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한국신학

好學 2011. 12. 13. 20:33


한국신학


 

A. 한국신학 부재기

1780년대에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되고 그보다 100년 뒤인 1880년대에는 한국에 개신교회가 비롯되기 시작했으나 말 그대로 신학활동이 시작된 것은 1900년대 이후로 볼 수 있다. 그 동안의 과정은 선교의 시작 단계로 그 자체적 교세확립에 급급하였고 다만 한국 전통사상과의 갈등만 일부 노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부재의 시기는 비교적 길어, 보다 체계적이고 바람직한 선교 정착의 어려움도 엿보였다. 거기에는 그만한 배경과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구한국의 망국(1910)을 전후한 일대 혼란기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새로운 종교(기독교)에 대해 학문적인 반성을 할 만한 여유도 없었고 또 그만한 문화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둘째로는 선교정책의 영향이라 하겠다. 초대 선교사들이 채택한 선교정책은 (1) 부녀자와 노동대중을 선교대상으로 하고, (2) 초등교육사업에 치중하며, (3) 한국교회의 자치적인 전도사업을 조장한다는 것이 그 골자로 되어 있다. 여기에 한국교회가 지닌 기본성격이 있다. 당시 불안한 부녀자와 대중을 상대로 한 선교활동에서 한국교회는 쉽게 양적인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한국교회는 무력한 대중 속에서 맴돌지 않을 수 - 었다는 약점을 동반했다. 더구나 고등교육을 등한시한 문화정책은 지도자 양성에 결함을 가져왔다.

세째로, 교역자 양성을 신학교육 정책의 결함이다. "한국교회에 알맞는 한국 교역자 양성" 이라는 목표 아래 대중교회에 필요한 최저의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정책이었다. 장로교는 1901년, 감리교는 1907년에 각각 신학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1년에 3개월씩 훈련받게 하는 일종의 성경학원에 불과하였다.

끝으로 지적할 점은 초대 선교사들의 신앙양태이다. 그들의 신앙양태는 청교도적 경건주의 신학이다. 장로사 선교사인 언더우드의 신앙형태는 성령 운동을 강조하는 성령파로서 성령강림, 회심, 구원, 위로 등을 설교와 부흥 집회에서 강하게 설교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끼쳤다.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은 기독교의 본질을 복음주의적이며 신앙중심적인 신앙과 신학으로 형성케 하였다. 순수한 그리스도 중심의 단순한 신앙을 초기부터 강조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신앙유형 형성에 한몫을 하였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로의 신학 역시 언더우드와 비슷한 점이 많다. 아펜젤로의 복음이해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이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은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적용되며 효능이 있다는 지론이다. 그런데 아펜젤로가 말하는 복음의 능력은 사죄에 대한 확신과 감격에서 온다고 보고있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 문화에 대하여 너무나 무감각하였고 이런 무감각이 전체적으로 서구문화의 동양문화에 대한 표면적 우월감을 극복하지 못한 듯 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뒤를 이은 후배 선교사들에게 같은 우월감이 전승되어진 것 같다.

선교사들의 신학인 경건주의는 순수한 신앙을 중추로 하고 세속에 무관하며 서구의 교회가 국가적 교회적 공동체적인 개념을 갖는 반면에 개인주의적 신비주의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 초기 선교사들은 부흥회적인 선교사들로서 신학의 빈곤, 사회관심 부재의 영혼 구원과 정치적 무관심과 정숙주의 신앙을 가진자들이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사고는 한국의 대중과 가까이 있던 무교적인 신비주의와 묘한 일치를 이루어 타개주의적 개인구원의 면에 치우치게 되었다. 물론 현실을 개혁하려는 신앙운동도 함께 있지만 절망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적인 영혼 구원에 치중한 보수적인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B. 한국신학의 태동기(1900-1927)

 

1. 일반적 배경

a. 정치,사회적 배경

일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묵인 또는 협조하에 1905년 을사 5조약을 강제 체

결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한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그리고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을 "보호국화"하여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는 한

편, 한국인의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8월 한일합방

조약을 강요하여 완전병탄함으로써 총독부와 헌병 경찰제의 무단통치에 의

한 직접적인 식민지 경영에 착수하였다.

이 무단정치는 한국인의 모든 자유와 권리가 박탁되어 참으로 견디기 어

려운 가혹한 것이었으나 이러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하고 조

직화 되어 갔다. 일제의 주권침탈과 무력적 강점으로 인해 형성된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전민족이 독립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항일 독립운동

인 3.1운동을 일으켰으며, 이에 기독교도 참여하였다.

3.1운동은 1920 - 1930년대 한국기독교의 신앙양태에 중대한 영향을 깨쳤

으나 신앙양태는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등 주로 부흥운동가에 의해 주된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과 일제의 한국지배라는 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현

실적 시도로 나타난 현실적 계몽주의 신앙운동의 형태로 나타내기도 했다.

b. 문화적 배경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한국의 전통적 종교의 영향 아래서 형성되었다. 한국

을 지배해 온 정신문화는 원시 부족사회의 샤머니즘, 고대와 중세의 불교,

근세의 유교, 서학, 실학, 동학사상으로 나타났다. 특히 4300년의 지배해

왔기 때문에 100년 밖에 않되는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안에 스며든 것은

불가피한 사정이었다.

그리하여 민속신앙이 가져다 준 현세 기복주의가 보수적 기독교에 신앙이

가져다준 타개주의와 결합하여 혼합주의의 성격을 띄게 되어고 유교형식주

의와 결합한 보수주의 신앙은 교회적 관료주의로 변했다. 유교적 윤리사상

은 기독교 진보주의와 결합하여 복음을 윤리화시켰으며 불교적 은둔주의는

보수적 기독교와 결합하여 타개주의 내지 현실 부정주의 성향을 지니게 되

었다.


 

2.신학적 배경


 

a.1907년 대부흥운동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교세성장이 지속되었고 이에 따라 신학적 인식과 논의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의 기도와 한국의 일어난 부흥은 1903년 원산 기도회에서 그 진원지가 되어, 1907년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 건설기에 기반을 다진 일대 종교적 각성이였다. 이 운동은 성령의 역사 이며 선교사들 선교열정 에서 일어나 길선주 목사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일어난 운동으로서 순수한 영적 도덕적 운동이며 한편으로는 비정치화의 시기이며 보수주의적 경향의 사회를 맞게 되었다.

b. 신학교육

장로교는 1901년 마포상열과 이길함 두 선교사가 선생이 되어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시작했다. 1907년 신학교가 정식으로 조직되어 대한야소교 장로

회 신학교가 되었다. 신학적 지적 훈련에는 인색하고 영적훈련에만 치중하

였다.

감리교를 1905년에 종합신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다 1907년에는 미국 감

리교보다 늦게 들어온 미국 남감리교가 신학교를 합동 운영하자는 제의에

따라 감리교회 협성신학교로 운영하였다. 스크랜톤 대부인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협성여자신학교와도 1932년에 합동하여 운영하다

오늘의 감리교 신학교가 되게 했다.

협성신학교는 초창기부터 신학적 제한성이나 편식을 거부하고 신학적 개방

성과 포용성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다.

장 감 양교파의 신학교가 자리를 잡으면서 신학적 인식과 논의가 진전되었

고 개인적으로 외국에서 공부한 양주삼, 송창근, 채필근 등이 귀국하면서

보다 체계적인 신학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c.신학지의 출현

(1) 신학월보(1900-1915) : 1900년 성탄절을 기해 미감리회 존스(G.H.

Jones) 선교사가 발행한 한국 최초의 신학지<신학월보>의 창간은 한국신학

의 태동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교리해설, 각종 신학적

과제들이 언급되었고 특히 최병헌이 주필적으로 관여해 1901년 신약성서의

축소형으로 그의 상정립에 애쓴 "죄의 도리(1901)"를 발표했고 1907년에는

기독교와 유 불선의 비교와 대화, 변증을 문학적으로 시도한 {성산유람지}

를 연재했다.

이 신학월보의 시기는 아직 학문적 체계화의 단계는 아니었다. 다만 새

로운 기독교회가 당시 한국적 상황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신학사상

의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 신학세계(1916-1940) : 감리교회에서 전문계간 신학잡지인 <신학세계>

의 창간은 한국신학의 한가닥 서광이 비쳤다. 한국인 학자와 선교사의 공

동집필의 편집법을 채용하고 양주삼 목사는 모세오경의 고등비평을 소개할

만큼 진보적 신학토론을 전개했다.

(3) 신학지남(1918-1938) : 신학 계간지인 신학지남은 장로교측에 의해 창

간 되었다.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던 선교사들에 의해서만 집필, 편집되었

고 그 경향도 성서의 축자영감설에 입각한 성서의 절대존중의 입장을 고수

했다. 신학세계와 신학지남의 창간은 한국 신학의 태동을 의미하며 장 감

양 교파의 신학 혹은 진보 보수의 필연적인 양대 경향이 구체적으로 표출

되기 시작한 것이다.

(4) 신생명(1923-1925) : 기독교 창문사에서 발행한 신생명은 일제의 간섭

을 피할 목적으로 발행인을 선교사 쿤스(E. W. Koons), 젠소(Genso) 등록했

으나 실질적인 편집 발행권이 한국인에게 있어 전영택, 채필근, 송창근

등이 주요 필자로 참여한 민족의식이 강한 잡지 이다. 사상교양지로서 기

독교적 입장에서 이 시기 문화적 관심과 사고유형을 전개했다.

c.신학유형

한국신학의 태동초기부터 그 정착과정에서 나타난 한국신학의 특성을 정리

하면, 우선 감리교회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는 곧 장로교회가 선교사

의 정책과 보수적입장 등으로 신학토론의 장에서 소외 되었다. 또 한가지

는 신학의 초점이 국운상실의 비운과 치운의 경과 등을 통해 고양된 민족관

심이 크게 반영된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절망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영혼의 권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요, 두번

째는 위기에 처한 현실을 개혁하려는 신앙운동이요, 세째는 거시적 안목에

서 한국문화와 기독교의 복음과 만남을 통해 문화 전체의 의미를 재검토하

려는 움직임이다.


 

1.보수적 진보주의 : 길선주

186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한 길선도는 1897년에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

까지 한학,수학,선도,수양, 의학연구 하였고 1907년의 대부흥운동때에 크게

활약하여 전국으로 사경회와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35년 11월18일부터 있었던 셩서노회 사경회 마지막날 새벽기도회를 설교

하다가 쓰러질 때까지 복음선포에 헌신하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

인이기도 하며한구교회 신앙에 보수주의적 신앙형태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

력을 미친 인물이다.

저서로는 1916년에 종료소설인 만사성취 1921년 그의 설교집 강태보

감 19 년 신학서인 말세론 등이 있다.

길선주의 신학 사상을 살펴보면

첫째, 성서무오설과 축자적 영감설을 중심으로 한 청교도적 보수신앙으로

서 성서의 압도적 권위에 대한 부동의 신앙을 심었다. 성서통독 성경공부

를 강조하였고, 유형기의 어빙돈단권 성경 주석문제에 관해 언급하는 등 자

유주의적 성서해석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둘째, 기도의 열심을 가르쳤다. 박치록장로와 같이 시작한 새벽기도회를

비롯하여 가정기도회, 금식기도, 철야기도, 직원들끼리의 특별기도의 습관

을 가르쳤다. 특히 새벽기도회는 교인들의 신앙과 열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한국교회의 중요한 신앙유산이다.

세째, 활발한 전도열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 때부터 채택했던 일일연보 또

는 날연보제도를 강조하여 평신도들의 전도에 대한 열심을 자극시켰다. 유

일한 신학작품인 말세론은 예수의 재림의 징조와 그 내용을 증거하였다.


 

2.진보적 사회참여 사상 : 윤치호

좌옹(좌옹) 윤치호의 신앙은 지극히 내면적이요 도덕적이며 경건주의적 기초가 짙다. 하나님의 인격성, 윤리의식에 섬세한 말념까지의 날카로운 죄의, 신앙을 실천적 삶속에 구현하여 사회의 구원, 사회의 구조적 전체적 구원을 대망하는 신앙이다. 그는 교리가 아닌 신앙, 표준이 아닌 신령함, 규율이 아닌 성품 을 강조한 지와 정보다 의지의 신앙 을 강조한 실천적인 신앙의 선구자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교회의 엘리트 중 그리스도교에 신앙에 입각해서 현실사회를 구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며 정치와 교육과 사회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복음을 증거한다는 선교신학을 실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그가 신학을 공부하고도 신학논문은 남기지 않았으나 정치와 교육행정가로 일생을 살면서 왕성한 사회활동과 실천적인 신앙을 표본으로 보여주었음을 한국신학 사상에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로인하여 한국의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이 태동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문화적 자유주의 사상 : 최병헌

최병헌 목사는 한국 최초로 재래 종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의 저술로서 [셩산 유람긔]와 [종교변증론] 있다. 최병헌의 현대 신학적 연구는 종교적 대화 입장에 서서 종교와 진리를 구별하여 성서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진리는 절대적이고 모든 종교진리는 상대적이라고 보았다. 종교로써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연속성을 인정하나 그리스도의 복음과 타종교와의 연속성은 부인한다는 것이다. 그는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 정복적이지 않고 창조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것이 바로 타종교와의 대화의 신학의 입장이다. 그가 그토록 타종교에 대해 대화의 신학을 전개했던 이유는 자신의 실존적 위치에 대한 규명의 요청이요, 또한 유불선을 위시한 전통종교 문화속에 살고 있는 겨레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선교적 요청 때문이었다. 최병헌의 의의는 한국이라는 상황에 맞는 신학을 찾는 최초의 노력이라는데 둘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문화적 자유주의는 주로 감리교 계통의 신학자들 즉 유동식, 윤성범 등에 이어져 '토착화 신학' 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외에 양주삼은 진보적 서구 신학을 한국에 소개한 초기 신학자로 꼽힌다. 밴더빌트 신학부를 졸업하고 협성신학교에서 가르친 그는 "신학세계"의 주필을 지내면서 한국에 성서 고등비평을 소개하는 등 왕성한 신학적 의욕을 드높였다. 그러나 그는 협성신학교 교수직을 떠나 감리교회 행정관리자로서 큰 역활을 수행하면서 신학자로서의 활동이 다소 둔화되었다.
또한 장로교 인물이었던 송창근은 그 자신 일본 감리교계 아오야마(청산)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창간된 "신생명"을 무대로 1920년대 한국신학의 사회 윤리적 접근에 깊이 공헌하였다. 그후 1930년대 한국신학이 한가닥 정착되는 시기에 큰 활약을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의 실존적 삶의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임으로 기독교의 사회적 관심과 그 구현에 몰두하였다.


 

?) 한국기독교사 여구회편 "교회의 조직과 정비" 한국기독교의 역사1,

기독교 문사, 1989. P 283.

) 김경재, {한국신학 사상사} P.19

) 민경배, {교회와 민족} P.159

) cit., P.20

) 주재용, " 한국기독교 신학 운동사" 한국교회성장 100년 (서울:기

독교문사, 1982), P.67

) Ibid., P.

)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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