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프락시스로서의 신학

好學 2011. 12. 13. 20:47


프락시스로서의 신학


 

머릿말 : '신학한다는 것'의 뜻

1. 프락시스로서의 신학

신학도 엄밀한 의미에서 學이기 때문에 우선 신학의 기초적인 '개념'이나 '명제'의 의미를 밝히고, 이 개념이나 명제를 통해서 체계화된 신학의 이론을 깊이 이해하고, 그 이론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탐구하는 일 등이 신학을 연구하는 일에 속한다.

신학의 특수성 ; 신학의 실천성, 또는 행동성에 有. ⇒ 이론과 실천, 사고와 행동은 따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일이다. 이는 당위라기 보다 이는 사람의 삶에 있어서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 하나의 실재의 두 얼굴이다.

소크라테스는 앎과 함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참 '앎'은 실천과 행동을 동반하는 앎이다. 참으로 알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천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처럼 실천화, 행동화 된 지식을 희랍 사람들은 '소피아'라고 불렀다.(phio-sophos,愛智者) ⇒ 참 앎의 행동화, 그것이 프락시스이다.

* 신학에서도 同. ⇒ 이 때 '신학한다'라고 한다.

특히 신학이 지향하고 있는 이론이 , 사람을 구원을 실현하기 위한 이론이라면 / 그리고 신학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론적인 바탕을 정립하려는 지적인 활동이라면 , 인간의 구원이 사람의 삶 전체에 걸쳐있는 이상, 신학은 당연히 구원을 구체화 하는 그 실천성에 우위를 두게 마련이다.

⇒ '신학하는 것', '온 몸의 증언', '행동언어'(사건을 일으키는 언어)

* 오늘의 언어철학은 말이 일으키는 행동성, 사건성까지 주목해야 한다. 언어의 '놀이'는 행동언어, 사건언어로까지 넓혀져야 한다.

* "최초에 말(logos)이 있었다." = "맨 처음에 행동이 있었다."

* 'doing theology' ; 행동으로 '신학을 하는 것'


 

2. 신학이 지니는 오늘의 의미

'신학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진리, 그것의 신학적 개념이나 명제가 '지금'. '여기에'살고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의미의 물음'을 묻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 '크리스챤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가져옴. 이는 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간직해왔던 본질과 그 이념을 오늘의 세계에서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 몰트만 "그리스도교의 동일성과 관련성의 딜렘머"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교가 그 자체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오늘이 안고 있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직접 연관을 맺을 수 있겠는가 하는 데로 모아진다.


 

첫째장 신학의 의미와 그 기능 *******************

1. 신학의 본질과 그 기능

본질이란 어떤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하나의 본으로서, 우리가 설정한 것, 또는 전제나 가정으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질규정으로서의 정의는 그 대상을 바로 인식하려고 하는 하나의 '길잡이'가 된다. ⇒ 그러나 이것을 절대시 해서는 안된다. 정의는 동적인 실재, 만들어져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존재에는 적용될 수 없다. ⇒ 신학이 더욱 그러하다. 어떤 신학이라도 '하나의 신학'(a theology)이지, 신학 그 자체(the theology)는 아니다. 정의란 상대적인 것이다.

신학은 두 요소 즉, ①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진리를 진술하는 일과 ②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모든 새 세대를 위해서 해석하는 일, 을 충족시켜야 한다. 여기의 작업은 신학이 곧 선포는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신학에 있어서는 신앙이 '사고'에 종속된다. 그런데 사고는 합리성과 비판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둘째장 신학과 철학 ************

1. 참 신학과 신학적 존재

신학의 선험성

신학자와 신앙

신학의 두 가지 기준

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

2.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

신학과 철학의 공통성

신학과 철학의 차이

3. 맺는 말

셋째장 믿음에 관하여

1. 믿음의 갖가지 의미

① 구약 :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을 향한 믿음 침멀리 ; "야훼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응답"

② 신약 ; 신뢰하는 것(예수), 믿는 내용을 진리로서 받는 것(요한), 확신과 깨달음.

③ 변증가 ; 사상적 동화 일어남.

④ 고대신학 ; 신뢰로서의 믿음 ⇒ 교회의 권위를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믿음'

⑤ 종교개혁 ; 인격적 신뢰로서의 믿음을 새롭게 함.

⑥ 정통주의 ; 철학은 신앙과 일치하며, 철학이 우리를 신인식에로 인도한다.

앎 ⇒ 승인 ⇒ 신뢰

⑦ 전통주의 ; 객관적 믿음(일반적 신앙)과 주체적 신앙(특수적 신앙)을 구별.

앎의 단계를 중시함. 그러나 믿음에는 신뢰로서의 믿음이 우선한다.

⑧ 경건주의 ; 정통주의의 객관적 신앙을 반대하고 주관적 신앙을 강조한다.

⑨ 계몽주의 ; 외적인 권위와 싸우면서 믿음을 자기 책임에 따른 이성의 내적 권위와 조화시키려고 했다. '자율적 인간' ; 역사적 비판을 주장.

⑩ 관념론 신학 ; 주체적 신앙 / 믿음을 '감정'이나 내면성의 영역으로 돌린다.

쉴라이에르마허

* 키에르케고르 ; 기독교는 '교리의 집성'이 아니고 오히려 '역설'이며, 객관적 진리가 아니고 오히려 실존의 '내면성'이다. 실존은 체계를 거부한다.

2. 믿음은 신뢰인가, 앎인가

참 믿음은 주체적 신앙인 동시에 객관적 신앙이어야 한다.

① 초기의 바르트는 믿음을 비 합리적인 것에의 비약이라고 했지만 , 후기 바르트는 믿음을 승인, 인식, 고백으로 이해한다.

② 불트만은 권위에 의존하는 믿음에도 반대하지만 이성으로 증명하려는 믿음에도 반대한다. ⇒ 신앙은 '이해'이며, 동시에 신존적 '결단'이다. 믿음의 '증명불가능성'. 그것이 믿음의 강점이다.

③ 에벨링은 불트만 처럼 맹목적 신앙에 반대한다. 믿음은 이성의 성실성, 현실에 대한 열린 눈을 구한다.

④ 실존신학이 객관적 신앙보다 주체적 신앙을 강조한데 대해서 판넨베르그는 믿음을 역사적 사실과 관련시킨다. "계시란 역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두 열려 있다." 신앙은 근거 있는 모험이다. 이것은 객관적 신앙이 실존에 대해서도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⑤ 그러나 조건이 따르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명제가 타당성을 갖는다. ⇒ 하나님의 품 안으로의 비약이다.

3. 신앙과 사고 ⇒ 신앙과 학문의 문제

① 초기의 바르트 ; 친근성 혹은 적대성 無. ⇒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는 수직적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② 상관관계 ; 알트하우스, 부룬너, 본훼퍼, 불트만, 틸리히, 트뢸취

③ 트릴하스 ; "하나님은 세계와 관계하며, 세계 안에 들어 왔다."는 것이다. 참 메시지는 앞에서 인간적으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인간에게 대화의 자세로 닥아온다.

신학에 있어서 철학적 전이해는 철학의 이데올로기화의 문제에 앞서서 불가피한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이 신학에 대해서 물음이 아니고 대답이 될 때, 철학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은 철학의 이데올로기화는 신학을 지나치게 이성화 하고, 역사화 하고, 사회화 하는 데서 일어나기 쉽다.

'소유격의 신학'도 한 쪽 만을 강조한 나머지 자칫 철학을 이데올로기화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4. 맺는 말

믿음에는 객관적인 쪽과 주체적인 쪽이 있으며, 일반적인 쪽과 특수적인 쪽이 있다. 믿음은 앎이며 신뢰이다.

믿음은 모험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고 근거 있는 모험이다. 곧 이성 있는 신뢰이다.

신학과 현대 사상은 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이성의 비판은 궁극적으로 이성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한 중심'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중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자기 표현인 그리스도 사건이다. 세계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창조자가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수직주의나 수평주의를 다 거부한다.

 

넷째장 성서에 관하여

1. 성서의 핵심

성서를 가리켜 '하느님의 말씀'이라거나 '계시의 사건'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한 권의 책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메시지는 책으로서의 성서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의 기초적인 자료는 성서이다. 그것은 성서가 인간의 구원사건에 대한 증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 성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 이것의 증언이 성서.

여기에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사건의 말 곧 행동언어를 가리킨다. 주의할 점은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이 말씀은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 문서의 형태를 입음. ⇒ 정경화 㟔 성서만.

2. 성서의 권위

① 고대에서는 '영감설'에 의해서 지켜짐. 그런가하면 성서에 대한 비유적인 해석이 문제가 되었다.

② 종교개혁에서는 성서의 비유적인 해석을 반대하고, 글자 그대로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루터에게는 성서가 "유일한 여왕"이 됨. 성서는 그 자체에 의해서 믿어지며, 성서 자체가 그의 명백한 해석자이다. 성서 자체의 시금석은 성서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느냐, or not 에 有. 전승은 성서에 위반되지 않는 한에서 유효하다.

③ 정통주의 ;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축자 영감설' : 말이나 글에 영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 저자의 의식이나 자유의지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것이 성서를 비역사화 한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은 성서를 평면화시켜서 그 깊이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약점이 有.

④ 근대 프로테스탄티즘 ; 영감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역사적인 책으로 다루고, 역사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이들은 성서의 규범적인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 신앙이 성서보다 우위에 있다. 이것은 신앙의 의식을 신학의 인식원리로 삼는 입장이다.

* 문제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참된 핵심이 무엇이냐에 있다.

3.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

4. 성서의 통일성

5. 구약성서의 권위

6. '성서만이'의 원리

7. 정경의 문제

8. 성서비평의 정당성과 한계성

9. 끝맺음

하느님의 말씀은 성서보다 크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에서 제 1형태를 취하고, 그것이 설교에서 제 3형태를 취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제 2형태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이 제 2형태(성서)에서만이 제 1형태 안에서(in), 제 3형태를 위해서(for) 인식된다. 성서는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사건과 행위라고 하는 기본적인 선교(케리그마) 속에서 통일된 중심성을 가진다. 따라서 성서에는 재어진 규범에 대한 재는 규범의 관계가 성립한다. 전경성의 기준은 '그리스도' 중심성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구원사, 해방사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성서는 끊임없이 물어야 할 책이다. 묻는 사람의 관심이 전재되지 않는 성서해석은 없다. 물음의 관심이 묻는 사람의 삶과 절실하게 밀착될수록, 거기에서 얻은 대답은 그만큼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다섯째장 계시에 관하여

1. 계시의 의미와 그 전개

'계시한다'는 말은 '이제까지 가리워져 있는 것을 밝히 드러낸다'는 뜻.

계시의 주체 ; 하느님. 내용 ;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에서 보여준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 하느님은 역사적인 분이어서 이 역사에서 사람과 함께 걷는다. 그런데 경전이 결정되면서 계시는 시간적으로 한정되었다.

① 터툴리아누스 ; 철학과 신학은 관계 無.

② 유스티누스 ;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인니다. 그는 교회와 세속사를 하나로 보았다. 일반역사가 곧 계시다. 이 일치성을 로고스에서 봄.

* 이처럼 배타적인 계시와 포괄적인 계시, 사변적 계시와 구원사적 계시가 서로 엇갈리면서 중재신학을 엮어왔다.

③ 루터의 계시 이해는 실존적 특성을 가진다. 자연적 신인식을 , 신의 본래적인 구원 인식과 구별한다. 계시는 율법(비본래적인 일)과 복음(본래적인 일)이란 이중의 형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루터 신학의 기조이다.

④ 정통주의 ; 일반적인 계시(자연적인 계시)

초자연적인 계시(말씀에 의한) ⇒ ㉠ 성서 저자의 직접계시 ㉡ 성서를

통한 간접계시

* '하느님이 그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독일 관겸론)과 '하느님은 어떤 일을 가르치려고 계시한다는 것'(계몽주의)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有. ⇒ 사실 이 둘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계몽주의에서는 일반계시가 특수계시의 규범이 되어서, 특수계시는 자연계시로 히소되거나 대치된다. 그런가 하면 , 관념론적 신학에서는 간접적 계시는 종교적 체험의 직접적 계시로 변질시키는 경향이 있다.

⑤ 쉴라이에르마허 ; 계몽주의의 합리주의나 도덕주의에 맞서서 '감정'의 영역에서 종교를 설명한다. 계시란 우주를 근원적이고 새롭게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전통적 의미의 계시가 폐기된다. 계시는 외적 행위가 아니고 내적 행위이다.

⑥ 트뢸취 ; 사람에게는 선천적인 종교성이 있기 때문에 계시를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다.

2. 계시의 인식

3. 계시의 진전성과 폐쇄성

4. 계시의 일원성과 이원성

5. 계시의 포괄성과 배타성

6. 역사로서의 계시

7. 맺는 말

 

여섯째장 하느님에 관하여 *********

1. 머리말

2.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

3. 하느민의 본질과 속성

4.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

5. 삼위 일체론과 현대적 표현

6. 무신론의 의미

7. 성서의 하느님

 

일곱째장 창조에 관하여 **********

1. 창조의 이론

2. 신과 세계

3. 세속화와 세속주의

4. 창조와 섭리

5. 창조와 악의 문제

6. 창조와 구원

7. 창조와 기적

8. 맺는 말

 

여덟째장 사람에 관하여 *********

1. 사람은 하느님의 피조물인가

2. 사람의 유한성

3. 사람의 창조질서

4. 사람의 '하느님 형상'

5.'신의 형상'의 현대적 의미

 

아홉째장 죄에 관하여 ******

1. 죄에 대한 물음

2. 죄의 본질과 인식

3. 원죄의 문제성

4. 현대인과 악

5. 악과 오늘의 가치변화

6. 끝맺음

 

열째장 그리스도에 관하여 ***********

1.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적 물음

2.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냐,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냐

3.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는 '나 밖에서'냐, '나를 위해서'냐

4. 십자가와 부활

5. 충족이론의 문제

6. '빈무덤'의 의미

7. 역사의 예수 문제

8. 끝맺음

 

열한째장 구원의 은혜에 관하여 ****

1. 물음의 전개

2. 구원의 일원성과 이원성

3. 개인구원과 우주적 구원

4. 구원의 은혜와 자유

5. 믿음과 행위

6. 인의와 의화

7. 끝맺음

 

열두째장 교회에 관하여 ******

1. 교회 이해의 전개

2. 참된 교회의 지표

3.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4. 현재적 교회와 잠재적 교회

5. 교회와 국가

6. 교회의 사명

7. 교회의 성례전

8. 간출임

 

열세째장 '마지막 일'에 관하여

1. 종말의 의미 개관

2. 현재적 종말이냐, 미래적 종말이냐

3. 역사적 종말론과 초역사적 종말론

4. 영혼의 불사성과 몸의 부활

5. 죽음

6. 현대 사람과 종말 의식

7. 간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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