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현대 신학사

好學 2011. 12. 13. 20:43


 

현대신학사


 

19세기 신학

 

19세기는 선교 확장의 위대한 시기요,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복음이 강조되기 시작한 시대이다.

19세기에 영향을 준 18세기의 두 사상 : 경건주의와 합리주의인데, 경건주의는 화석화되고 경직화된 교리에 대한 반항으로 회개와 기도가 중심이 된 헌신적 생활을 강조하고, 열광적이고 인격적인 종교 체험과 엄격한 도덕적 통합성에 큰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관심을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강조하여 사회적 관심이 약화되었다. 합리주의는 희랍사상과 르네상스 사상의 재현으로써, 이신론으로 기울어졌고, 인간의 이성이 진리의 원천이므로 죄와 구원의 교리는 불필요하게 되었다(계몽주의).

 

19세기의 사상가 :

칸트(1724-1804)는 19세기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서, 이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 이성의 유한성을 인정하였고, 도덕법을 강조하여 양심의 직관적 통찰인 지상 명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칸트는 "신앙의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부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말한다(순수이성비판 서문). 칸트는 신앙과 이성이 아니라 신앙과 경험 지식을 서로 대비시키고, 합리적 인간이 경험적 분석에 함축된 적을 인식하게 되는 합리적 신앙의 형식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근대 신학에서 차지하는 칸트의 중심 역할은 그가 종교적 신앙의 합리성을 주장하면서도 신학을 고전적 경험론의 침식으로부터 구했다는 데 있다. 칸트는 "도덕성이 불가피하게 종교로 인도되고, 종교는 인간의 도덕적 신앙에 기초하기 때문에" 도덕적 필연성이 주관적인 것 곧 '요청'이지 객관적인 것 곧 '의무'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우리의 모든 의무를 신적 명령으로 인식하는 것"과 동일하다.

슐라이에르마허(1768-1834)는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하면서, 종교 경험을 강조하고 신학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아버지, 낭만주의의 창시자, 자유주의 신학의 효시라고 불린다. 그는 칸트의 합리주의와 도덕주의에 반대하여 반이성주의와 반도덕주의를 말한다. 그의 종교적 주관주의는 신이 단지 감정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본질 그대로의 신을 알 수가 없고 신은 단지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은 "종교를 멸시하는 교육받은 자들"에게 한 연설이다. 형식상으로는 낭만주의 시대의 정신 속에서 쓰여진 전형적인 작품이지만, 문학적으로 쓰여지고 철학적으로사회 일부 계층을 향한 "고백"이며, 따라서 전문적인 신학 용어가 아닌 낭만주의 문학의 용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지식이나 행위가 아니며, 형이상학이나 도덕도 아니고, 또 양자의 합성물도 아니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슐라이에르마허 자신의 사상적 편력이나 경험에서 나온 개념(개념이라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지만)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모라비안의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의 사상조류를 모두 경험한 후에 '종교론'을 썼다. 따라서 그는 심하게 이성에 치우쳐 있거나 종교를 도덕적으로만 이해하려는 데에 반대하고 "종교는 감정이므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으로부터 구별된다. 그것은 우주에 대한 직관이며 감정, 즉 무한에 대한 지각과 경험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우주는 자연과 인간의 사건의 다양성과 대조虁는 불변성과 전체성을 말하는 것이고, "모든 특수한 것을 전체의 일부분이며, 한정되 모든 것을 무한한 것의 표시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그의 종교론에 있어서 '초자연주의, 자연주의적 범신론, 자아철학'이라는 말로 평가, 혹은 비판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그의 종교론이 나의 종교에 대한 한편의 개념, 혹은 감정에 일치하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한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감정만을 갈취해 왔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한계, 자신의 온 형태의 우연성, 그리고 자신의 온 존재가 무한 속으로 소리없이 소실되어가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적당한 선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원하는 역할을 할 수가 없다"라는 말에서처럼 인간은 유한함이 분명한데, 자기 스스로는 하느님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무한과 전체에 자신의 감정을 일치시키기 위해 내어 맡기는 것이 종교이다.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 '직관'은 유한에 작용하기 위하여 그 속에서 나타나는 무한의 행동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감정'은 인간 정신 자체의 본래적인 행위로서, 한 인간이 우주와의 조우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개인 실존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그라스도교 신앙은 정확한 신학적인 이해나 형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실성과 신앙의 확실성이 계시에 대한 실존적인 경험에 근거하는 거이다. 즉 그 신앙은 정확한 교리와 죽은 문자 속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현존하는 관계에 있다.

종교 강화론을 통하여 슐라이에르마허는 스피노자와 같이 이단이라는 격렬한 비난과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신비주의자, 범신론 옹호, 그리고 예술과 종교,신앙과 심미적인 영상이나 예술적인 직관을 혼동'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신비주의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의 직접성(실존성)이라는 측면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특수한 것들을 받치고 있는 단일체이며, 세계는 이 단일체에 의존된 양심이다"라는 말은 하느님에 대한 이신론적이며 초자연주의적인 계몽주의의 관념을 부정하는 면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는 칸트가 이미 매장시켜 버린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초월적-철학적인 형이상학을 받아들였으며, 넓은 의미의 낭만주의적 입장에서 하느님과 세계, 무한과 유한 사이의 관계를 단일성과 전체성으로 해석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예술은 종교의 표현 양식에 불과히지 종교의 근원은 아니며, 예술과 종교의 관계는 사상과 언어가 가지고 있는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헤겔(1770-1831)은 철학적인 종합을 시도한 합리주의자로서 변증법을 주장하고, 절대정신으로서의 신은 세계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자신을 실현시킨다. 이 과정이 역사이며, 역사는 한 목표를 향해 필연적으로 진행한다.

 

Hegel의 철학체계와 역사관 -- ① 精神辨證法的 歷史觀 : 활동성을 그의 본질로 갖고 있는 정신은 먼저 자기를 대상으로 外化시킨다. 그 과정에서 순수한 자아가 자기 외부에 있는 시간으로 外化된 정신을 역사라 부르며 공간으로 外化된 정신을 자연이라 한다. 자연은 그의 생동적이고 직접적인 형성임에 반하여 역사는 알면서(wissende) 자신을 중재하는 형상이다. 역사는 그 자신에 의하여 정립된 대상에 대하여 자기를 하나의 대상으로 外化시키고 더 높은 것, 미래의 것으로 이 대상자체 속에 존재하면서 이 대상의 특수성과 제한성을 부정하고, 이를 더 높은 단계에로 지양시키며 자신의 완전한 자기 인식에 도달하는 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이다. ② 理性的인 것은 現實的이요, 現實的인 것은 理性的이다 : 모든 정신적인 것은 정신에 의하여 정립된 것으로,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며 보편적인 것, 완전한 것으로 고양되는 한에서만이 이성적이다. 물론 불완전한 것은 그 자신 속에 있는 그의 반대(Gegenteil)로서 실존하지만 그러나 止揚되고 해소될 수 밖에 없는 모순이며 自然性과 感性과 자기 자신의 異質性(Fremdgert)을 깨트리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며 그 논리적인 필연성으로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 하나의 보편적인 목적을 가지게 된다.

精神의 自己現象으로서의 歷史 -- 정신의 卽者(An-sich)가 外化되어 정립되는 가장 보편적인 대상세계는 인간의 의식이다. (정신은 그 자신을 사고함으로써 그 자신을 규정하고 (bestimnen), 그 자신을 자기에 대한 대상으로 정립시킨다. 이 대상이 인간의 의식이다. 여기에서 인간의식의 본질은 사고에 있다. 보편적 정신은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한다. 이 정신 곧 보편적 정신이 그 자신을 外化시켜서 형성되는 결정적인 대상세계는 개인의 정신을 그의 전체성에 속한 유기체적 계기로 포함하는 民族精神이다. 보편적인 정신의 여러 상이한 규정들은 역사에 있어서 특수한 민족정신으로 나타난다. 이 민족정신이 하나의 정치적 행태로 구체화된 것이 국가이다. 국가는 곧 개인의 정신적 삶의 총체, 윤리적인 전체(das sittliche Ganze), 현존하는 신적의지이며 세계의 현실적인 형태와 조직으로 전개되는 정신이다. 모든 영역들은 한 공통된 정신의 顯現體로서 한 공통된 원리를 가지고 있다. 종교, 예술, 철학 등 모든 분야는 그들이 속한 국가와 동일한 원리, 공통된 근거를 가지고서 서로 화해하게 된다. 이들은 국가가 지닌 보편적 이념을 실현시키는 구체적 형태들이며, 국가의 현실이다. 더 나아가 Hegel의 역사철학에서 말하는 절대적 화해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에서 계시된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는 한 구체적 인격,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속에서 서로 화해된 것이다. 이 화해를 세계사적 차원에서 실현시키는 구체적인 수단과 형태가 곧 국가이다. 그러나 국가는 보편적 정신 앞에서 제한된 것에 불과하여 그의 현재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와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새로운 민족정신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향한 발전, 즉 역사의 질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역사의 목표인 절대정신으로의 도달은 정신이 그 자신을 정신으로 완전히 인식하는 세계, 정신의 절대자의 의식에 도달한 세계, 그리하여 모든 것이 절대자의 의식에 따라 갖추어져 있으며 이 의식이 세계사를 지배하며 또 지배하였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써 역사에 있어서 그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다.


 

19세기신학의 인간이해 -- Hegel과 Schleiermacher의 인간이해와 그 문제성

문제성과 범위 : 신학사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슐라이에르마허(1768 - 1834)로부터 시작하여 칼 바르트를 중심한 변증법적 신학 이전까지를 지배해 온 일련의 신학사조, 곧 19세기의 리츨, 하르낙 등의 신학자들이 대변하는 신학사조를 말한다. 이 시대의 사조를 지배한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는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고 있으면서, 학문의 방법적인 면에서, 즉 사고의 틀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신학사조 및 철학사조를 지배해 온 것은 헤겔이었으며, "헤겔주의"가 19세기 사조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따라서 19세기의 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의 인간이해를 파악해야하며 그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이해를 파악하는 것이다.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의 인간이해 :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의 사고의 틀은 "화해의 원리"에 입각하여 있다. 이 원리는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유한과 무한, 신앙과 이성의 이원론, 철학적 개념으로써 종합적으로 표현한다면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적 분리와 대립을 극복하고 양자를 화해시키고자 함에 있다. 칸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인식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단지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이성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며 하나의 신학적 이원론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여, 하나님을 인간과 그의 세계 안에서, 인간과 그의 세계를 하나님 안에서 인식하며, 유한을 무한 안에서, 무한을 유한 속에서 인식함으로써 양자의 이원론적 분리와 대립을 극복하고, "하나님 없는 세게"와 "세게 없는 하나님"의 상태를 상호 화해 시키려 하는 것이 19세기 사조 일반의 공통적인 관심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모든 것 안에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들이 가진 화해의 원리의 목적이었다.

 

헤겔의 인간이해 : 헤겔의 철학체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화해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실현시켜 나가는 변증법적 방법은 하나님과 세계, 하나님과 인간, 보편자와 특수자, 주체와 객체를 화해시키는 원리를 형성한다. 헤겔에게서 인간의 중심은 정신이며, 이 정신은 신적 정신으로서 하나님의 정신의 실현체이다. 즉 하나님의 정신이 그 자신을 사유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규정하며, 자기를 자기 자신에 대한 대상으로 정립시키는데, 이 대상이 인간의 의식 내지 사유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는 하나님의 정신이 그 속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현실, 하나님의 존제양식이다. 사유는 보편자의 활동성이며, 보편자 일반을 의미한다. 정신과 사유는 부정의 방법으로 발전하는데, 대상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의식함으로써 정신과 그의 대상은 괴리되며, 이 괴리를 통하여 정신은 이 대상의 특수성과 제한성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참된 자기 자신, 즉 "자기를 정신으로 아는 정신"에 이르기까지 대상의 특수성과 제한성을 언제나 다시금 부정하고 이 대상을 고양시켜 나간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유는 이미 주어진 것, 유한한 것을 넘어서서 무한한 것에로의 나아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헤겔에게 있어서 인간은 그의 주어진 현실 속에 안일하게 안주하여 있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현실과 미래를 개척하고 창조하여 나가는 인간을 말한다. 즉 인간은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이고, 이 변증법적 운동으로서의 사유가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다.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는 이러한 사유의 변증법적 사유를 통하여 서로 화해되어 있다. 즉 인간의 본질인 사유는 변증법적 운동 내지 활동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의미하며, 하나님은 이 사유 안에 이 사유의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현존한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인간이해 : 하나님과 인간, 무한과 유한의 화해를 헤겔은 사유에서 찾았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경건한 의식,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찾았다. 그는 하나님의 현실을 이 세계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인식하려는 문제의 해결을 인간의 종교적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은 직관과 감정에 있다. "모든 개체적인 것을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모든 제한된 것을 무한한 것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우주적 직관을 통하여 인간은 종교적 감정을 얻게 된다. 이 감정은 "지식도 행동도 아니요, 오히려 감정이나 혹은 직접적 자기의식의 특수성"인 종교적 경건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인간은 그 속에 그가 속한 우주, 곧 신의 존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있다는 절대의존의 감정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직관으로부터 시작되는 절대의존의 감정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기의식이 "가장 높은 본질의 의식"과 결합된 것이 종교적인 감정의 상태인 경건성을 의미하며, 이 경건성의 감정의 상태를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이라고 그는 정의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의 경건한 절대의존의 감정 속에 이미 주어져 있으며, "이 감정 속에 있는 공동결정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 속에 있으며, 인간의 자기의식은 하나님 의식의 현실화이다. 절대의존의 감정은 인간의 자기의식의 보편적 구성요소이므로, 인간은 자기의식 속에 하나님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다. 헤겔에 있어서 사유가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라면,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는 인간의 절대의존의 감정이 하나님의 존재 현실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주의신학의 인간이해에 있는 문제성 :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이해는 데카르트 이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를 중심한 근대 합리주의와 독일 관념주의의 인간이해에서도 나타난다. 칼 바르트가 "동일성의 철학자"라고 말한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의 사고 혹은 감정 안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이해에 내재하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성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성서적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자요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요 인간은 그 거룩한 분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절대적 타자이며, 인간의 힘으로 도달될 수 없는 초월자이다. 성육신의 사건도 하나님의 인간화나 인간의 하나님화를 의미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 곧 아들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으로 머물러 계신다. 그러나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인간과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구분되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전체성에 속한다.

②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하나의 인격적인 대상이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 존재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적 인간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대상성 내지 객체성은 사라지고 인간의 주체성만이 남을 위험성이 있으므로, 인간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 신적 존재 내지 신적 본질을 그 속에 가진 자로서 신의 자리를 대신하고 신격화 될 위험성이 있다.

③ 만일 인간의 정신이 신적인 절대정신의 존재양식이라든지, 혹은 인간의 자기 의식은 더 완전한 하나님의 의식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 없이도 하나님을 어느 정도 직접 알 수 있다. 브루너도 하나님의 형상이 내용적으로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형식적으로는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연인도 형식적으로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하고, 틸리히도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존재 근거 헉은 인간의 존재의 깊이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필요성은 부인될 수 있고, 인간의 자기 자신과의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일 수 있고, 인간의 자기인식은 하나님 인식일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인 본질의 연관성을 말하지 않으며,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이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관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과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의 어떤 존재론적인 상관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성서적인 사고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 계시와 이성, 나아가서 기독교와 일반종교 혹은 문화 사이에 존재론적 연관성 내지 상관관계를 인정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을 상실할 수 있는 모든 시도에 대하여 기독교의 참된 중심점과 규범이 어디에 있는가를 상기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 강한 영향을 주었으며(변증신학의 영적 창시자), 합리주의의 객관성에 반대하여 실존적 주관성을 강조했다(기독교 실존주의의 아버지). 그의 저작은 칸트주의자들의 도덕적 관념론이든 헤겔주의자들의 절대적 관념론이든 막론하고, 모든 형태의 합리적 신학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개인적이며 실존적인 인격적 헌신을 통한 그리스도의 경험을 주장하기 때문에 지식의 객관적인 측면을 무시하였다. 즉 신앙의 실존적 영역과 실존적 선택을 위한 이성의 부재나 불확실성을 강조하였다. 신학에 있어서 그는 신정통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될 수 있다. 그와 신정통주의자들은 기독교룰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부르조아 문화로부터 분리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초월적이고 불가지한 신과 유한하고 죄악된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에 주목했다. 그들은 신의 내재성과 계시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로부터 돌아서서 신앙의 위기와 믿음의 역설성과 부조리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신앙은 "객관적 불확실성"이라는 것,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자연적 "증명"은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역사적 예수 연구를 용어적으로도 모순인 "객관적 계시"에 대한 무익하고 불신앙적인 탐구로 간주했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은혜로운 선물로써 각 신자들에게 임하는 계시를 벗어나서는 기독교에 관한 합리적인 변증은 없었다. 유한하고 죄 속에 있는 인간은 자신의 곤경을 타개할 자격이 조금도 없었다. 구원은 오직 전적 타자인 신으로부터만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 :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리츨 학파의 특징 --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배제, 사변적 유신론을 거부, 교회의 교의를 신학과 형이상학의 불합리한 혼합으로 여겨 정죄함, 종교적 신비주의를 형이상학적인 경건의 형태로 여겨 반대함, 종교의 실천적 관념을 중시함, 종교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을 구분함, 자연 계시의 반대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를 강조함, 고독교 교의학의 합법적 원리로서 천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함, 신학적 탐구를 종교 의식의 내용으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음. -- 형이상학에 관한 회의론, 교회 교리와 자연 신학의 거부, 역사적 예수와 그의 도덕적 가르침에의 집중, 그리고 영적으로 자유한 사람들의 친교로서의 천국의 개념을 강조 --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의 완전한 표상.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말의 문화적 환경을 상당히 반영하였다(문화적 개신교주의). 당시 전통적 형이상학은 비난을 받고 있었으며, 성경과 교회 교리는 엄격한 역사적 재검사를 받고 있었다. 기독교를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환원시키려는 관심이 일어났는데,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예수의 윤리적 메시지의 부활을 의미하였다. 종교적 권위는 성경 정경이나 교회 교리보다는 예수를 통한 개인적 칭의와 화해의경험에 두어졌다. 구원은 도덕적, 사회적, 그리고 진보적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진정한 신학은 문화적 상황과 기독교 메시지 사이의 "상관의 신학"이라고 한 틸리히의 말이 옳다면, 리츨의 자유주의는 그 시대를 위한 아주 완전한 신학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메시지를 형이상학적 불가지론, 역사주의, 그리고 제1차 대전 이전 시대의 도덕적 낙관론에 맞추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문화적 상황을 충족시키려는 관심 속에서, 기독교 메시지를 왜곡시키면서 그들의 "해답들"을 이끌어낸 오류는 존재한다.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 지식에 접근을 시도. 인간 본성에 낙관적 견해(성선설 입장)를 가짐으로써 인간의 죄성이 약화됨. 과학적 방법을 받아들여서 현대 문명에 적응하려 했지만 신앙의 혼란과 신앙의 화석화를 조장함.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결합하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초월성을 소홀히 하게 됨 -> 바르트가 이에 반발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함.

20세기 후반의 신학의 동향

## 20세기 후반에 신학계는 큰 변혁을 경험하였다. 그 것은 새롭게 형성되는 세속문화와 기술과 과학의 급성장에 따르는 신학적 유산의 정리요 새로운 해석·적용·강조점들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신학적 특징은 "이 세상성"에 대한 강조일 수 있다. 신학적 관심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세상에서 이세상으로,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전인류와 역사, 사회로 떬겨진 것이다. 신학적 사고는 실존적 언어가 아니고 역사적, 정치적이고 수직선적이 아니라 지평선적이고 현대적이 아니라 미래적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생명을 단순히 설교와 말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의 날마다의 삶 속에서 그 확증을 보려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단순히 말씀의 전파만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화와 해방을 위해서 행동으로 참여하는 증거의 삶을 포함하려고 한다. 경제적 영역, 정치적 영역, 산업화에 따르는 모든 생태학적 인간 소외와 양심의 영역 등 모든 삶의 영역을 그리스도교의 선교의 장으로 삼으려 한다. 1960년대 이후의 신학은 이러한 공통성 위에서 해석학적 신학, 세속화 신학, 신 죽음의 신학, 희망의 신학, 역사의 신학, 정치 신학, 해방의 신학 등으로 움직여 나간다.

 

# 해석학적 신학 : 이는 불트만의 신약성서에 대한 '비신화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가다머나 리꾀르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당시의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주어졌다. 특히 가다머는 삶의 자리에서 다양한 이해지평과 해석지평이 지평융합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그래서 이 해석학은 성서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기존의 서구 정통신학이 전해준 교리서로서의 성서가 아닌 해방과 혁명의 책으로서 오늘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직접 다가오도록 만들었다.

 

# 세속화 신학 : '세속화'라는 말은 '세속주의'와는 구별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속화 신학은 교회가 세상 일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교 영역을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세상을 변혁해 가는 원동력으로서의 신학이다. 이는 '비종교화론'을 제창한 본훼퍼에 의해서 강력히 제창되었는데 그는 '성육신' 사건 속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서 일할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세속화신학은 고가르텐과하비 콕스에 의해서 더욱 신학화 되었다. 이러한 세속화 신학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을 창출하였다.

 

# 신 죽음의 신학 : 이는 본훼퍼의 영향을 받아서 1960년대 초에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나 세계적 관심 속에서 찬반의 열띤 논쟁을 일으켰다. 신죽음의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초월적 하나님의 개념, 따라서 초월적 인격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학의 유신론적 논의가 무의미하게 된 무신론의 시대에 초월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개념의 죽음을 묘사하고 그리스도교를 유신론적이나 존재론적으로 해명하려 하지 않고 철저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해명하려 하였다. 인간을 위해 낮아지고 고난받는 하나님, 비종교적 하나님.

 

# 희망의 신학 : 이는 신죽음의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에 일어난 새로운 신학이며 신학의 관심과 언어를 미래와 희망에로 돌렸다. 희망의 신학에 있어서는 역사의 미래와 희망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그리고 부활한 자의 오심에 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희망은 단순한 꿈이 아니고 이 땅의 혁신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투쟁으로 이해되었다. 이 희망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희망 때문에 이 땅에서 혁신을 위한 자기희생의 책임적인 삶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 정치 신학 : 1970년대의 신학의 기류는 정치신학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이는 몰트만과 카톨릭 신학자 J.Metz 등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정치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정치 의식을 각성시키려 한다. 그것은 신앙 자체가 메시아적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신학 자체가 정치작 차원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정치신학을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다시 오심의 희망의 근거 위에서 이 세상 현실에서 가난한 자, 눌린자 그리고 인류의 고통 속에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책임성을 강조하려 한다. 정치신학은 복음의 정치적 해석을 지향한다.

# 해방의 신학 : 해방의 신학은 1970년대의 정치신학의 한 양태의 발전이며, 지역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흑인 해방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아프리카 해방신학, 아시아 해방신학 등). 해방의 신학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것은 단순한 영의 해방만이 아니라 죄와 양심의 고통, 죽음의 저주로부터 해방만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비인간화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만든 것이다. 기독교 인간 해방운동은 교회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선교에 대한 고난받는 그리고 구체적인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정통주의 신학 :

1920년 이래 신정통주의, 하나님 말씀의 신학의 광범한 호소력과 커다란 영향력은 주고 그것이 모든 다른 신앙들과 세속 이데올로기들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독특한 진리 주장들의 재발견과 재확인을 나타내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것은 시대정신에 순응하기 위해 기독교의 메시지를 희석시키고 왜곡하고 조작해버린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모든 철학과 과학과 문화들과의 제휴를 파괴할 것을 요청했다. 신정통주의는 본질적으로 신학을 위기 속에 있는 문화와의 결탁의 파기를 추구하는 "교정"신학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그 파긴遁 신의은혜의주권과 성경 권위의 유일성을 인간들의 사역들과 전통들과의 불연속선상에 두는 '오직 은혜'와 '오직 성서'와 같은 믿음의 재확임 속에 반영되고 있다.

신정통주의는 자연과 인간 역사 속의 신의 내재성에 관한 자유주의적 강조를 신의 초월성으로 대체한다. 바울과 어거스틴을 따르는 이 신학자들은 자유주의자들처럼 인간적 노력에 의해 개선될 수 있는 자연적 충동들과 인간적 무지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 타락 속에서 죄의 소재지를 발견했다. 인간은 단지 신앙 안에서만 역사의 의미를 분별할 수 있고, 그 의미는 역사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초월하는 계시 속에 있다. 역사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투쟁의 드라마가 벌어지고, 인간이 영원히 현존하는 신앙의 종말론적 "위기"에 직면하는 무대이다.

이처럼 고전적 기독교에로의 복귀의 성격에서 신정통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신정통주의는 단지 고전적 개신교 정통주의의 재현은 아니다. 신정통주의는, 신학은 모든 형이상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리츨학파의 교리를 수용했다. 자연신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을 수용한 신정통주의는,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 계시에의 추구에서부터 시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서 증거된 역사적 계시는 정통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무오한 것은 아니다. 신정통주의는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를 날카롭게 구분하기 때문에, 성경 기사들은 문자적이고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상징적, 신화적, 비유적 진리를 포함하는 사건들로 묘사한다.

신정통주의는 고전적 개혁 기독교와 19세기 자유주의 간의 창조적 종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렇게 상이한 두 전통의 연합은 창조적이면서도 동시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 문제점은 신정통주의의 근본 목적, 즉 기독교와 인간의 세속적 경험 및 판단규범과의 불연속성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신학과 철학의 관계 및 계시적 역사와 세속사와의 관계를 포함한다. / 급진적 신적 현실주의라고 불리는 바르티안들은 인간의 신지식에 있어서, 인간은 신적 계시의 수동적 수용자로 머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실주의둁에 의해 야기된 문제는, 계시는 항상 유한한 인간적 수단에 의해 인간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에 근본적으로 계시에 대한 피동적 견해가 가능한지 여부를 묻는다. 계시가 지식의 한 양식이라면, 그 계시에 대한 차별적인 판단을 해야하고, 그 판단과정에는 이성이 포함되고, 그럼으로써 어떤 일반적인 철학적 전제가 있어야 하므로, 인간 과학으로서의 신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신정통주의가 인정한 것 이상으로 복잡하지 않은가? / 신정통주의자들은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신"에 관해 말하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역사는 과학적 역사가에게 감추어져 있는 신성한 역사이다. 계시적 역사는 역사 편찬의 범주 내에 포함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을 함축하기 때문에 초역사적이다. 이 두 역사는 통상적인 경험의 역사(통상적인 관찰에 개방되어 있는 것)와 구속사(오직 신앙에 의해 파악되는 것)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두 역사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고, 전자가 후자에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 계시사는 전적으로 하늘에서나 땅 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둘 사이에 있는 어떤 신비한 중간 영역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1886-1968)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으나, 후기(1950년대 이후)에는 하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여 초월성과 내재성을 구별하여 동시에 강조하였다. 그는 성서 교의학을 제창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신의 신학, 교회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간성을 강조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신학은, 하느님과 그의 계시보다는 인간과 그의 종교적 경험을 기독교 사상의 출발점으로하는 종교적 인간학과, 인간의 타고난 선성과 완전 가능성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낙관하면서 세계의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는 자유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바르트는 하르낙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교사요 하느님의 계시자이긴 하나 한 사람의 인간인 예수를 중심으로하는 기독교 이해를, 헤르만으로부터 기독교 신앙과 도덕은 예수의 인격과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궁켈과 슐레터로부터 역사적 성서비평(양식사학)을 배웠다. 그러나 바르트는 당시에 일어났던 세계적 사건들의 영향과 성서연구로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였다. 이는 그 당시의 공식적인 기독교에 대한 항의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점점 더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을, 인간에게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죄가 인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파악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바르트에게는 보였다. 또한 그는 성서가 하느님과 그의 초월성과 주권적 자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이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인간을 너그럽게 용서하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고는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철저한 신중심주의로 옮아갔다.

'a theology of crisis'은 당시에 성서의 중심적인 메시지를 서술하기 위하여 사용한 방법을 말해준다. "a sinner through and through"인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사고도 할 수 없으며, 하느님과 관계를 가질 "point of contact"을 전혀 가지지 못한다. 하느님은 "totally other"이며 "absolutely Transcendent"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an infinite qualitative distinction"가 있고, 다만 인간은 "man's position vis-à-vis God"에 있다. 하느님이 JX, 그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인간에게 하느님의 메시지가 말해지고 들리어지는 때에, 인간의 삶에 'a crisis situation'이 초래한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의 기초 전체가 위협받는 선택에 직면해 있음을 발견한다.

'a dialectical theology'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이 인간에게 'a divine no'와 'a divine yes'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계시를 서로 상반된 것의 집합으로 해석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됨에 대하여, 인간이 자신의 분수를 넘는 주장에 대하여 언제나 "부정"하고, (therefore가 아니라) "nevertheless" 인간을 죄에서 구출하려 받아들임으로 "긍정"을 말한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은 십자가에서 만나고, 이 십자가에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된 인간의 모든 대조점들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신앙인은 JX를 하느님의 성육신으로, 스스로를 계시한 하느님의 계시로 이해한다.

'a theology of the Word'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전제로하고, 오로지 'faith-Knowledge'만으로 시작된다. 하느님의 계시는 그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한 사건으로 시작되며, 역사 안에서 구체적인 사건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드러낸 JX 자체가 바로 계시이다. 이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신앙과 순종 가운데 응답을 받게 되는 때에,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의 행동은 스스로를 계시하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는 하느님은 계시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며, "하느님의 인간성" 즉 인간을 향하시는 하느님, JX 안에서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JX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계시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JX를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게 되는 일련의 행동들이다. 하느님의 계시인 JX를 통하여 인간은 죄인에서 은총으로 구원받은 존재가 됨을 보여준다. 즉 JX는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계시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1934년 히틀러의 교회정책에 반대한 바르멘 선언 : ① 성서에 증언되어 있는 JX만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것을 들어야 하고 살아있을 때나 죽을 때나 이것을 신뢰해야 하며 이것에 복종해야 한다. 하느님의 이 말씀 외에 다른 사건들이나 세력들이나 진리들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교회의 선포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는 배격한다. ② JX께서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것처럼, 이제 그는 우리의 삶의 전체를 요구한다. JX에게 속하지 않고 다른 주에게 속해야 할 삶의 영역, JX를 통한 칭의와 성화를 필요로 하지않는 삶의 영역이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는 배격한다. ③교회는 오직 JX의 소유이며, 오직 그의 위로와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의 나타남을 기다리면서 산다. 교회는 그의 메시지와 질서의 형태를 자기 뜻에따라 결정하거나 이 시대를 지배하는 세계관적,정치적 확신의 변천에 내어맡겨도 좋다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는 배격한다. ④ 교회의 직분은 지배체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있다. 이 사명을 떠나서 교회가 지배권을 부여받은 영도자를 가질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는 배격한다. ⑤ 성서에 의하면 국가의 사명은 통치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법과 평화를 세우는 데에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이 제도에 감사드리고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계명과 정의를 상기시키며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국가가 그의 특수한 사명을 넘어서서 인간의 삶을 유일하고 전체적 질서가 될 수 있고 교회의 규정을 성취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는 배격한다. 그 반면 교회가 국가의 과제와 가치를 소유하고 국가의 한 기관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는 배격한다. ⑥ 교회의 사명은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메시지를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데에 있다. 교회가 주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어떤 다른 목적이나 계획과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는 배격한다.

에밀 부르너는 변증론을 사용하여 '선교의 신학'을 전개하고, 선교신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바르트와 브루너의 공통적 관심은 "sola fidei,sola gratia,sola scriptura,solus Christus"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이 세계의 구원자시며, 오직 신앙을 통하여만이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고,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자유롭게 선택하시는 은혜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고, 십자가의 말씀을 깨닫도록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교회가 외치는 모든 선포에 있어서 오직 성서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규범이다. 교회는 그의 근거와 의인과 법과 가능성을 "오직 계시의 사건 안에"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제약을 초월하여 자유롭다. 교회의 사신은 계시와 이성, 혹은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라는 두 가지 규범과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계시와 말씀만을 그의 근원으로 가지고 있다.

라인홀드 니이버(1892-)는 인간의 집단의 악에 대항하여 정의를 도덕적 이상으로 주장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신앙으로써 의로워지고 소망과 힘을 갖게 되다고 하였다. 자유주의에는 인간의 본래적 선성과 인간의 선성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이 되어야 할 모습(당위적 존재)이 되기 위하여 해야 할 필요 있는 행동은 세계의 진보를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헌신하는 일뿐이었다.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을 위한 여지는 거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the doctrine of man's sinfulness'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은 인간 속에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악의 잠재력을 드러내고, 인간에게 하느님의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니버의 사상은 이러한 신정통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니버의 사상은 "Christian Realism"이라고 불리는데, '기독교적'이라 함은 기독교의 자원 안에서만 개인과 사회의 양 본성을 지닌 인간의 완전한 차원을 탐구하고 설명하는 데 필요한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하고, '현실주의'라 함은 오늘날의 인간과 사회의 문제들의 모든 복잡다단한 면을 세밀하게 탐구하려고 하는 자세를 말한다. / 그에게서 인간은 애매성과 더불어 살고 있으며, 이 애매성을 지닌 문제를 다루기 위한 기술은 변증법적 사고(긍정과 그에 대응하는 부정)와 역설적 진술(한 진리와 다른 진리의 균형), 그리고 잠정적인 대답(현재를 위한 결정들과 더불어 사는 법)이었다. / 그의 과제는 인간을 개인과 사회의 차원에서 온전하게 인식하고 그런 후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세계내적 삶에 던져주는 빛을 찾는 데 있었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기원 : 예일신학교의 자유주의적 풍토에서 교육 받음 - 디트로이트의 한 교구에서 미국 산업주의의 성장을 13년 동안 관찰 - 낙관주의의 상실, 도덕적 이상주의의 설교에 대한 회의, 인간 본성의 현실적인 모습에 대한 직접적 지식(경험적 지식)을 획득, 자기의 이익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인간의 주요 수단은 'the will to power'임을 인식 - 1928년부터 유니온 신학교에서 강의, 인간과 인간사회의 병폐들을 냉소적으로 폭로, 인간 자체와 사회와의 관계 속의 인간에 대한 연구

 

사회 속의 인간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 인간(개인)은 신앙을 통하여 한 기독교인으로서 사랑이 그의 삶에 있어 주된 요인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 것이 가능하고, 개인적인 관계에서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으므로,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다. / 그러나 대 사회(intersocietal) 관계에 있어서는 최고의 도덕적인 가치인 사랑이 그 기본적인 운영(operation)의 법이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회는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 개인의 경우 교만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는 제어될 수 있지만, 사회의 경우는 누적적(cumulative)인 교만이 있어 통제하기가 어렵고 "이성이나 양심의 지배 아래" 들기가 훨씬 어렵다. / 그러므로 사회개혁이나 집단간의 분쟁을 해결하기에는 사랑의 윤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한 권력에 대한 다른 권력의 도전을 균형있게 하는 정의가 다양한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규범이 될 수밖에 없다. / 미래의 목표는 "강제가 없고 완전한 정의와 평화가 이룩될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충분한 정의가 존재하고 공동의 과제가 완전한 파산에 이르는 것을 막을 만큼 강제가 비폭력적인 방식이 될 사회의 건설이다." / 현명한 사람은 삶에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고, 그 정신을 집단에 실현되게 하려고 노력하며, 갈등하는 집단들에게는 정의의 근사적 실현을 위한 합리적 타협의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다. 또한 사회 속의 삶의 상황들을 "불가능한 가능성들"의 연속으로 보려고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사회에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떻게든 존재한다는 신뢰감을 전제로 한다. /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종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 주인이다.

 

인간의 본성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 기독교의 인간관은 "하느님의 형상"의 교리 속에서 인간의 정신적 성장면에서의 자기 초월의 높이를 강조하고, 또한 인간의 약함과 의존성과 유한성, 그리고 인간이 자연적인 세계의 필연과 우연에 영향을 받음을 주장한다(하느님의 형상과 피조성의 통일체로서의 인간, 자연과 정신의 합성물로서의 인간, 인간 실존의 애매성, 제약과 자유,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초월하는 인간). / 인간 속의 악은 인간이 자신의 의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불안전성(insecurity)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필연적이지는 않으나 불가피한 자세의 결과이다. / 이런 애매성(ambiguity)을 해결하고, 불안을 진정시키고, 인간이 추구하는 안전을 제공해 주는 것은 자유이다. 이 자유의 능력은 바른 선택과 그른 선택을 포괄한다. / 바른 선택은 인간이 그의 피조성과 하느님에 대한 의존성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그 이상적인 가능성은 하느님의 사랑의 궁극적인 안전을 신뢰하는 것이 자연과 역사의 모든 직접적인 불안전성을 극복케 해 주리라는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피조성을 부인하여 자신의 신이 되고, 자신의 자유를 과대 평가하여 자신의 자유가 무한정한 것으로 자처하는 것이 죄이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하려는 시도로써 교만의 죄를 저지른다. ①권력의 교만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지배하는 권력을 추구함으로써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②지적인 교만은 실재(현실)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설명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상가의 죄로서 권력의 교만을 지지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③자기義의 교만은 자신의 도덕적인 가치를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유한한 피조물의 오만(pretentiousness)이다. 이러한 교만은 상대적인 자유를 절대적인 자유로 바꿈으로써, 자유의 짐을 거부함으로써 불안정감이나 불안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따라서 이러한 교만, 죄 속에는 과도한 자기애와 동시에 자기로부터 도피하려는 노력이 결합되어 있다.

 

인간과 역사의 의미인 그리스도 : 니버의 인간관의 강조점은 인간의 선의 가능성보다 죄의 잠재력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론은 그의 사고의 균형을 회복시켜 주고 기독교적 희망의 낙관성을 부여해 준다. / 신앙이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역사적 사실, 인간의 죄성과 역사의 애매성에 빛을 던져주기 위하여 신앙이 이용하는 역사적 사실은 그리스도, 특히 그의 십자가의 사실이다. 그 사실에는 구속적 은총과 절망의 교훈을 포함한다. /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능력의 두 구성 요소인 정의와 자비, 진노와 용서는 화해된다. 하느님의 법의 엄격성에서 요구되는 진노와 심판의 결과를 십자가에서 감당함으로써, 인간의 역사에서 악은 충분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충족될 때에만 악의 상황은 바로잡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절망 후의 희망). / 인간이 하느님의 능력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은 동시에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은 인간은 자신의 죄성을 받아들인 후에 그리스도의 능력적 현존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 위에 있는 하느님의 능력과 대립한다. / 이 두 측면은 인간의 삶 속에서 계속적 긴장을 유지하독록 해야 한다. 은총은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있으나 이 삶의 어느 단계에서나 인간 악의 새로운 가능성들이 현존한다. 따라서 인생의 종말, 역사의 완성 때에야 하는미은 궁극적으로 발견되며, 그때까지는 인간의 상황은 언제나 애매한 성격으로 남는다. //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십자가의 의미르 본질적으로 낙관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데, 이는 십자가 사건 속에서 "점진적으로 악에 대해 승리를 거두어 가는 역사 안의 한 힘으로서의" 대리적(vicarious) 사랑이 들어온 것을 본다. 그러나 인간이 진보하는 동안 선과 더불어 악도 역시 발전한다. "역사의 모순들은 역사 안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영원하고 신적인 차원에서만 해결된다." / 비극적인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역사에 도입했던 대리적 사랑은 인간의 죄에 패배를 당하면서 종말에 이르고, 여기에서 삶의 의미는 대리적 사랑의 의롭고 진실됨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선한 측면도 있으며, 그리스도의 행동의 결과도 세계에 현존하고 있다. "하느님은 역사에 개입하고 관여하는 분이지, 영원한 태평 속에 거하는 어떤 부동의 원동자 같은 존재는 아니다."/ 신앙인에 의하면 역사 안에는 선이 존재하고, 하느님의 능력은 신앙인 자신의 삶과 역사 속에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이 세계 안에서 책임적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언제나 선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니다. / 인간의 행동은 종말에 이를 때까지 선과 악의 혼합물로 존재할 것이다. 인간의 과제는 가능하고 보다 나은 것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자신이 성취한 것을 하느님의 나라의 최종적 도래로 자처하지 않는 것이다.

 

결론 (니버에 대한 두 가지 비판과 대답) :

니버는 역사 안에서의 '교회'의 감상성, 독재성, 몽매성, 위선성(자기義)은 바로 비판하고 있지만, 교회는 하느님의 계시를 보존하였고, 이 계시는 교회를 악을 고발하는 증인의 위치에 서게 하고, 하느님은 교회 공동체에서 인간과 관계한다는 것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다. 교회는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계시와 신과 인간과의 관계의 구현체이다. --> "하느님의 신탁들"을 지닌 은총의 공동체인 교회는 인간의 교만을 깨뜨리는 하느님의 심판의 최종적인 말씀과 상한 심령을 살려내는 하느님의 자비의 말씀에로 인생을 개방시키는 역사 안의 유일한 장소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악이 종교적 공동체의 자만을 통하여, 그 인습적이고 율법을 무시한 율법주의를 통하여, 종고적 열광주의를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은 자만심에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게 한다. // 니버의 인간의 죄성에 대한 개념은 너무 비관적이어서 인간의 노력을 마비시키는 경향이 있고, 하느님조차도 구원할 수 없는 것 같다. 또는 니버가 모든 죄를 교만이나 육욕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삶의 상태 묘사에 너무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 인간의 죄는 이기심(self-regard)인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모든 사람은 교만하거나 그 교만을 허락하고 있으므로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만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실존주의 신학 -- 20세기 기독교 실존주의는 신정통주의를 다루면서 거론되었던 많은 운동들 속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었다. 실존주의는 보편적 실존과 개인적 실존이 논리적으로 필요한 개념적 도구의 번주 안에서 합리적둁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주의 개념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이다. 따라서 실존은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적 가능성을 규정하는 고정된 인간 본질에 대한 어떤 관념도 배제하는 근본적 우연성과 자유로 표상된다.

 

Rudolf Bultmann(1884-1976) : 바르트의 관심이 하느님의 전적인 타자성과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인간이 하느님에 대하여 어떤 것도 인식하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집중하였고, 본회퍼는 오늘날의 인간에게 갖는 이 계시의 구체적인 함축적 의미들을 탐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불트만의 관심은 계시 그 자체에, 이 계시의 운반체인 성서에 집중되었다. 즉 성서의 메시지가 현대 세계에 이해되고 의미를 가지도록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다. 하느님의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된 'thought patterns'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⑴역사비판적 자유주의 신학의 전통 :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판적 정신 = 성서에 대한 학문적 비판적 작업과 그 지성적 솔직성, 지나간 신화적 초자연적 세계상과 대립하는 현대적, 자연과학적 세계상에 대한 문화 기독교주의적 긍정의 태도 ==>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 "신학의 대상은 신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난은 신에 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관해서 취급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신인 신학은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만을 그 내용으로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에 대해 거리끼는 것이다."(G.& V.I, p.2)

 

⑵바르트의 변증법적 계시신학의 영향 : 케리그마의 신학. 변증법적 계시신학 = "신은 인간의 전적인 지양이며 인간의 부정, 인간에 대한 문제 설정, 인간에 대한 심판이다."(GV I, p.118) "직접적으로 신과 그의 나라에 관계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없다. 인간적 공동체 삶의 모든 양식은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든, 가장 나쁜 것이든지 간에 신의 심판 아래 동일한 방식으로 서 있다."(VG I, p.15) 계시는 모든 인간적인 것, 문화, 종교, 사상의 심판이고, 따라서 계시는 모든 인간적인 안일과 안주함에 대한 위기이다. 계시에 근거한 변증버벅 사고는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요, 모든 인간적인 신 이해에 강한 부정을 가하고, 오직 신의 계시가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신은 항상 그의 계시를 통해 그의 계시자들(Offenbarer)에게 접근한다. ... 계시 밖에서는 신은 결코 있지 아니하다."(VG I, p.142ff)

 

⑶루터의 개혁주의적 의인론 영향 : 계시사고는 모든 인간적 신인식을 무로 돌리고 싱의 계시 말씀에 대한 신앙행위와 이 신앙에 의한 인간의 칭의를 강조한다. / 실존적 신인식 = "우리는 신에 관해서 모르며, 우리 고유한 자신에 관해서도 모른다. 우리는 신과 우리 자신에 관한 인식을 오직 신의 은총에 대한 신앙 안에서 가진다."(VG I, p.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실존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VG I, p.36) 신앙은 "우리가 정립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행위이며 새로운 순종이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시는 신의 은혜, 즉 오직 신에 관해서만 말하고자 하는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신의 은혜에 대한 신앙으로만" 신앙은 확실하다. 이 신앙은 우리에 대한 "신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고 "결단"이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 그러나 "신앙은 이해되어야 한다." / 비신화론화(Entmythologisierung) = 신앙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현존재에 대한 철학적 분석사고를 요구하고, 계시 말씀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자연과학적 세계상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성서 이해를 위해서 신약의 계시 말씀을 비신화화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신의 행위으 역사적 현상을 신화론적 세계상에 의해 각색된 것으로 간주하고 捨象해 버린다. "행위하는 신의 피안성과 은폐성"과 "신의 비가시성"은 신의 행위를 가시적으로 대상화하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한다. 신앙은 객관화하는 지식에 근거하는 어떠한 안주성도 가지지 않고, 오직 허공을 향해서 그의 실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dendoch ; trotzdem)라는 결단을 통해서 돌입해야 한다. "비신화화론은 신앙의 의인론을 지식과 사고의 영역에서 극단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 실존론적 의인론(existentiale Rechtfertigungslehre) = 이는 신에 관해서 어떠한 가시적 지식이나 객관화하는 역사적 근거나, 관찰 내지 탐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실존적 결단이다. "오직 선포된 말씀의 빛 속에서만"신앙자에게 신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는 케리그마 신학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 케리그마 신학(Kerygmatische Theologie) = 케리그마는 신의 구속사건에 대해서 "선포하는 부름"이며, 이 부름 속에서 계시는 인간에게 부딪친다. 이 부름을 받아들일 때 구속사건은 일어난다. 모든 신앙의 전제인 케리그마는 인간의 가능성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에서 유래한다. / 실존론적 해석학 = 케리그마의 인간학적 접촉점은 배제되지만 그 해석과 이해는 인간적 실존을 전제한다. 철학적 해석학에서 변증법적 계시 사고에 자유주의적 비판적 유산이 수용된다.

 

⑷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학의 영향 = "현상학적-실존론적 분석의 형식적 방법"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학(Sein und Zeit)은 불트만에게 케리그마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착상을 주었다. 하이데거의 무신론적 입장은 불트만의 변증법적 신학의 신이해에 적합했다. 변증법적 착상에 의하면 인간에 의해서는 신은 결단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신의 계시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계시는 인간이 경험하고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계시로 성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 이해에는 학문적으로 가능한 해석학적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 현존재는 "시간성"을 가진고 "근심"에 의해 규정받는 "죽음에의 존재"로서 이는 "비본래적"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선구적인 결단을 초래하는 "양심의 부름"에 의해서 "본래적 존재"로 나아간다. / "내가 나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하며,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어떻게 결단하는 것인가"


 

폴 틸리히(1886-1966) : 신학의 중재적 과제에 대한 성찰

틸리히의 "중재의 신학" : 신학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전승된 진리와 그 시대를 중재해야 하기 때문에 "중재의 신학"이었다. 특히 틸리히는 이를 위하여 "상관 관계의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는 현대 세계의 세속화를 받아들이며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그는 자율성을 가진 인간에게 그의 존재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제시하고 현대문화의 잘못된 방향 곧 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방향을 시정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영원한 메시지를 그 시대에 대하여 해석하고 그 시대에 대한 메시지의 타당성 내지 의미를 제시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참 신학은 "답변하는 신학", "변증적 신학"이다. 변증적 신학은 "질문과 답변, 상황과 메시지, 인간의 실존과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상호 관계시킨다." 상황 속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는 궁극 이전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 문제, 제약된 문제가 아니라 무제약의 문제 곧 절대적 문제이다. 즉 존재의 근거와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문제"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문제에 답변한다. "하느님의 답변의 인상(Eindruck) 속에서 인간은 그의 문제를 제기한다."

 

존재로서의 하느님 : 틸리히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유한성의 범주들 특히 공간과 실체의 범주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존재"(Sein), 그러나 존재에 예속되어 있지 않는 "존재 자체"(Sein- Selbst), 현실의 궁극적 근거이며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의 심연으로서 "존재의 근거"(Grund), "존재 구조의 근거"이다. 또한 하느님은 "비존재(Nichtsein)와 대립되는 것"이다. 비존재는 단순히 존재의 결함을 뜻할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존재는 "비존재로 말미암은 위협에 대항하는 무한한 존재의 힘이요 무한한 용기의 근거이다." 존재의 근거로서의 하느님에게는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가진다. "존재의 힘으로서의 하느님은 모든 존재자와 모든 존재자의 전체 곧 세계를 초월한다. ... 양자 사이에는 절대적 단절, 무한한 '비약'(Sprung)이 있을 뿐이다." 또한 "모든 유한한 것은 존재 자체와 그의 무한성에 참여한다." "모든 사물은 단지 유한한 방법으로 존재의 힘에 참여하며 모든 존재는 그들의 창조적 근거를 통하여 무한히 초월된다." 그러나 틸리히는 하느님을 많은 존재자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따라서 인격적 하느님이란 하느님이 인간과 같은 한 인격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격적인 것의 근거이며 자기 자신 안에 인격성의 존재론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로서의 하느님과 유한한 존재자 : 모든 존재자들은 하느님에게 참여하고 있고 하느님은 그들의 존재의 힘으로서 그들 안에 내재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존재자들은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존재 자체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유한하다. "피조물이란 신적인 삶의 창조적 근원에 뿌리박고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을 뜻하고, 창조는 피조물의 자기 실현에서 성취된다. 그러나 이 성취는 창조적 근원로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하여, 본질과 실존의 단절을 통하여 일어난다." 실존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 안에 근거되어 있으면서, 그의 본질로부터, 궁극적으로는 존재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뜻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절대적 비존재로부터 나와 있으면서도 그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하므로, 그것은 유한한 존재,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하느님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존재론적 요소들의 긴장관계 안에 나타나는 불안 : "비존재를 통하여 제한된 존재가 곧 유한성이다. 비존재는 존재의 '아직 아님'(Noch nicht)으로서 그리고 '더 이상 아님'(Nicht nicht)으로서 나타난다. 그것둁든 존재를 가진 것을 존재의 종식을 가지고 위협한다." 불안은 존재론적 요소들의 "존재론적 긴장관계"들의 파괴와 이로 말미암은 "존재론적 구조"의 파괴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난다. ①개체화-참여(Individualisation-Partizipation) : 모든 인간은 개체화로 말미암은 고독의 위협을 당하는 동시에 참여와 관계성으로 말미암은 개체성의 상실과 집단화의 위협을 당한다. "자기 관계성은 세계와 사귐이 그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고독의 위협을 초래한다. 그 반면에 세계 안에 존재함과 세계에의 참여는 완전한 집단화, 개체성과 주체성의 상실의 위협, 그리하여 자아가 그의 자기 관계성을 상실하고 포괄적인 전체의 단순한 한 부분으로 변형될 수 있는 위협을 초래한다." ②역동성-형식(Dynamik-Form) : "역동성은 존재가 그 속에서 실젤로 있을 수 있고 비존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형식을 추구한다. 이와 동시에 역동성은 경직된 형식들 속에서 상실될 수 있으므로 위협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생동력이 그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궁극적 형식의 위협에 대한 불안 속에 있는 동시에, 생동력과 의도성이 그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카오스적 무형식의 위협에 대한 불안 속에 있다." ③자유-운명(Freiheit-Schicksal) : 인간은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자의적으로 저항함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위험 속에 있는 동시에, 자기의 운명을 포기함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구하려고 하는 위험 속에 있다.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논쟁은 자유와 운명의 존재론적 긴장관계가 객관적으로 나타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 우연한 행위들이 일어나는 무대에 불과하지도 않지만 운명의 기계에 불과하지도 않다. 그는 "자유와 운명의 동일체"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존재론적 긴장관계를 파괴하고 그를 비존재로 폐기시키려고 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이로 말미암은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 "유한성은 자신의 존재론적 구조를 상실하고 이리하여 자신의 자아를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유한하다는 것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불안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용기를 필요로 하고, 이 용기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하느님에 대한 물음이다. "하느님은 존재 안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

 

유한성의 범주에 나타나는 불안과 하느님에 대한 질문 : 말의 형식인 동시에 존재의 형식인 범주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를 나타내는 동시에 그들이 예속되어 있는 "비존재"를 나타낸다. ①시간 : 시간의 긍정적인 요소는 새로움을 향한 창조적 과정이고, 부정적인 요소는 "모든 시간적인 것의 허무성",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순간을 고정시킬 수 있는 불가능성"에 있다. 이난의 자아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요소는 불안으로 나타나고, 이 불안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나고 비존재가 내면으로부터 경험된다. 불안을 모든 순간마다 잠재적으로 현존하며, 인간의 존재 전체를 포괄하며 영과 육을 형성하고 정신적 삶을 규정한다. 또한 인간은 존재 자체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용기를 얻는다. 이 존재론적 용기로 인하여 그는 불안을 이기고 현실을 인정한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어려운 까닭은, 인간은 아직 그 자신의 것이 아닌 미래를 표상할 수 있는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외되어 있는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에 대하여 자신의 현재를 방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존재론적 용기의 국극적 근거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②공간 : 모든 존재는 자기를 위하여 공간을 얻으며 공간을 유지하고자 한다. 공간을 얻고자 하는 모든 존재의 노력은 "존재론적 필연성"이요 "유한한 존재의 공간적 성격의 결과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자질이다." 유한성이란 아무런 특별한 공간도 갖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은 모든 장소를 결국 상실하며 이리하여 그의 종재를 상실함을 뜻한다. 불안은 자기의 공간을 상실할 수 있으며 아무런 궁극적 공간도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아무 특별한 공간도 갖지 않으며 아무런 궁극적인 공간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최후의 불확실성을 뜻한다. 유한하다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현재를 인정하고 자기의 현재와 함께 공간을 긍정하는 용기를 얻는다. 모든 사물은 "존재론적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며 이 받아들임을 통하여 확실성을 얻는다. 그리고 "어떻게 한 존재가 공간의 일시적 상실이나 궁극적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발견할 수 있는가 ?" ③인과율 : 인과율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원천을 가리킬 수 있는 힘이다.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어떤 사물의 존재의 힘을 찾는 것"이고, 또한 어떤 사물이 사건도 존재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의 존재는 우연하므로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아무런 필연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존재의 필연성의 결핍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용기를 얻는다. 인간은 이 용기를 통하여 모든 유한한 것의 인과율적 의존성에 대한 불안을 극복한다." 그러나 인과율의 고리와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는 존재가 이 의존성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 의존성에 대립하는 필연성을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인정할 수 있는가 ? ④실체 : 실체는 생성 소멸하는 "현상의 흐름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 어느 정도 정적이고 자기 자신 안에 근거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그러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 "과정 속에 서 있는 것" 곧 실체의 존재를 우리는 언제나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유한한 것 속에는 실체가 있으나 이 실체는 변화로 인하여 상실될 수 있다. 모든 변화는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의 비존재를 드러낸다. 변화될 수 있는 실재는 비존재에 대항하는 실체성과 존재의 힘과 저항을 결여하고 있다. 불안은 달리 말하여 "변화 속에 포괄되어 있는 비존재의 위협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인간은 용기를 가지고 개체적 실체와 존재의 보편적 실체를 없애고자 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받아들인다. // 이 범주들은 "모든 유한한 것 속에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성을 나타낸다." 네 가지 범주들은 "비존재의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느님에 관한 문제는 이 용기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다.

 

존재론적 상관 관계 속에 있는 하느님과 인간 : "인간 실존의 상황은 소외의 상황이다."그는 자기의 본질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면서 또한 하느님에게 참여되어 있다.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고 인간은 존재하는 한 존재 자체와 관련되어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언제나 위협을 당한다. 비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은 실존의 기본정조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존재의 용기를 주는 "존재의 힘"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것" 혹은 궁극적 관심이다. 존재의 힘이 인격화된 존재가 JX 안에 나타난 "새 존재"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인격적 삶 속에서 "존재의 힘"이 실현되어 있다.

 

틸리히의 문제점과 신학의 중재적 과제 :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존재론적 상관관계에서 보려고 한 틸리히는 자신이 살던 그 시대와 하느님의 메시지를 중재하고 이 메시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연관성 내지 타당성을 제시하고자 한 위대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①인간의 존재 자체는 곧 하느님에 관한 질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문제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 오심으로써 일어나지 않는가 ? ②하느님 곧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 신학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의 중재적 신학의 한계는 하느님과 이 세계의 구체적인 문제를 연결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③유한성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틸리히의 분석도 추상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안의 문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④유한한 존재의 자기초월은 그의 존재론적 특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하느님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존재는 유한한 존재에게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할 뿐이다. 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을 찾고 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현실적으로 극복하게 하는 하느님의 기능에 대하여 틸리히는 침묵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을 일으키게 하는 역동성의 근원이라기 보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불안띪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JX는 인간 세계의 고난 속으로 오셨고 고난당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하느님의 영원한 메시지와 시대 상황의 참된 중재는 틸리히가 말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의 문제"에 대한 "답변"에 있다기 보다는 불의와 대립과 갈등과 억압으로 가득한 이 땅 위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에 있다.


 

세속화 신학 -- 세속화 신학은 타계적 경건주의와 내성적 기독교에 대한 반동으로서, 신의 내재성을 초월성보다 강조한다.

본회퍼(1906-1945) : "X께서 한 인간을 부르실 때는 그에게 따라와 죽으라고 명하신다"라고 말한 것처럼, 본회퍼는 순교의 삶을 살았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즉 기독교가 삶의 의미에 대해 기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뇌 속에서 그는 교회인과 'the men of the world'에게 이야기한다. 교회인들에게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라, 즉 교회를 교회가 뜻하는 바 "X-existing-as-community"로 만들라고 하며, 세속인들에게는 성숙해질 것을, 인간의 모든 잠재능력들을 충분히 발전시킨, 특히 인간의 자유의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휘시킨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진리의 삶을 살도록 도전하고 성숙한 삶을 요구하는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와 세상으로 하여금 각기 그 현재적 과제를 성취하려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 Eberhard Bethge는 그의 중심사상을 'a continually growing awareness of the concretness of revelation'으로 이해한다. 그의 사상의 편력은 그의 인생의 편력과 병행하며, 이들은 계시가 삶 그 자체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데에 중심한다.

 

계시의 본질 - Sanctorum Communio, Act and Being :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선택하셨다라는 말은, "하느님이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심을...자신을 역사적 인간에게 얽매이도록 선택하셨음을...자신을 인간의 처분받을 자리에 두셨음을...영원한 비객관성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교회 안의 그의 말씀 가운데서 '가질 수 있고' 파악될 수 있게 존재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니은 자신을 계시하시며 이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인간에게 유용하게 만드신다. 하느님의 유용성 인간을 위한 그의 존재방식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고독하게 살아서는 안되고 공동체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교제 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반영되어 있는 신의 계획이다. 그러나 "죄의 현실은...개인을 극단적인 고독 가운데, 하느님과 인간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된 상태 속에 가져다 놓는다." 이와 같은 상태로부터의 구원은 공동적이다.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는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의 창조이다.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는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면서 사는 까닭에 이기적 존재의 굴레로부터 해방받은 성도의 공동체이다.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인 교회는 'the locus of humanity's restored community, the iocus of redemption'이므로,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 곧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느님과 인간과의 교제의 산 표현이고, 그리스도의 사업의 열매가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원천이다. 교회의 전체 기능은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존재로서 말씀이 완전히 성육화되는 것을, "Christ revealed as community"가 되는 것을 의도한다.

"being of God in revelation"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시는 어떻게 알려지는가, 행동으로서의 신앙과 존재로서의 계시의 상호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계시는 한 행동의 수행 속에서만 인간에게 주어지는가 아니면 계시에서는 인간을 위한 존재가 있는가 ? 계시를 행동의 측면에서 묘사할 때, 하느님은 일련의 행동에 의하여 특수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다라고 이해한다(Barth's act theology). 계시를 존재의 측면에서 묘사할 때, 계시의연속성이 강조되어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일련의 계시의 수용자가 아니고, 하느님과 인간의 존재 자체가 계시 안의 존재라고 이해한다(Tillich's being theology). 전자는 인간으로부터의 하느님의 자유를 보존하고, 후자는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본회퍼는 후자의 접근방법을 선호한다. 교회 안에서 계시에 관한 "행동적"사고와 "존재적"사고의 가치는 살아있는 통일성 속에서 서로 묶여있다. 교회는 그 존재성을 교회 안의 신앙 헹위와 신자의 계시 소유에 의존한다. 'the Christian communion'가 하느님의 최종적 계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되고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공동체,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새로운 인간 - 아니 그보다는 새로운 인간성 그 자체"로 계시한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계시의 연속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계시가 행동 속에서 드러나는 장소이다. 교회 속에서 계시는 스스로 존재와 행동임을 계시한다.

 

계시의 구체성 - Nachfolge(The Cost of Discipleship) : 본회퍼는 이 책에서 'an existential embodiment of thought in action'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아직도 'radical religionlessness'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은총의 소유자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어떤 다른 면모를 보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Luther의 'sola fidei'의 원리가 자기만족적인 진부한 생활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으로 타락하여, 은총은 하나의 교리·원리·체계로서, 죄인이 의롭게 인정받는 것을 동반하지 않는 죄의 정당화를 뜻하는 "값싼 은총"으로 전락한 것에 대한 비난이다. 반대로 "값비싼 은총은 다시금 다시금 추구되어야 할 복음이요, 요구를 지닌 선물이요, 인간이 두드려야 하는 문이다...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그것은 우리에게 JX를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고, 그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는 까닭에 은총이다. 그것은 죄를 단죄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고 그것이 죄인을 의롭게 해 주기 때문에 은총이다."

은총과 제자직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유일한 길은 세상가운데 사는 길이다." 순종하는 신앙인은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와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라는 역설적 성격을 함께 공유하고 생활화한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제자직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오직 그리스도만 알고 자신은 알지 않을 것과 오직 앞서 가시는 그분만을 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어려운 길은 보지 않을 것"을 말한다. 또한 이 길은 새로운 교제의 시작이고, 나의 이웃과 나 자신이 예수 안에서 하나되게 한다. 기독교 제자직의 비범성은 "세상에 살면서도" 예수처럼 사는 것('a life of suffering love')을 뜻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은폐된 것, 특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감추어지고, 십자가의 삶에로 자신을 신앙 가운데서 내어주어야 한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말씀을 듣는데서 그가 영위하는 삶으로 그의 동료들과 차이를 나타내지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는 우정으로, 예수의 사랑의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들에게로" 다가간다.

은총과 제자직이 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죽음이요, 예수 안에서 남을 위해 사는 삶이다. 성육하신 하느님의 아들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인간성으로 존재하였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그 모든 연약함과 죄와 부패와 더불어 배신적인 인간 본성 전체를 취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안에서 전체 인류와 더불어 수용되는 JX의 몸은 이제 우리의 구원의 터전이 되었고, 그 몸(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서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갖는 연대성이 기본적인 인간적인 문제, 연대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문제에 대한 신적인 대답이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에의하여 하느님의 새로운 형상을 입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는 것은 먼저 "그의 수치스러운 형상"을 따르는 것이다.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분신이 됨으로써 우리는 그가 지녔던 전체 인간성을 나누어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결과인 개인주의로부터...전 인류와의 연대"로 회복 된다.

 

타자를 위한 실존적인 존재 - Ethics : 책임적이고 자유로운 기독교인의 삶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윤리학}에서 그가 제안하는 인간형은 지혜와 단순성을 겸비한 인간이다. 단수난 인간은 그의 시선을 하느님에게만 고정시키면서, 날마다 하느님의 계명과 심판과 자비를 듣는다. 그는 자신이 "원칙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묶여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단순한 사랑은 지혜로운데, 그는 "하느님 안에서 현실을 이해한다." 지혜롭고 단순한 인간은 하느님과 그의 세계가 조화로운 일치 가운데 함께하는 자리, 즉 JX의 인격 안에서 자신의 도덕적 자아를 형성하는 길을 찾는다. 이 도덕적 형성(moral formation)의 세가지 구성요소는 성육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닮는 것(conformation)이다. 교회는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시키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교회는 인간들 가운데서 형상을 취하신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이며, 인간의 무리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취하는 일이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신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추상적·결의론적(casuistic)·강령적(programmatic)·순수사변적이지도 안은 방식으로" 자기자신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여야 한다. 진정한 기독교인에게 진정한 윤리적 문제란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는 문제이고, 이는 'Christ without the world'나 'the world without Christ'이 아니고 "그 자체 내에 세상의 현실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義認인 궁극적인 사항만을 강조하는 것은 극단주의로써 인간의 모든 일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강조한다. 또한 타협의 입장은 "이 세상에 속한 일들"은 그 자체의 권리를 보유하고, 궁극적인 것인 의인은 일상생활에서 물러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의 입장보다 기독교인은 오히려 "성육신의 효험을 통하여 인간이 되고, 십자가의 효험을 통하여 선고를 받고 용서를 받으며, 부활의 효험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준궁극적인 일은 인간이 되는 일과 선하게 되는 것이다. 준궁극적인 일은 궁극적인 일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대리직과 책임이라는 성격을 가지며, 이는 자신의 이웃과의 관계의 모든 구체적인 관계에서 그리스도 처럼 행하는 "책임적인 역사적 행동"이다. 책임은 창조·속죄·구속이라는 긍정과 정죄·죽음이라는 부정의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적 인간의 행동은 그것만이 자유를 주는, 전적인 자유를 주는 책무, 곧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책무 가운데서 수행되어진다. 기독교인의 모든 선택에는 자유와 순종이 혼합되어 있다. "자유없는 순종은 예속이요 순종 없는 자유는 자의적인 자기 뜻"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도덕 생활의 열쇠는 예수요 예수의 형상을 기독교인이 본받는 것이다.

 

기독교의 비종교화 -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절대권력과 절대선의 지고한 존재,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사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의심은 "인간 실존의 경계들"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게 한다. 성인이 된 현대에 있어서 삶의 한계 상황들에다 하느님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은 오류이다. 오히려 하느님은 삶의 중심에 놓여져야 하고, 그리고 구원은 인간 역사의 사건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들 한가운데 계시는 초월자"가 된다. 이 하느님은 이웃의 고통을 함께하는 고난받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이 진정한 교회가 된다. 이는 비종교적인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남을 위한 인간으로서의 JX가 그 초점이되고, 그 교회는 구체적인 본보기로서 예수를 따라야 한다.

역사신학 -- 실존주의 신학과 구원사학파의 이원론을 비판하고, 일원적 구원사를 주장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구원사로 보고,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다.

 

판넨베르그의 신학적 轉機 : 판넨베르그는 당시의 신학사조를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전기를 형성하였다. 그는 헤겔의 사고를 폰 라트의 구약성서신학과 결부시켰다. 그의 신학은 역사를 중요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모든 내용을 역사와의 관련 하에서, 역사의 지평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 관심은 20세기 전반기를 지배한 실존신학과 구원사 신학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실존신학은 객관적인 역사의 과정을 떠나서 개인의 역사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의미로 도피하여 역사를 "실존의 엿사성으로" 폐기하였고, 구속사 신학은 역사적-비판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초역사" 혹은 "원역사"에로 도피하였다. 또한 그는 "변증법적 신학"을 "케류그마 신학"이라 하면서 그 문제성을 비판하는데, 케류그마 신학은 역사적 예수 자체와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사실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역사의 상실"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판을 통하여 판넨베르그는 형성된 "역사신학"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지평을 회복하며 역사에 대한 기독교진리의 보편타당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서의 역사 : 세계사의 사건들과 하느님의 계시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는 역사의 지평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와 역사의 이러한 대립은 수정되어야 한다. 하느님이 자기를 계시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이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가 이 세계 속에서 자기를 증명한다는 것은 바로 역사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신의 현현의 방법에 있어서와 같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간접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의 행위를 통하여 일어났다." 구약성서에서 야웨는 역사의 행위를 통하여 자기를 증명하였고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그의 역사적 행위를 통하여 가능하였다(출애급과 가나안 점령, 예언서와 묵시사상). 신약성서에서 저자의 강조점은 약간씩 다르지만, 공통된 사실은 과거에 일어난 예수의 사건이 단순히 "Daß"가 아니라 "Was"로서 확보되고 있으면서 한계를 그리스도의 사건과 구원의 미래로부터 종말론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 그의 영광의 나타남을 뜻하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계시는 "계시하는 역사의 처음에 발생하지 않고 종말에 궁극적으로 발생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하느님은 모든 사건의 전체를 통하여서만이 그의 신성을-모든 것에 대하여 주가 되심을-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가 일어날 "모든 역사의 종말이 예수의 운명 속에서 先取로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의 운명 속에서, 그의 부활과 함께 궁극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계시된다. "모든 사건과 모든 인간의 삶의 전체와 본질이 예수로부터 결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JX의 계시는 궁극적 계시이며, 모든 역사의 사건을 하느님의 계시로 밝혀주는 근원이다.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JX의 계시로부터 계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약속과 성취의 역사 구조 - 보편사로서의 역사 - : 약속과 성취의 구조가 역사를 구성한다(신 7:8)는 것은, 역사는 하느님의 약속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약속의 성취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약속과 성취의 구조에 의하여 파악되는 역사의 폭은 구약성서의 역사기록에 있어서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묵시사상에 있어서 역사의 폭이 세계의 종말에 이르는 역사의 과정 전체에로 확대되는 것은 다음을 전제로 한다. 약속의 성취는 역사 내에서 이루어질 목표로서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전체의 종말로서 기대되고 있다는 것과, 신명기 사가에 있어서와 같이 약속은 율법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묵시사상가들은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였고, 이 구원의 역사를 보편사로 확대하였다. 이 보편사의 개념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JX는 약속의 종말론적 성취를 뜻한다. "예수의 운명 속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의 신성을 궁극적으로 증명하였고,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부활"은 "하느님의 종말론적 자기증명"을 뜻한다. 또한 JX 안에 선취된 성취, 역사의 완성은 "단지 잠정적인 성격을 가지며" 새로운 약속을 뜻한다. 또한 JX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자기증명 속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아무도 조감하거나 구명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 당시 거기에서 예수 안에 일어난 것은 우리에게 대하여 구명될 수 없는 미래이다." 그러므로 "JX의 사건, 특히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의 부활, 옛 계약의 약속의 성취는 우리에게 다시금 예수의 부활에 나타난 삶에 우리 자신이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되었다." 하느님은 JX의 운명 속에서 자기를 궁극적으로 계시하면서도 우리에게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미래는 아직도 개방되어 있고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는 여전히 새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우연성과 통일성, 새로움과 연속성의 문제 : 역사는 질적인 새로움과 새로운 미래가 인정될 때만이 가능하다. 즉 역사에 있어서 새로움이 인정될 경우 우리는 예기치 못한 것, 새로운 것, 우연적인 것의 발생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에 있어서 새로움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역사는 부인될 것이다. 우연적인 것이 일어난다고 인정할 경우, 우리는 모든 우연적인 것들의 내적 통일성 내지 연관성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의 딜레마는 역사의 전체적 통일성을 지키고자 할 때 역사의 우연성과 개방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고(딜타이, 슈펭글러, 토인비, 헤겔), 역사의 우연성과 개방성을 지키고자 할 경우 역사의 전체적 통일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케엘케고르, 고가르텐, 야스퍼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에서 이 딜레마의 해결은 하느님의 개념에 있다. 즉 하느님의 개념은 역사의 우연성과 개방성, 역사적 사건의 개체성을 보장하면서 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능케 한다. "그의 자유의 초월을 통하여 세계 속에 있는 우연적인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우연한 것의 통일성을 역사로서 확립한다. 그리하여 그 속에 있는 사건들의 우연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의 통일성 내지 연관성은 모든 우연한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에게 있다. 즉 "그들의 초월적 근원에" 있다. 그러나 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은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발전의 방법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롭고 우연적인 것이 이미 있는 것에 결합됨으로써, 즉 "소급적 결합"을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형성된다." 그러나 "하느님이 어떻게 활동하며 역사의 연속성을 어떻게 그때 그때마다 형성하는 가는 역사 자체만이 가르쳐 줄 수 있다." 근대의 역사철학들은 하느님 대신에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게하였고, 역사의 통일성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발전하는 인류의 통일성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하느님 대신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될 때 역사는 그의 통일성을 상실하고 만다. 현실을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성서적인 하느님 개념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성서의 역사이해, 성서의 약속의 신앙에서만이 현실의 역사적 경헙이 보존된다. 오늘날 이 근원이 상실됨으로 인하여 역사로서의 현실의 경험이 인간에게서 다시 사라질 위험이 나타난다." 인간의 역사성으로부터 역사를 근절시키려는 딜타이, 하이데거, 불트만의 시도는 하느님 대신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근대사조를 반영하고 있으며, 역사의 연속성을 위태롭게 함으로써 보편사를 불가능하게 할 위험을 보여주고 있다.

 

미래지향적 역사 이해 : 역사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 혹은 반복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이 일어나는 과정, 그리하여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보지못한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이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단순히 이 세계의 근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하여 자유로운 창조자로서 예기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의 창조 세계 속에 개입하여 새로운 것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신관으로 이스라엘은 현실을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선적인 과정, 곧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역사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세계의 영원한 질서나 구조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기치 못한 새로움과 함께 불러 일으키는 미래를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 이해는 고대근동의 순환적인 시간이해와 희랍의 주기적인 원형운동으로서의 역사이해와는 다르다. 이스라엘은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신적인 질서나 구조를 알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성취에 있었다.

또한 예수의 운명 속에 선취된 역사의 미래는 완전히 실혐되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존속한다. 그러나 불트만은 예수의 사건이 지니고 있는 미래의 차원을 인간의 본래성으로 돌아오기 위한 개인의 신앙적 결단으로 폐기시킨다. 불트만은 묵시문학의 종말론을 구약성서에 있어서 이질적인 요소로 보기 때문에 종말론의 미래적 차원을 신앙적 결단의 현재에로 폐기시켜 버린다. 그러나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묵시문학의 종말론과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구약성서의 역사의식과 모순되지 않는다. 예수의 인격에 대한 결단을 통해 종말의 결단이 선취된다고 하여 종말론의 미래성, 역사의 미래적 차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계시로서의 역사와 역사적-비판적 연구 :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역사는 ⑴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 미리 앞당겨 완성된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를 뜻하며, ⑵약속과 성취의 구조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⑶우연성과 개방성을 보유하는 동시에 전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진 보편사로 이해되고 있으며, ⑷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 선취된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신성의 특별한 현현과는 달리 역사의 계시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것은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사건들은 그 자체 속에 하느님을 계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자신의 언어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시를 깨닫도록 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사건들은 자연적인 눈, 곧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자기계시로 인식될 수 있다. 즉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발견하기 위해 신앙이라고 하는 특별한 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역사를 신앙이라고 하는 전제 없이 자유롭게 인식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발견하고 신앙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사건은 계시의 인식으로 "이끌어 가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서의 역사는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 연구를 통하여 그가 지닌 계시의 성격이 검증될 수 있다.

계시로서의 역사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그의 계시적 성격을 검증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동기는 다음과 같다. ⑴이 동기는 계시와 기독교 진리의 보편타당성을 회득하자는 데에 있다. 현실의 역사는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으나 계시는 이러한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계시와 그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의 진리도 보편타당성을 상실하게 한다. 그러나 계시, 곧 신앙의 근거가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고 그의 계시적 성격을 검증받을 수 있다고 할 때, 계시와 이 계기에 근거한 신앙의 진리는 보편타당성을 얻게 된다. ⑵이 동기는 신앙의 근거가 그 자체 속에 있지 않고 역사적-비판적 연구에 의하여 확실한 것으로 검증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에 있는 것임을 주장하고, 그리하여 신앙의 확실성을 확보하며 나아가서 신앙과 인식, 신앙과 이성의 대립을 극복하자는 데에 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 지식은 이성의 일이다." 이 전제의 확실성은 "신앙의 결단"을 통하여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판단"을 통하여 획득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며 초대 공동체의 케류그마는 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생성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다. 신앙을 위하여 이성이 희생될 필요가 없다. 사실에 대한 이성의 인식이 "신앙으로 대체되어서는 아된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전제이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계시의 성격은 신앙을 통하여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사건 그 자체에 있으며 그것은 "원칙상" 역사적-비판적 사건으로 검증될 수 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사건 속에 "사실상" 계시의 사건을 발견하는가, 발견하지 못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판넨베르그의 역사 이해의 문제점 : ⑴역사로서 나타나는 계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판넨베르그는 신앙이란 전제를 배제한다. 역사에서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이성에 의하여 얻는 다고하나, 어떤 역사적 사건이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신앙이다. 신앙의 확실성은 신앙이 근거하고 있는 사건 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사건의 사실성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검증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이해는 이미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⑵이스라엘의 역사와 나사렛 예수의 역사, 나아가서 세계의 역사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로 검증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의 역사적 검증이란 이성 자신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만일 역사가 가진 계시의 성격이 이성의 역사적-비판적 연구에 의하여 검증된다면 계시로서의 역사는 결국 이성의 지배 하래 있게 될 것이고 더 이상 구원의 사건을 뜻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신앙이 "나의 밖애 있는" 진리에 근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앙이 신앙 이전에 주어진 지식을 통하여 근거되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인정될 수 없다. "신앙만이 하느님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으며, 신앙만이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하며,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신앙을 일으킨다."(윙엘)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성과 능력 없이는 신앙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 없이 우리 자신의 이성과 능력으로 이 신앙의 근거를 인식할 수 없다. 이 인식은 신앙의 내용으로부터만 근거될 수 있고, 그럼에도 신앙의 내용은 신앙을 근거시키는 나의 밖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신앙은 그의 '내용' 또는 '대상'의 인식에 있어서 중단될 수 없다. ⑶판넨베르그 자신이 말하듯이 역사적-비판적 연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물의 유사성 내지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을 그의 원리로 삼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 JX의 역사와 일반 세계사는 상호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은 JX 안에만 계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하느님이 누군지는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부터 비로소 말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하느님의 본질은 오히려 JX 없이도 생각될 수 있지 않은다 ? ⑷판넨베르그의 이론 전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의 논리적 모순을 발견한다. 그는 역사가 지닌 계시의 성격은 역사적-비판적 연구를 통하여 인식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인식될 수 없다고 말한다. JX의 사건이 절대적 계시라는 확실성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말하면서 또한 신앙하는 자의 "신뢰"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모든 인식은 보편타당성을 얻기 위하여 역사적-비판적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한 인간이 자기의 이성과 능력을 가지고 얻을 수 없는 인식이 있다고, 즉 하느님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진리"는 "자명하며" "자명한 것으로 기술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개연성"을 말한다. ⑸그에 의하면 역사의 모든 사건은 "하느님의 역사적 행위"이며 하느님의 간접적 자기계시이다. 그렇다면 악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 그리고 역사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역사적 행위요, 간접적 자기계시라고 말할 경우 역사의 모든 것은 신적인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⑹그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역사의 새로운과 미래성 그리고 역사의 참된 개방성이 랦정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몰트만) 역사 전체의 완성이 예수의 운명 속에 미리 앞당겨 일어났다면, 그리고 JX의 계시가 역사 전체가 지닌 계시의성격의 선취를 뜻한다면, 역사는 예수의 "운명" 속에 미리 앞당겨 일어난 것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근본적으로 새로운과 미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개방된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폐쇄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미래는 현존하는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미래가 아니라 현실 속에 내재하고 있는 미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종말론적인 새로움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반복을 약속할 뿐이다. 따라서 약속을 뜻하는 하느님의 계시는 바로 이 세계의 역사 자체를 뜻하며 이 역사 자체를 정당화 내지 신격화시켜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가진 그의 역사이해는 이 세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해석에 불과하며 JX의 계시로부터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어렵다. 그의 역사신학은 희랍철학의 우주론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몰트만)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부인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계시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희랍철학의 로고스적인 구조로 해명하는 것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 약속의 성격과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있지 않다.

희망의 신학 --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역사와 사회에 관심을 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미래와 희망에 초점을 두는데, 미래의 약속에 대한 희망이 신학의 토대와 출발점이다.

 

몰트만(1926-) : 오늘의 과학 기술 문명의 내적 동인인 진보신앙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세계대전, 산업을 통하여 착취되었고 파괴된 자연의 생태학적 위기로 말미암아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학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의 내면적 자기 경험의 문제, 인간의 주체성의 문제에만 관련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에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정치신학이 형성되었다.

 

종말론 : 신약성서(막 1:15; 눅 11:20)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계의 종말은 이미 왔다. 예수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고, 이것을 선포한 예수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태동되어 있음을 사람들은 보았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분이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으로 종말론은 가시 세계의 마지막에 일어날 초자연적인 신비한 일들을 다루는 이론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반하여 몰트만은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철저히 종말론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종말론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을 그 주요 성격으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을 뜻하는 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게계 전체 속에서 실현되기 시작한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종말은 자기의 주어진 상태 속에서 자기를 절대화시키려는 본성을 가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역사화시키는 추진력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인간의 세계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모든 기독교적인 선포와 모든 기독교적인 실존과 모든 교회의 서역은 종말론적인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미래의 문제"인데, 이미 주어진 세계로부터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 즉 성서에 나타나는 "다른 것"은 "새로운 것"의 약속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희망의 신학 : "약속의 선취자" 내지 "약속의 선행"을 뜻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세계 속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오신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의 삶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주가 되셔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리하여 더 이산 "죽음이 없고 슬픔도 부르짖음도 고통衁도 없을" 하나님의 미래가 앞당겨져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미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것은 미래에 완성될 약속으로서 세계사의 목표가 된다. 이 하나님의 나라(현실)을 희망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예수의 부활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하늘의 영원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십자가가 서 있는 땅의 미래를 인식한다. 그분 안에 인간은 바로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친 그 인간성의 미래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그에게는 이 땅의 희망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인간과 그의 세계로 하여금 주어진 현재 상태에 정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세계를 지향하여 그 자신을 언제나 새롭게 변화시키고 개혁시켜 나가도록 하는 내적인 힘이다. 즉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역사의 추진력이요 원동기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역사의 의미가 성취되는 도상에 있으며 성령의 역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미래의 시작이요, 도래"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선포는 "말씀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미래가 이미 도래함"을 뜻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이미 희망의 표징"이다.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성령과 새로운 창조의 계시"이다.

 

정치신학 : 전통적으로 신학이나 철학은 이 세계가 무엇인가를 단지 해석하기만 하였다. 이에 반하여 몰트만은 기독교 신학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그의 현 상태에서 정지하거나 절대화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세계로, 하나님의 현실로 변화되고 전진하는 세계가 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그 세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한 마디로 말하여 인간답게 살 수 있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가는 세계가 되도록하는 것이 정치신학의 근본 취지이다. 여기에서는 세계의 모든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 비판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요소를 그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제거함으로써 보다 더 인간적인 세계, 하나님의 현실에 가까운 세계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비인간적인 요소에 대한 부정적인 자세를 뜻한다. 기독교는 그 세계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자기의 동일성을 상실하기보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 자신을 언제나 구분하고, 인간의 세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참된" 발전을 가능케 하고자 한다. 이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어떤 질서에 대한 우상숭배도 배격하며, 모든 질서에 있어서 인간의 건전한 자유와 의와 인간성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해방을 요구하므로, 몰트만의 정치신학은 "해방의 신학"이다. 여기에서 해방은 경제적 차원, 정치적 차원, 인종적 문화적 소외의 악순환으로부터의 해방, 자연세계의 해방, 삶의 무의미성과 하나님의 버림받은 상태의 악순환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그의 정치신학은 서구의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에게 넘어간 기독교 본래의 유토피아니즘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다스리는 밝은 세계를 이 땅 위에 실현하자는 기독교의 사회적인 의식의 발현이다. 이때에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 아니라 민중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하여 노력하는 "민중의 기쁜 소식"이다.

맑스의 종교이론

1. Marx 종교이론의 이해와 비판을 위한 전제 : ① 상황의 이해 : Marx - Marxism - USSR ==> Jesus - X-ity - Church ② Marx의 관심 : 사회경제적 변혁,종교의 역할과 기능,종교의 본질,생성,미래 ③ Marx의 종교비판의 의미 : "선행조건", "이론 투쟁의 장", 모든 비판(지상의 권리,신학,정치)의 전제 -- 종교를 철학적으로 비판, 종교와 철학을 정치적으로 비판, 종교·철학·정치·이데올로기를 경제적으로 비판(K. Löwith)

2. 종교의 본질 : ① "신은 인간의 영상이고 투사이며, 종교는 인간의 생산품이고 인간의 소외이다.", "종교가 발생되는 방법과 발생의 조건을 구분할 수 있는 한, 사회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종교적 신념의 내용은 소외된 인간의 자아 의식과 상상력의 자발적인 행위에 의해 투사된다고 말할 수 있다." ② 투사된 종교적 신념의 성격 -- 물적 생활 과정의 승화물, 형이상학·윤리·법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의 한 요소, 의식의 영역에 한정된 소외의 파생적 원천, 사회 형태에 의해서 결정되는 반영물 또는 일련의 반영물들, 불합리, 물적 생산 단계에 기반을 둔 긴요하지 않은 것

3. 종교와 사회적 소외(발생) : ① 노동의 분화가 이루어져 있는 실제적인 물적 행위는 사회경제적 모순과 소외 상태를 야기시키며, 이 양자는 '전도된 세계 의식인 종교'가 발생하고 유지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 조건은 충분 조건이지 필요 조건이 아니다. --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고 냉혹한 세계의 감정이며, 영혼이 없는 조건들의 영혼이다." ② 자연 종교는 자연의 위력에 대한 동물적인 반응이며, 사회적 종교(신학)은 사회 경제적 삶의 모순에 대한 의식의 반영이다. ③ 종교와 경제 비판 : 신과 화폐의 형이상학적 공통성

순수하게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인간의 노동과 삶의 소외된 본질으로서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이를 숭배한다. 종교와 부는 "인간 객체화의 소외된 세계"에 불과하다. "금속화폐의 물신적 숭배자들"은 인간의 노예 상태의 절정이다. 개념에 한정되어 있고, 소외의 상태에서 투사된 이러한 힘들이 신앙에 의해서 실체화되어 인간의 지위를 하락시키고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것이 바로 신이다. ④ 종교의 소멸 : 종교·법률사회·질서·정치에 대한 비판 ==> 혁명적 실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인간이 인간을 위한 최고의 존재라는 가르침으로 끝을 맺고 따라서 인간을 격하하고, 예속시키며, 고립하고, 비열한 존재로 만드는 모든 관계를 전복하라는 절대적 명령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분업과 사유 재산을 폐지하는 혁명으로 정치·경제·사회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을 이루면 지배 계급의 억압 수단이던 국가와 인간의 소망의 투사인 종교는 사라질 것이다.

4. 종교의 사회적 기능 -- Marx의 종교에 대한 비판과 증오의 근원 : ① 자발적 기능 : 피착취적 욕구에 부합한다.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위안적 기능(민중의 아편, 종교의 자기기만) ② 조작적 기능 : 사회 도덕과 가치를 정당화하는 裁可的 기능(계급 사회에서 위선적이고 보수적 기능) -- 가장 근본적이고 "정적인" 단계의 도덕은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의 산물이 아니고, 단지 해당 인간 사회가 전통적으로 인정한 관습이나 습속의 총체에 불과하다. 제도화된 종교의 위선,착취,사기적인 성격 ③ 반영적 기능 : 사회의 하부 구조가 이데올로기에 반영되는 과정을 드러내 주는 기능 - 지배계급의 이익이 허구적 개념으로 둔갑하고 경제적인 갈등이 이데올로기적 투쟁으로 다시 나타난다. ④ 소외시키는 기능- 종교가 실제적인 고통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고통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 지적 기능- 종교가 "이 세계의 일반화된 이론, 그것의 전반적인 개요", 그리고 "그것의 신성한 보완물"이라는 점.

기독교와 맑시즘과의 관계

연구방법 서설 :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우리 자신이 현재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따라 결정되 듯이, 맑스의 사유는 발전하고 변화하는 사유이며 모순없는 세계를 염두에 둔 사유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현실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는 사유이다. 따라서 맑스의 원전을 떠날때는 그의 사상의 주조음을 놓치지 않토록 주의해야 한다.

실천적 의도에서 제시된 철학으로서의 맑스주의 : 맑스에게 있어서 유물론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에 의해 형성되는 현실적 실재를 강조하는 것, 따라서 자연을 강조하고 인간의 노동과 인간의 노동조직을 통해 표현되는 인간의 생명활동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철학의 체계 곧 체계로 귀착되는 철학은 이러한 유물론에 의해 폭파되므로 사유와 이론은 단절을 겪으면서 경험과 감각적 직관과 실천적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한다. 비판적 유물론의 사상적 구조는 유한한 인간의 사상적 구조이며, 이러한 사상적 구조는 사회의 역사적 과제들로부터 생장한다. 비판적 유물론은 불투명한 경제적 결정론의 빈틈없는 창살로부터 인간을 탈출시키고자 한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와 헤겔의 비역사적이고 관념적인 자연과 인간 이해를 비판하면서, 활동적이고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되는 외적인 자연과 실천을 통해 표현되는 인간의 자연을 말한다. 인간과 인간의 노동,자연과 그 질료를 철학의 주제로 삼고, 역사는 인간의 실처과 결합되어 있고 인간은 실천을 통해 의미 자체를 산출하고 인간 자신이 역사를 의도적으로 형성한 정도에 따라 의미를 인식한다고 한다.

맑스의 '비동일성의 이론'이라는 철저히 상황적인 철학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고난에 나타난 '비동일성의 종교'에서는 궁극적이고 먼 미래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 일상적인 염려나 문제라는 장에서 대화와 행위를 통한 활동을 볼 수 있다. 즉 예수와 맑스의 활동은 모두 사회경제적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접근을 통해 현실을 지배하려는 맑스의 시도는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다루는 예수의 태도보다 훨씬 엄격하고 오만하다.

 

과학적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과학적 사회분석의 결론이며, 공산주의는 기존의 상황에서 운동의 계기를확보하면서 기존의 상황을 지양하는 현실적 운동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공상적 유토피아의 지향을 비판하고 현실과 과학을 강조한다. 에른스트 블로호가 맑스주의 속에 흐르는 한류라고 말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혁명적 관점에서 현실의 조건들을 매우 엄밀하게 파악하고 현실의 원리를 엄격하게 가르치는 태도를 의미한다. 한류는 도덕적 충동이나 양심적 동정인 난류와 서로 합쳐짐으로써 비로소 맑스주의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혁명을 의도하는 정밀한 환상과 과학적 현실 분석이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에제"의 핵심개념은 "실천"이다. 의식이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의식을 규정한다. 이념 자체는 사회적인 산물이고, 인간의 실천적인 감각적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관습과 자연과 타인에 의해 제약된 개인의 실천이 역사의 과정으로 나아가려면 개인적 실천이 매개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역사성과 변혁가능성을 드러내는 실천은 모든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사회적 실천과 그 결과가 진리의 규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진리를 실현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경우에도 진리의 이념을 강조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 ? 인간은 역사의 창조자로서 하느님으 동역자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향해 부르짖음으로써 죄(정치적으로 사회심리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할)와 죄의 노예상태를 깨닫는다.

 

경제의 우위성 : 인간의 자기소외 일반 - 인간의 정치적 자기소외 - 경제적 자기소외 :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토대이며,국가제도와 법체계와 이데올로기의 영역은 상부구조로서 이 토대에 속한다. 즉 사회적인 의식형태들은 이 토대에 조응하고, 물질적인 생산양식은 사회적 삶의 사회적,정치적,정신적 과정을 제약한다. "경제"는 물질적 재화의 생산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산이 일어나는 사회적 관계들의 창조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경제적 요인 의 전면적 지배로부터의 인간 해방은 이미 주어져 있는 여러가지 조건들을 전제하고 있는 공산주의적 경제를 토대로 할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이러한 경제의 우위성은 경제적 결핍의 상황에 근거를 두고, 인간이 자기의 노동을 새롭게 지배하고 생산과 분배를 공동으로 계획할 때 비로소 사라진다. 초대 교회의 분배공산주의와 바닥공동체의 정치의식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경제적 우위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간의 빈곤 곧 인간의 구체적 삶의상황은 예수와 초대 공동체에 있어서는 항상 말과 행동의 출발점이자 연결점이었다.

 

노동의 개념 : 성서에서 노동은 낙원에 속하는 것, 인간이 살아가는 동산을 경작하고 보존하는 것이며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 철학적으로는 인간의 주체적 자기 표현으로서의 노동, 사회적 관계로서의 노동, 자연과의 대결로서의 노동을 말할 수 있다. 노동은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의 특징이지만, 노예노동,농노노동,임금노동으로서의 노동은 노동자의 인격을 떨어뜨리고 인간 노동을 왜곡해 왔다. 자본가는 노동수단과 그가 구입한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노동을 착취하고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계약체결을 위한 자유와 자신의 생존보존을 위한 수단들로부터의 자유를 빼긴다. 노동은 자본을 창조하고 자본의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기 자신을 임금노동의 형태로 창조하게 된다.

 

해방의 프로젝트 :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모순들을 가진 자본주의가 폭력에 의해 성립되었던 것처럼, 자본관계도 폭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폭력에 의해 공중으로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사회경제적 위기들은 혁명적 폭력의 출발점이요,그 지렛대이다. 개혁을 위한 투쟁의 종국적 목표는 철저한 변혁 곧 혁명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옹호하는 부르조아적 독재에 대신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시적으로 지배한다. 그러나 현재는 인민에 의해 쟁취된 "혁명들"은 쉽사리 인밍에 대한 관료적 독재로 변질되었다. 소위 사회주의 국가에서 맑스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의 교조적 상부구조로 간주되고 있으며, 사회주의적 이념들은 신뢰성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맑스의 종교비판에 대하여 : 포이에르바하에게서 신으로서의 신은 인간적 완전성의 총괄개념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에게 소비한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경의와 사랑을 통해 마땅히 돌려져야 한다. 맑스는 종교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기능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 세계의 현실적 변혁을 통해서만 가난한 자들에게 종교가 불필요해질 수 있을 뿐이고 종교를 단순히 관념적으로 지적으로 파괴하기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해방적 활동을 통해 인간이 더이상 소박하게 생각하지 않고(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타율적 지배 = 신에 의존하지 않고) 공동체적으로 사유하고 계획할 때, 비로소 종교를 통해 반영되는 타율적 권력은 소멸될 것이며, 이와 더불어 종교적 반영물 자체도 소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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