들과 더불어 30년전쟁과 데카르트, 칸트의 등장으로 이성을 가장 우위에 두고 모든 것을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는 현대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 때에 현대신학 즉 우리가 지금까지 한 학기동안 배운 현대신학의 모습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시대는 또다시 변천하여 이제는 앞서 제시했던 여러 상황들에 의해서 포스트모던의 시대로 들어섰으며 포스트모던 신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신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신학을 정의해야 하는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지구 상에는 아직 '이것이 포스트모던 신학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학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신학 사조는 아직 미완성의 작품인 것이다. 따라서 이 포스트모던 신학이라는 큰 나무는 많은 가지를 달고 있지만 어느 한 가지도 나무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공통점이라는 것은 단지 현대의 극복이라는 점, 즉 현대신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극복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공통점안에서도 극복의 방법이 서로 다름을 주지해야 한다.
이런 폭넓게 펼쳐진 포스트모던 신학을 가장 적절히 유형화한 사람은 그리핀(David Griffin)이다. 그는 4가지로 나누어서 보았는데 첫째는, 해체주의적 모델로서 주로 프랑스 해체주의자 푸코와 데리다의 영향을 받은 M.C.Taylor가 이에 속하고, 둘쩨는 복고주의적 모델로서 루터교 신학자 G.A.Lindbeck이 이에 속하며, 셋째는 건설주의적 모델로서 John.B.Cobb이 이에 속하며, 넷째는 해방주의적 모델로서 다양한 형태의 지배에 대항하는 신학을 포괄한다.
이제 본 글은 이런 유형을 따라서 M.C.Taylor, G.A.Lindbeck, John.B.Cobb과 한국에 포스트모던신학을 소개하고 스스로 포스트모던 신학자라고 하는 홍정수와 상생신학을 살펴본 후 이런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복음주의적인 바른 신학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2.Mark C. Taylor와 해체신학
(1)해체신학과 해체철학
해체신학은 푸고와 데리다의 해체철학에 근거하여 전통과 경전의 의미의 해체를 부르짖는 신학으로서 이 해체 신학이 근거하고 있는 해체철학은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사와 지성사 및 정신사의 모든 이론과 사상 그리고 진리에 관한 학설을 해체하고 있다". 특히 많은 영향을 준 데리다의 철학은 텍스트의 철학이라고 하나 역설적으로 전통적 텍스트를 부정하고 단지 텍스트를 '직물'내지는 '짜집기'로 이해하는 바 텍스트 不定의 철학이다. 데리다의 철학은 전통적 텍스트부정과 더불어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해체하고 있다. 해체신학은 이러한 의미해체의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2)M.C.Taylor의 [Erring : A Postmodern A/theology]
Taylor는 이 책에서 데리다의 해체철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존재, 자아의 실존, 신의 창조세계의 확실성, 진리의 객관성, 선과 악의 구별, 역사의 의미 등의 전통적 개념들을 해체시키고 해체적 非/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는 전통적 말 중심주의와 소리중심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로고스중심사상을 부정하며, 그럼으로써 양자택일의 논리가 아닌 양자긍정과 양자수정을 동시에 사용하는 플라톤의 파르마콘(pharmakon) 논리를 수용한다.
그의 책 제1부에서는 전통적 신학을 해체하고 제2부에서는 해체적 非/신학을 전개한다.
제1부에서 그는 서구 신학적 테두리에 본질적인 네가지 개념에 대한 해체의 함축을 천명하는데, 그것은 신(하나님), 자아(인간), 역사, 책(성서)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상호관련된 이 네 가지 개념들의 "교권적 체계에 파고들어서 이를 전복" 시킴으로써,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은 "지배하는 입장에 서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되풀이되는 노력들임을 폭로"한다.
그는 자신의 해체주의적 신학을 "신 죽음의 해석학"이라 명명하면서, 서구 그리스도교인의 지배의 확실성을 정당화해왔던 신의 죽음은 잠정적으로 인간이 신의 속성을 간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결과적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인간도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주권적인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Taylor, 33).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소멸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신의 섭리로서의 역사의 종국을 가져오게 하며, 역사의 종국은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진리를 제공한다고 믿어져온 성서를 특수한 전통과 순환적 관련속에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이해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Taylor의 참된 의도는 그리스도교 자체의 포기가 아니었다. 그는 이 네가지들의 해체의 마지막인 책을 이제는 여백과 간격을 중요시하는 텍스트로 보아서, 책의 종결을 선언하고 무한한 산종을 가능케 하는 텍스트로의 개방을 선언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책의 닫음'은 '생산적인 開始'인 것이다. 이제 그는 제2부에서 다시 시작한다. 해체했던 네 가지의 개념을 재공식화하게 되는데, 신을 글(Writing)로, 자아를 흔적(trace)으로, 역사를 끝없는 방황(erring)으로, 책을 텍스트(text)로 해석한다. 즉 그는 신의 글(성스러운 영감의 글이 아닌 발생적/파괴적 의미,애매한 의미-무한한 단어놀이의 환원), 표시들(익명성-자아의 존제 거부), 광란의 축제(절대적 시작과 종말이 없는 윤회-극단적 허무주의), 그릇된 저작(진리(전통)부정-인간사유의 자유)에 관한 非/신학적 구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전통적 신앙을 해체해 버리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흐름 속에 있고 그 가치는 비결정적이라는 것", 그래서 그것은 "철저히 전이적이고 상대적"임을 밝히려고 하였다.
(3)해체신학의 평가
해체신학은 자기 스스로를 非/신학이라고 선언했듯이 신학의 자기해체작업이다. 왜냐하면 그 정신사적 창시자인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의 전제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해체주의는 인간성의 부정이고 진리와 가치의 부정이다. 또한 해체신학은 신의 弑害요,신학의 자기해체이다. 그러므로 해체신학은 죄와 사망과 절망과 좌절의 골짜기 속에 있는 어두움의 非/신학이다. 이는 또한 Taylor 자신이 말한 "E/erring is endless"(M.C.Taylor, p. 184.)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헤어나올 수 없는 迷路속에서 끊임없이 방랑하는 미로의 신학으로서 오류의 신학으로 전락한다.
3.George A. Lindbeck과 후기 자유주의 신학(Postliberal Theology)
(1)후기 자유주의 신학과 G.A.Lindbeck
후기 자유주의라는 이름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이분법적 구조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자유주의 이후 신학, 탈자유주의 신학 등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이 신학은 자유 혹은 보수로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두 뿔을 모두 잡아서 새로운 종합을 제시하려는 신학이다.따라서 이들의 신학은 자유적, 혹은 보수적이라고 잘라 말할 수 없으며 가장 "보수적", 혹은 가장 "자유적"인 것 같은 애매모호한 양면적 요소가 한 덩어리로 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후기 자유주의 신학은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의 산물로 볼 수 있으며, 이 Postliberal Theology라는 단어를 예일의 역사신학 교수 Lindbeck이 1984년 그의 책 [교리의 본질(The Nature of Doctrine)]을 통해서 처음 소개하면서 이 신학을 출생시켰다. 여기서 Lindbeck은 자신의 신학 이름이 "postmodern", "postrevisionist", "post-neo-orthodox" 등으로 불리워져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postliberal" 이 제일 어울린다고 말한다.
(2)G.A.Lindbeck의 [The Nature of Doctrine]
후기 자유주의 신학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 책은 가장 기초적인 교과서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조직 신학적인 내용을 말하기 보다는 신학적 서론정도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여기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전통에로의 복귀'이다. 그러기에 Lindbeck은 복고주의적 모델로서 대표된다. M.K.Taylor같은 신학자는 이 전통으로의 복귀, 혹은 전통에 대한 강조를 포스트모던 신학의 가장 으뜸가는 신학적 특징 혹은 경향성이라고 한다.
Lindbeck은 이 책에서 기독교 여러 전통들간의 대화 가능성을 추구하며,에큐메니칼적 관심을 가지고 이런 여러 전통들이 가진 공통분모를 찾고자 노력한다. 그 방법론으로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Lindbeck은 1) 최근 각광받는 문화-언어적 종교이론(cultural-linguistic theory of religion)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2)그것에 비추어 교리의 본질을 조명하였을 때 결과되는 교리의 규칙이론(rule theory of the doctrine)이 신학적,에큐메니칼적 효용성을 가질수 있는지의 여부를 검토한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생길 수 있는 자유주의자들이 보았던 종교와 교리의 관계와의 유사성에 대해서 Lindbeck은 그의 종교에 대한 이해는 단지 방법론적 차원임을 강조한다. 즉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종교이론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는 신학은 오히려 자신의 방법론적인 위상을 철저히 객관화함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①종교-교리이론과 문화-언어적 종교이론(cultural-linguistic theory of religion)
Lindbeck은 교리의 발전 유형을 명제론적 형태(자유주의 신학 이전), 경험-표현론적 형태(자유주의), 문화-언어론적 형태(자유주의 신학 이후)로 구분한다.
첫째로, 명제론적 교리관은 명제로 나타난 교리적 진리가 가장 참되고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종교의 인식론적 요소를 강조하고 교회 교리가 객관적인 실재들에 대한 정보를 주는 명제들이거나 진리 주장들로 역할하는 방식을 주장하는 방식"이다. 즉 교리는 한 번 진리이면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이들의 약점은 교리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둘째로, 경험-표현론적 교리관은 교리의 근거를 명제에 두지 않고 인간의 경험에서 찾는 입장으로서 교리가 얼마나 우리의 종교적 경험을 잘 반영하는가에 중점을 둔다. 이는 철저한 현대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즉 그들의 교리란 "내면적 감정, 태도, 혹은 실존적 삶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비정보적이고 비서술적인 상징"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입장은 상대주의와 획일주의의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는 약점이 있다.
여기서 Lindbeck은 양극화를 극복하면서 문화-언어론적 형태를 제시한다. 이것은 종교를 문화와 언어와 같은 칸트적 선험성(a Kantian a priori)의 역할로 보는 것이다. 즉 문화와 언어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이- 먼저 존재한- 주어진 것이듯이, 종교도 우리보다 앞서 있으면서 삶과 의미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를 인간의 경험 및 자아와 세계의 이해를 구성하는 총체적인 해석기구로 간주한다. 특히 종교가 지닌 -개인들의 주관성을 형성하는-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그는 새로운 교리관을 제시한다.
②교리의 규칙이론(rule theory of the doctrine)
Lindbeck의 이 이론은 언어의 문법이론과 상응한다. 즉 1차적 언어인 '단어'와 2차적 언어인 '문법'이 있듯이 종교활동도 기도, 경건생활, 교회활동, 찬양, 전도등과 같은 1차적 종교활동과 '교리'라는 2차적 종교활동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교리의 가변성과 구속력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
이처럼 문화-언어적 종교이론으로 교리를 볼 때 교리는 "개 그룹의 정체성이나 복지에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신념이나 행동에 관계된 공동체적으로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재정립되는 것이며 규칙이론으로서의 교리의 본질은 종교활동의 1차적 기능을 관장하는 2차적 기능인 것이다. 또한 이런 분석에 의해 Lindbeck은 교리와 공식, 내용과 형태를 구분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즉 교리를 지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리를 구성하는 내면적 규범 원칙들에 대한 전적인 충실도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펴면서 이제 Lindbeck이 주장하는 것은 체제내적인 진리관(intrasystematic truth)이다. 즉 모든 진리는 -문화, 언어가 그런 것처럼- 나름대로의 문맥에서만 진리가 되며,나름대로의 한계를 지닌다. Lindbeck에게는 존재론적 진리가 아닌 행위적 진리가 더욱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내적 진리관을 신학에 적용시켜서 본문내재성(intratextuality)을 주장한다. 즉 경전(본문)을 삶의 최종권위로 보고(Lindbeck, p.117), 독자보다 우위에 두고 성경의 일차적 의미를 복원할 것을 주장한다(Lindbeck, p.118). 그래서 성경을 다시 한 번 성경으로서 발견하여 신학의 본문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은 더 이상 외부인에 대한 변명이 아닌 내부로, 자기 자신의 공동체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Lindbeck에게는 진리가 체제내적인 것처럼 신학도 철저히 성경내적이고 교회내적이어야 한다.그것은 신학이라는 학문이 본연적으로 변증적이 아닌 교리적이라는 성격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즉 1차적 종교활동에 귀기울이면서 신학자는 신앙의 규칙들을 신앙의 공동체를 위해서 기술하는 것이 근본 임무임을 제시한다.
(3)Lindbeck 이론과 비판적 실천
Lindbeck은 성서를 하나의 문화-언어적 체계로 보았으며, 사라져가는 성서언어의 회복과 통전성을 강조하고 이를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의 교회의 사명으로 보았다. 이런 그의 강조점 때문에 좀더 자유로운 신학자들에게서 게토주의, 혹은 신앙제일주의, 종교의 국지주의 등의 비난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Lindbeck은 성서 언어의 소생에서 얻어지는 문화적 결실들을 제시하면서 시온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해서도 절박한 것이지만 자신도 "하나님을 더 잘 찬양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관심에서도 그 언어를 다시 배우려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말하며 답한다.
이러한 Lindbeck의 이론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고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물론 Lindbeck이 제시한 후기 자유주의가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종합이 될지 아니면 또 하나의 일시적인 새로운 잡종이 될 지는 알 수 없다. 이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신학이 상당히 흥미로운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고 우리 신학도들이 관심을 기을일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4.John B. Cobb과 과정신학
건설적 포스트모던 신학 모델로 분류되는 J.B.Cobb의 이론은 화이트헤드적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도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서 과정신학은 시작되었기 때문이며, 과정신학자 Cobb역시 화이트헤드의 이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Cobb의 이론을 살피기 전에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을 살피는 것은 도움을 줄 것이다.
(1)화이트헤드와 유기체 철학
유기체 철학의 특징은 첫째로, 수정된 주관주의의 입장이다. Kant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이 지식을 거부하고 인식하는 주체로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받아들였고 더 나아가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인 사물자체와 자신의 신체를 통하여 친밀하게 경험하고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이 원초적 경험은 인간의 지식과 행동의 모든 영역에 걸쳐 근원적인 의미 즉 삶의 가치를 충전해주는 기초가 된다.
둘째로, 화이트헤드는 뉴톤적인 기계론적 세계관 대신에 생성(becoming)과 존재(being), 그리고 상호관련성을 강조하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강조한다. 사물은 연속성을 지니며 이것이 그 사물의 존재(being)가 된다. 생성과 존재의 요소는 한 개체의 전과정으로서 생성은 한 개체의 자아형성과정이고, 존재는 한 개체로부터 다시 생성되는 새로운 개체로 전이되는 연속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으로서 창조적인 운동, 즉 창조력의 무한한 동인으로서의 신을 제시한다. 그래서 신과 세계는 상호 관련성을 맺는다. 신은 세계의 개체들이 생성이 끝나 소멸할 때 그 세게를 흡수 또는 파지(prehend)하여 신의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다시 개체를 세계의 것으로 되돌려 개체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또한 세계의 모든 개체들도 상호관련성을 맺는다. 즉 서로 주고받는 과정을 통하여 세계는 함께 성장해간다.
화이트헤드는 신과 세계의 모든 개체들이 새로 형성되는 개체의 형성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다수가 하나로 형성되는 것이며, 이렇게 생성된 하나는 다시 새로운 개체를 위한 다수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즉, 다자(the many)는 일자(one)가 되고,일자에 이해서 증가한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설명이고 여기서 J.B.Cobb은 화이트헤드적 포스트모더니즘을 펼쳐나간다.
셋째로, 화이트헤드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배격하고, 모든 사물들을 물리적인 극과 심리적인 극의 양극적인 개체로 본다. 또한 신도 양극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신은 영원히 불변하는 완전성을 향유하는 신이 아니라, 세상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세상의 고난과 과정에 동참하면서 늘 새로운 실현을 향유해가는 신이다.
(2)John B. Cobb과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종교다원"이라는 현실의 변화속에서 Cobb는 화이트헤드의 영향을 받아 사물(things)보다는 사건(events)속에서, '본질'보다는 '활동'가운데서, 완성된 창조보다는 과정중의 창조에서 신학을 펼친다. 과정 속의 창조이기에 교회 역시 살아있는 전승으로서 역동적인 과정속에 있는 것이다.
①그리스도교적 실존과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Cobb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특성과 고유함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며 이에 근거한 실존, 즉 "그리스도교적 실존"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이러한 실존이 사랑속에서 새로운 자유를 실천하는 영적 실존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실존은 전인격적 변화를 가져오며 사랑으로 향하는 자기초월의 실존이며,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타인에 대한 참된 관심 속에서 자기 중심성을 유일하게 초월하는 사랑이다.
Cobb은 이러한 자기 초월의 실존인 그리스도교 실존이 다른 실존 구조를 완성하고 변혁시킨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궁극성을 띠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실존 구조에도 현존하는 보편성을 지닌다. 이런 궁극성과 보편성의 그리스도는 세 차원이 있는데 창조적 변혁의 현재 역사인 로고스, 과거 역사인 예수, 미래 역사인 희망이다. 로고스는 변하지 않으며 그 육화가 그리스도이다.
이처럼 Cobb은 궁극적, 보편적, 창조적 변혁으로서 불변하는 그리스도와 특수한 문화성, 역사성을 띤 그리스도교, 불교 등을 구별한다. 여기서 그는 상호변혁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개종이 아닌 더 나은 불교, 더 나은 그리스도교를 목표로 하며, 서로를 내면화하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미래 통일을 지향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실존 구조(그리스도)는 변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교 실존 이외의 다른 실존 구조들은 그리스도교 실존구조의 파편들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Cobb의 신학은 신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신학인 것이다. 그는 신중심적 다원주의 신학이 "공통기반"을 선행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결국 각 전통의 특성을 '제거하거나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이 선행조건으로 인해 대화가 방해를 받는다고 비판하면서 "변혁의 가장 좋은 기회는 차이로부터 온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공통기반은 선행조건이 아닌 결과였다. 그것은 '발견될 공통기반'이며 '생산될 공통기반'인 것이다. 즉 그 자체로서는 서로 적대적이고 배타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취하되, 그것들의 최상의 요소들을 흡수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에서 대조(contrast:서로 다른 요소들의 조화)를 이룩하여 마침내 이전보다 더 큰 풍요와 더 높은 강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②종교간의 대화
결국 Cobb의 이러한 방법론은 종교간의 차이를 먼저 강조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들의 관계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대화의 목적이 전통들 사이의 유사성이나 공통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 전통에서 전혀 없거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을 다른 종교 전통들을 통해 배우는데 있다고 본다. 그는 이것을 감정이입(empathy)의 행위로 보는데, 그래서 이 방법은 과거에 우리가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이를 내면화하여, 그 빛에서 우리의 유산을 재검토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전혀 새로운 가르침, 전혀 새로운 실천들이 출현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J.B.Cobb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는 종교 전통간의 만남의 동기를 자기 전통의 위기 의식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위기 의식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의 실존 구조의 궁극성과 우월성을 지적하지만 다른 종교실존과의 비교, 우월성의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비판을 넘어서서 우리가 Cobb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가 명백한 사단의 도구인 -비록 완화된 것이긴 하지만-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이고 그 사상이 과정신학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적 진리는 되어지는(becoming)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5.홍정수와 상생(相生)신학
1991.10.30. 감리교 제 19차 임시 총회에서 포스트모던 신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홍정수 교수를 자격 박탈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홍정수의 신학적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포스트모던 신학자라고 말하지만 앞서 제시했던 유형들 중 '어디'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Cobb의 유형과 비슷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요즘 들어서 일어나고 있는 상생신학에 동조하고 있고 그 사상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트 모던 신학에서 그리 중요치 않은 홍정수에 대해서는 상생신학을 언급하면서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상생신학은 감신대의 두 젊은 교수 이정배,박종천 교수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고 그 사상은 그들의 스승 윤성범 교수에게까지 소급된다. 이들은 신학의 종합적 탐구를 시도하는데 이것이 곧 상생의 신학 그 자체의 특성이다. 상생(相生)이란 상극(相剋)에 대항하는 개념으로서 여지껏 상극적으로 대립되어 왔던 모든 신학들과 이론들을 화해시키자는 것이다. 따라서 상생신학은 옛날 원효대사의 유명한 通佛敎 理想과 같은 通기독교, 通교회를 지향한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서 상생신학은 아직 생겨나고 있는 신학이라는 인상을 준다. 즉 지금도 상극이 있는 현장을 부지런히 찾아 다니기 분주한 신학이다. 그러고 보면 "상생의 신학"이라는 명사형 이름보다는 차라리 "상생하는 신학" 이라는 동사형이 더욱 어울리는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홍정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을 신학에 적용하여 상생의 신학을 제시한다. 그는 지금의 세계는 독재적 상극(절대주의와 이원론)의 시간을 지나와서 다원주의 시대로 들어왔음을 말하면서 이 다원주의가 허무한 상대주의에 빠져 파멸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간 정신 활동의 다양한 분야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음색을 되찾고, "합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홍정수는 지금까지 한국의 신학이 상극의 논리로 지배되어 왔고, 그 상극의 논리에 의해 우리 사회의 계급 모순을 극명하게 폭로시켜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제는 상생의 논리가 필요함을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상생의 논리는 기독교적이요, 포스트모던적이요, 한국적임을 강조한다. 즉 홍정수는 미국의 포스트모던 신학자들과는 다소 다른 입장이다.
또한 홍정수는 상생의 영성을 주장한다. 그는 참된 영성은 우리 아닌 것을 포용하는 모험을 향해 신들린 말처럼 돌진해 가는 삶, 즉 "상생의 영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어른의 영성"이라고도 표현한다. 즉, 어린이의 영성은 기도와 명상이며, 청년의 영성은 연대/투쟁이며, 어른의 영성은 만남과 대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상호변혁을 연습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홍정수의 사상은 그의 책 [베짜는 하나님 : 이단자를 위한 한국신학]에서 실천된다. 이 책의 제목이 그의 사상을 잘 말해준다. 그는 여성적 뉘앙스의 '베짜는' 하나님을 제시한다. 왜 베짜는 하나님인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베를 짠다는 것은 부지런한 농부들의 아낙들의 일이다. 이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보살피려는 배려(섭리)이다. 또한 이는 단순한 노동이 아닌 평화를 짓는 일이다(사59:6). 그러므로 베짜는 하나님은 가난하고 부지런한 한국의 농부, 특히 여인을 귀히 여기시는 사랑의 신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연인처럼 가엽고 순수하시다."
또한 그의 책 제목에서 말하는 이단자는 기독교에 관심이 있거나 기독교회에 의해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무수한 한국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하면서 또한 교회안에 남아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기에 정통으로 통하면서도 생각이 다르기에 불편한 사람들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 이들이 교회를 개혁하고 내일의 교회의 주역이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홍정수의 사상을 평가함에 있어서 총신대의 현대신학 교수인 문석호 교수의 말을 빌어 대신하고자 한다.
"최근에 들어와서 홍정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의 소위 '상생의 길'(더불어 존재하는 진리의 길이라는 의미)은 이미 반 퍼센과 해밀톤, 반 뷰렌 등이 배경으로 있는 세속화 신학,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 오던 소위 '혼합주의 논쟁'의 대표적 인물인 호킹(W.C.Hocking)에 의해 이미 언급되었고, 또한 W.C.C운동에서 말하는 주장에서도 보아왔던 모습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의 사상이 문제가 되어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그의 사상은 신학의 내재적 보편성이라는 허울 아래 쉘링에게서 영향을 입은 틸리히의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인 모습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이미 문제시 된 변선환의 사상을 일면 되풀이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새삼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의 유일성을 서구의 과학적 합리주의와 동일한 체계로 보면서 이를 제국주의적 자세로서 이를 배격하고자 하는 지극히 잘못된 신학적 이해는 이미 그의 기독교 이해의 기초가 신적 초월성과 내재성을, 그리고 계시의 신적 기원과 문화적 명령을 자신의 아집에 따라 자의로 해석하는 遇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6.결 론
지금까지 포스트모던 신학의 여러 유형과 그 대표자들의 신학적 사상들을 살펴보았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는 얼핏 보아도 신앙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다분히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점이 기독교에 유익을 주는 복합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 즉 과학주의의 독선을 배격하고 합리주의적 판단이나 이성 절대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훨씬 덜한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나아갈 수가 있다. 물론 부정적으로는 회의주의와 상대주의로 인해서 진리가 무너지고 종교다원주의가 나타나는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을 그저 무시해서는 안된다. 스텐리 그렌쯔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 입문서]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들이 하는 비판적 반성은 반드시 복음의 골자들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미있게 들리워 방법을 결정하는데 이르러야만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기독교 신앙을 다음 세대에 가장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알아내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과 씨름해야만 한다." 그렌쯔의 말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할 책임"(고후10:5)이 있다.
그렌쯔교수는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주의를 배격하고 기독교의 실재에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중심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포스트모던 복음주의 신학을 제시한다. 첫째로, 포스트모던 복음주의 신학은 탈개인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신앙공동체안의 개인"을 강조하면서 "헌신"의 자세를 요청한다. 둘째로, 탈이성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반이성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 셋째로, 전체적이어야 한다. 한 인간은 통합된 전체이며 복음은 전체로서의 인간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이는 개인적 인간뿐 아니라 관계 속의 인간에게로의 확대이다. 마지막으로, 영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영성에 초점을 둘 때 실천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성에 초점을 둔 신학은 행동주의와 정숙주의의 적절한 질서를 조정할 것이다. 이렇게 그렌쯔는 새로운 포스트 모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신앙을 구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전해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는 좋든 싫든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한 배에 타서 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양다리를 결치고 있다. 아마도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더욱이 이 사상을 바로 이해하고 극복하는 것은 그렌쯔가 말한 것처럼 우리 자신은 물론 다음 세대의 영적 신앙을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막중하다. 특히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 지성인들은 이 사명에 눈을 떠야 할 것이다. 다원의 모습을 보고, 이것을 넘어서서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Beyond-Postmodernism ; 예수유일주의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카로운 지성과 깊은 영성, 성자의 삶과 사회개혁의 치우치지 않는 예수님의 정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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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타 사전류
[기독교대백과사전]. 서울 : 기독교문사, 1987, s.v. "과정신학"
- 목 차 -
1.이해를 위한 접근 : 포스트모던 신학이란 무엇인가? --------------- 1
2.Mark C. Taylor와 해체신학 --------------------------------------- 2
(1)해체신학과 해체철학
(2)M.C.Taylor의 [Erring : A Postmodern A/theology]
(3)해체신학의 평가
3.George A. Lindbeck과 후기 자유주의 신학(Postliberal Theology) ----- 3
(1)후기 자유주의 신학과 G.A.Lindbeck
(2)G.A.Lindbeck의 [The Nature of Doctrine]
(3)Lindbeck 이론과 비판적 실천
4.John B. Cobb과 과정신학 ---------------------------------------- 6
(1)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2)John B. Cobb과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5.홍정수와 상생(相生)신학 ----------------------------------------- 8
6.결론 ----------------------------------------------------------- 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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