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해방신학

好學 2011. 12. 13. 20:29


해방신학이란


 

해방신학-제가 오늘 이 발제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 중에 제일 강한 측면은 빨리 이 발제의 울타리안에서 해방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20분쯤 뒷면 해방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already and not yet 그것은 완전한 해방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장신대의 울타리 안에서 해방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날마다 하고 있습니다. 시험과 레포트, 그리고 발제에서의 해방의 그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본 발제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발제물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자연보호 차원에서....)


 

들어가면서 (문제제기)

새로운 사상이나 사조 그리고 새로운 신학이 태동하는 이유는 기존의 것들이 그 시대정신에 합당한 사상이나 내용을 매개해 주지 못한다는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일종의 '구시대 산물의 한계'라고 표현해보면 어떨지? 그래서, 새로운 이름의 사상이나 신학이 나오게 되는데,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신학 역시 기존의 신학이라는 이름앞에 해방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나오면서, 기존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전제해보고 싶다.

그래서 본 발제에서는 해방신학의 발생배경, 그리고, 해방신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주제도 많이 있지만, 우리가 가장 민감하게 접하는 부분이며, 그들의 교회에 대한 이해를 살펴봄으로써 어떤 부분에서 그들이 기존교회의 한계를 느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우리 역시 어떤 한계점을 발견할 때 우리의 나아가야 할 바를 정립해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는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구원이라는 것을 매개해 주었는데, 그러면 해방신학에서 그 구성원에게 매개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원의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해방이라고 하는 것과의 비교하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있는 이 시.공간, 즉 지금 여기에서 (Here and Now) 이 해방신학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 메시지를 접한 우리가 해방신학을 통해서 수용해야 할 것은 또한 무엇인가? 바로 이 점이 오늘의 발제의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신학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과정을 통해서, 지금 신학인의 일원이 되어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신학적인 안목과 신학하는 의미를 찾아 나가자는 것이 오늘 발제의 목적이라고 하겠다.


 

1. 해방신학의 형성요인

1) 사회·역사적, 문화·경제적 배경.

일반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는 다음의 다섯단계로 나뉘어진다.

A. 식민지 기독교 국가(1492-1808)

라틴 아메리카에서 식민지 기독교 국가가 형성된 것은 스페인 제국의 정치적 침략을 통해서였다. 즉, 스페인이 남미를 정복하면서 그와 동시에 이식시켜 놓은 기독교가 외형적으로는 남미 국가의 대표적인 이념이 된 것이다. 이때 스페인은 엔코미엔다라는 집단농장제도를 생성시켜서 경제를 휘어잡게 된다. 이 당시의 사회구조는 페루와 멕시코에 총독부가 설치되어 있는 관료제였다. 또한 이 시기의 남미교회는 점차 광대한 토지와 자본을 갖게 되면서, 결국 식민 중앙국가의 편을 들게 된다.

B. 민중주의적 자유주의 국가(1850-1930)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은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정복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들 독립국가들은 1850년부터 자유주의에 종속된 신식민지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미국은 1826년 먼로독트린을 발표하여 새로 독립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유럽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천명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카리브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이 보장되는 대신 남미에 대한 영국의 경제적 침략이 묵인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독자적인 자본주의의 길을 개척할 수 가 없었으며, 당시 남미에서의 생산양식은 산업자본주의가 아니라 식민지 상업자본주의였다.

C. 민중주의 국가(1930-1958)

남미에서는 1930년부터 민중주의 현상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주변국가의 산업 부르조아와 노동계급, 그리고 농민들과의 결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종전의 과두 참모와 수입 부르조아, 그리고 지주들의 약세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이것도 다국적 기업을 불러들이게 되어 산업 부르조아 계급을 민중들과 반목하는 지배계급으로 형성하게 되었다. 즉, 민중주의는 종속적 자본주의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이 때의 국가의 정권은 1950년대의 경제적 침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었고, 결국은 사회주의 국가냐 아니면 파시스트국가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D. 사회주의 국가(1959-1964)

1959년 쿠바에서 카스트로는 혁명을 일으켜 민중주의 정권을 장악하고, 사회주의 생산제도를 도입한다. 이로서, 쿠바의 사회구조는 최소한 이론적인 측면에서 민중주의적 양태를 띤 것으로 종속적인 자유주의가 아니라 자국의 사정에 맞는 사회주의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이로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당시 미국의 국무성은 칠레에 대해 종속국가를 수립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E. 미국 세계자본주의에의 종속국가(1964- )

이 시기에는 정치냐 경제냐 하는 편협한 측면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남미 정복이라는 중대한 현상이 일어났다. 즉, 이러한 측면에서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 종속국가들을 세워 놓았다는 점이 이전의 역사적 단계와는 다른 독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에 다국적 기업이 생기게 되었고, 다국적기업과의 이해관계에서 생겨난 남미의 정부들은 오늘날 미국의 세계자본주의에 예속된 종속국가라는 파행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사회의 변화 과정에다가 하나 더 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메델린 문서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 성싶습니다. 왜냐하면, 메델린 문서에서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은 상호 의존성이 있음을 먼저 밝힌다.)

첫째, 경제적 측면 : 우리는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전반적인 상대적 빈곤에 큰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내외적인 긴장의 근원이 되는 요인들만을 분석하는데 그칠 것이다. 1) 국제교역에 대한 왜곡 현상의 점증 : 교환조건의 상대적 열악화로 이해 원료의 가치는 공산품의 가격에 비해 점차 하락하고 있다. 이는 공업국들은 어욱 부유해지는 반면 원료 생산국은 계속 가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족들의 발전"에서 분명히 고발된 이 불의는 외부 원조가 가져올 수 도 있는 긍정적 효과를 무효화하며 평화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이 된다. 그것은 "한손으로 준 것을 다른 손으로 빼앗아간다"고 이 나라들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2) 경제적, 인적 자원의 급속한 유출 : 안전과 개인적 이득을 찾아 라틴아메리카 부유층의 상당수가 그들의 돈을 외국에 투자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불의는 이미 교서 "민족들의 발전"에 단호히 고발되어 있다. 여기에 기술자와 유능한 인력의 손실이 덧붙여질 수 있는데, 그들을 훈련하는 데 소요되는 높은 비용과 그들이 다른 이들을 가르칠 능력을 감안할 때 이는 최소한 자본 손실만큼이나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현상이다. 3)탈세와 이윤 및 이익 배당금의 손실 : 라틴아메리카 내에서 일하는 일부 외국 기업들(일부 국내 기업들)은 종종 교묘한 속임수로 기존의 조세제도를 빠져나간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때때로 이 나라들의 점진적 발전을 위해 적절한 재투자 계획도 없이 이윤과 이익 배당금을 해외로 송금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4)점증하는 외채 : 국제 신용체제에서 우리 나라들의 진정한 필요와 능력이 무엇인지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하등 놀랄 일이 못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윤의 더 많은 몫이 그 지불액으로 흡수되어 버릴 빚더미에 빠져드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5)국제적 독점과 국제적 화폐제국주의 : 우리는 우리 나라들의 경제적 종속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이윤을 향한 고삐풀린 욕구에 이끌리는 권력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는 "노동헌장 반포40주년을 맞이하여"에서 교황 비오11세가, 그리고 "민족들의 발전"에서 바오로 6세가 비난했던 바 경제적 독재와 "국제적 화폐제국주의"에 이르고 있다.

둘째, 정치적 측면 : 우리는 여기서 간접적이든 또는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서든 라틴 아메리카에서 횡행하고 있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편견에 물든 제국주의를 고발한다.


 

2) 신학내적인 동인

해방신학은 1962-1965년에 있었던 바티칸 제2공의회와 거기서 만들어진 "기쁨과 희망"(Gandium et Spes)이란 문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문서가 남미의 가톨릭 신부들에게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완벽한 행동강령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황 요한 23세는 1963년에 발표한 "땅에는 평화"(pacem in Terris)라는 문서 가운데 "우리 모두가 세상의 가난한 자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카톨릭 교도들이 사회정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교황의 메시지와 공의회가 남미에서 해방신학을 싹트게 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후 해방신학은 몰트만에 의해 고무되었는데, 그의 저서 "희망의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 위에나 혹은 우리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계시며, 우리 앞서 가시는 분으로 설명을 하면서, 해방신학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학이 1967년경에는 메츠에 의해서 정치신학이라는 형태로 바뀌어져서 나오게 되는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자유, 해방, 구원이라는 모든 개념들을 정치적인 범주에서 이해하려고 했는데,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자유가 곧 정치적인 자유라고 역설하였다. 이런 정치신학에서는 노동자의 압제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공동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신학적 개념이 완전히 정립된 것은 1968년 남미에 있는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주교단 제2차 총회에서였다. 즉, 바티칸 제2공의회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 이 총회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실제적인 방면에 적용되었으며 해방이라는 용어로 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회의는 비록 개발주의와 해방신학의 중도를 지키고 있었지만 해방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해방신학의 탄생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볼 때, 해방신학이 라틴 아메리카라고 하는 배경하에서 생겨난 것은 신학의 역사적 효율의 근본의미를 모색해 보자는 의도하에서 나온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또한 세계교회의 신앙실천과 사상에 기여하자는 의도 또한 없지 않아 있다 .

신학의 존재의의는 참으로 미래의 신학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신학이 현재 속에서 미래를 창안하고, 모든 것이 좌절되어도 희망을 걸고 일어서는 것이 역사의 주춧돌이 된다고 해설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해방신학은 남미의 역사적 현실과 깊은 관계하에 있다는 것이다. 남미인들이 경험한 정치적 억압과 종속, 경제적 착취가 그 역사적 배경과 현실이다. 15세기 이후 스페인 제국의 정치적 침략에 힘은 로마 가톨릭교회는 지배자 편의 선교정책을 펼쳐 온 결과 남미를 가장 큰 가톨릭 지역으로 만들었다.그런데, 여기에서 교회가 바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만성적 가난, 악성적 인플레, 관료주적 부패, 쿠테타의 연속, 경제적 종속,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자성의 기회를 갖은 것이다. 그리고 해방을 향한 남미인들의 열망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세우기 위한 투쟁에 남미 신학자들이 책임적 응답을 한 것이 해방신학의 근본적 배경이 된 것이다. )

2. 해방신학의 신학적 주제 (교회에 대한 정의와 역할(사명)에 대해서)

1) 교회공동체

남미에 있는 교회들은 남미에 있는 불의한 기조질서가 딴 마음을 품고 베풀어 주는 특혜와 보호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 이곳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시대의 표징들'을 '정치적으로' 해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는 각계각층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방운동에 종사해오고 있다. 그들은 이 해방은 기존체제를 무너뜨려야만, 즉 사회혁명을 일으켜야만 달성된다는 사실을 점차 각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평신도들 사이에는 하느님의 나라(교회)와 사회혁명(정치)간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각종의 평신도운동 내부에 철저한 개혁과 부흥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현실의 여건들을 급진적으로 '정치문제화'하고, 그런 각도에서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피압제자들을 편들어 그들을 해방시켜야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사상과 관점이 달라졌다. 그리스도교의 고유하고 풍요한 내용, 해방운동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새로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에 복음을 증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구체적 사실의 문제로 이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복음증거의 관점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롭운 시각에서 새로운 각도로 인식된 것)

이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인 참여를 권장하였고, 메델린에서 개최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이를 더욱 분명히 천명하였다.(3조 사목적 결론에 보면 잘 상술되어 있다. 메델린문서 3조 25항에 보면, 우리의 학교, 신학교, 대학들에서 사회 상황에 대한 건강한 비판적 감수성을 키우고 봉사의 소명에 대한 의식을 배양하도록 하는 것. 또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성찰에 도달하도록 신자 및 사회조직들을 동원하는 교구 차원의 그리고 전국 단위의 운동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교회의 사제와 수도자들은 교회가 불의한 기존질서와의 결탁을 끊고, 비참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운명을 같이하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자기를 부르신 주님께 성실해지는 길이요, 자기가 설교하는 복음에 충실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교회의 내부구조를 철저히 개혁함과 동시에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이 대륙에서 교회가 활약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자세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오기를 이들은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지역의 사제들에게는 피압제자들을 위해서 투신하고 해방운동에 가담함으로써 사제직이나 수도생활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한 사람들도 갈수록 많아지며, 그들의 눈에 비친 복음, 주님의 말씀, 곧 사랑의 메시지는 온갖 불의를 근본적으로 공략하고 쳐부수는 '해방시키는 세력'인 것이다.

이러한 평신도, 사제단, 주교단, 국가 주교회의의 움직임 등에서 나온 문헌들은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지역의 현실을 변혁시키는 일을 주제로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현상황에서 교회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문헌이다. 이러한 문헌들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것은 교회가 이런 현실에 초연하여 존립하겠다는 태도를 청산하고, 사회 불의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수긍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이곳의 교회들은 국민들의 염원을 함께 나누기로 했다. 이들은 "자기 본연의 위치를 각성하기에 이르렀고, 이 대륙의 공동운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와 정의사회의 건설이 상호연관된다는 사상이다. 달리 말해서 오늘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의를 달성하려는 보다 많은 노력을 인간에게 요구하고 아울러 그 노력 속에 복음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들에게는 이러한 사회의 문제에 관여하는 깊은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며, 신앙은 역사적 상황에 의하여 깊어지고 새로워지고 구체화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타인과 연대성을 갖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되어야 할 것은 해방운동에는 '피압제자들의 적극적 참여'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압제자들이 자신이 불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각성해야만 한다.

페루 주교단의 경우 불의를 규탄함과 동시에 필요한 경우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과의 연대성을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내겠다"고 선언한다. 이제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해야만하는데, 이에는 두가지 각기 다른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하나는 혁명운동에 내포되어 있는 참다운 인간화의 요인들을 지적해 내어, 구성원들로 하여금 열성을 갖고 창의성있는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 운동에서 발견되는 비인간화의 요소들을 지적해내는 것이다.

이제 교회문헌의 둘째 주제는 '의식화를 도모하는 복음화'의 시급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 라틴-아메리카에서 전개되고 있는 해방운동, 국민대중 측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라고 하는 요청... 이 모든 것이 '의식화를 도모하는 복음화'가 가장 긴급한 과제임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의식화라고 하는 용어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현실을 분석 파악하는 일을 의미하며, 인간의 해방을 도모하는 움직임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이 일은 "가장 빈곤하고 불쌍한 인간들에게 바치는 봉사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난한 교회를 이야기하는 교회는 스스로가 가난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메델린 주교회의에서는 교회의 가난은 압제받는 이들과의 유대의 표현이요 압제에 대한 항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교회가 스스로 그리스도께로 향하여 돌아서는 급선무라고 하겠다. 이는 교회의 현체제와 구조를 전적으로 쇄신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교회가 만약 그리스도께로 향하여 돌아서지 않고서는, 교회가 현대세계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교회공동체의 당면과제

교회는 이전까지 기존질서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만연하는 착취와 탄압과 인간소외에 대해서 전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메델린 주교회의가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바티칸 공의회가 세계안의 교회를 이야기했고 가능한 대로 알력과 충돌이 없는 방향에서 교회와 세계의 관계를 논했다면, 메델린 회의는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처해야 하는 그 세계는 혁명이 무르익은 세계임을 입증하였다고 하겠다.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쇄신의 일반 요강을 서술하고 있음에 비해, 메델린 회의는 비참하고 불의로 가득찬 이 대륙에 교회가 처해 있다는 현실을 전제로, 교회 혁신의 방침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 메델린 회의 이후에 발생한 상황에서 야기되는 신학적, 사목적 문제점들을 몇가지 지적하겠다. 첫째, 사회불의와 인간소외를 대항하여 투신하는 우리의 삶에 '신앙이 주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정의의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절대가치가 어떻게 연관되는가? 둘째, '해방의 영성'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즉, 신학적, 영성적 전통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교회자체내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내의 일치와 소통을 위한 새로운 이념이 출현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의 사명은 교회내부의 문제에 의거하여 정의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 의거하여 정의해야 옮다는 말이다. 교회가 교회 자체를 향하고 돌아서고 말 때에, 교회는 자기 사명을 가장 크게 등한히 하는 태만을 범하는 것이다.

이제 이 곳의 교회는 식민주의 사고방식을 탈피하는 일이 이곳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차대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래야만이 라틴-아메리카교회가 보편교회에 순수한 공헌을 할 수 있고, 아울러 자기의 문제점들을 당면하여 해결하고 또 혁명이 일고 있는 이 대륙에 깊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공동체는 구원을 매개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우리는 인식한다. 그러면, 과연 전통적인 구원에 대한 개념과 해방신학에서 말해주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살피도록 하겠다.

 

해방과 구원의 관계개념

1)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해방의 개념

현대사회는 급격하고 심각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지역과 국가에 따라서 천차만별한 양상을 보이면서 경험하고 있다. 그러면서, 소위 가난한 국가들은 그들의 소외의 요인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물질적 비참과 부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지만, 이것은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달성하기 위한 움직임속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단어가 '개발'이라는 용어인데, 이는 보다 인간다운 생활조건을 조성하려는 오늘날 국민들의 염원을 한마디로 종합한 것이다. 이 단어에 대한 설명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어떤 균형을 깨뜨리고 새로운 활력을 도입하는 요소. 혁신이란 기존체제에 반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다. 2)경제성장(부력의 증진, 복지정도로 이해) 3)'사회 전체의 발전'과 동일시. 여기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 포함. 각기 다른 요인들간의 상호의존성을 크게 강조. 3)2번에서 보다 발전된 개념으로 만약, 개발을 총체적 사회발전의 각도에서 본다면 필연적으로 도덕적 차원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가치를 존중하고 또 그것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부지불식간에, 개발의 인본주의적 전망의 첫 걸음이 내디뎌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난 인본주의적 태도는 개발의 개념을 역사적 비전이라는 폭넓은 차원에로 옮겨놓은 것이다. 인류가 자기 운명을 제어하는 세계, 곧 역사에 비추어 문제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를 첨가 또는 수정하는 사상적 전환이 요구된다. 해방신학에서는 이를 해방이라고 부르려 시도한다.

1950년대 부강국들은 빈곤한 국가에 대해서 개발원조를 시도했지만, 원조자들은 빈곤의 뿌리를 근절시키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혼란과 좌절만을 더욱 조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악화는 경제성장 및 근대화의 측면에서 개발을 추진한 주체에 문제가 있다고 파악이 되었다. 기존질서와 기존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변화를 시도했던 노력은 거개가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개발, 발전에 대한 언급이 교회에서는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졌는데, 이는 현존하는 불의가 제거되어야 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와 직결된 제발전이 시급함을 천명하고 있다.

이상에서 '해방'의 개념에 관한 세 가지 차원의 해석, 또는 해방운동에 대한 세 가지 태도를 분석해 낼 수 있겠다.

첫째, 해방은 압제받는 대중과 사회계급의 염원을 표현한 것으로서, 경제,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충돌적인 면을 강조하며, 그들을 부강국이나 압제계급과 투쟁하는 상대역으로 등장시킨다.

둘째, 해방은 역사에 대한 이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즉, 인간을 자기의 운명에 대해 의식하고 책임을 지는 존재로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관점에서 비로서, 인간, 삶과 역사 전반에 걸쳐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인간과 관계된 모든 차원이 활짝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해방'이라는 용어는, 역사 안에서 인간이 갖는 위치와 활동에 영감을 주는, 성서적 근거를 발견하게 한다. 성서를 보면 그리스도는 해방을 가져온 분으로 등장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교의 단절, 그리고 온갖 불의와 억압의 궁극적 뿌리인 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2) 구원과 해방의 개념

역사의 도정에서 전개되는 인간의 해방운동과 구원은 무슨 함수관계를 갖는 것인가?

(구원의 개념) 먼저, 해방신학에서는 두가지의 구원개념을 말하는데, 하나는 양적인 구원개념으로서, 이는 구원은 이승에서 죄를 치유받는 일이요, 이 치유가 곧 후세에서 구원을 얻는 능력이 된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제 보편구원사상이 그리스도교에 두루 퍼지게 됨으로써 구원에 관한 양적 개념이 와해되고 관심을 잃게 되었으며, 그 대신 구원의 개념이 질적인 각도에서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상이 등장하였음을 지적한다. 이제 구원의 개념이 양적, 확산적 개념에서 질적, 집약적 개념으로 변화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제는 구원이 '저 세상'의 일이요, 따라서 이승은 어디까지나 그 시험자이라는 생각을 탈피하게 되었다. 구원은 인간과 하느님의 친교요, 인간과 인간의 상통이 된 것이다.

(구원의 내용) 과거에는 구원성취의 가능성이 누구에게까지 해당되느냐는 문제에 고심하느라고 구원의 내용에 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 그러나 해방신학에서는 구원은 '역사적 실재'라는 사상을 재발견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 구원(인간과 하느님의 친교, 인간과 인간의 상통)이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변혁하며 완성시킨다는 사상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해방신학에서의 역사이해는 성,속의 구분을 가지지 않는다. 역사는 오직 하나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은 인간실존의 전영역에 걸친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제는 과거 추상적이고 본질론적 입장에서 구원을 보던 관점을 돌려 실존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해본다면 "하느님의 구원행위는 인간실존의 전영역을 총괄한 것이라는 사상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집단적이며 공동체적인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에서 시작하여,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에서 끝을 맺는다. 인간이 해방되어야 할 객관적인 구조들이란 율법과 죄와 사망 및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며 인간 실현의 가능성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 증언되어 있는 해방 행위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인간을 억압하고 노예상태로 묶어두는 근본적인 구조들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첫 사건으로서의 사건을 회고하며 이를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적인 해방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창조와 구원

해방신학에서는 창조와 구원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사상의 근거를 출애급이라는 역사적인 사건, 해방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성서가 창조사건을 제시할 때에 창조를 구원 이전의 단계로 제시하지 않고 구원과정의 일부분으로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창조를 하시면서, 구원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는 역사를 시발시키며, 인간의 노력과 투쟁을 가동시키며, 야훼의 구원사업이 시작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에 대한 신앙은 신화적, 초자연적 성격을 허용치 않는 것이며, 천지창조는 역사 한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업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제2이사야의 경우에도 창조를 논할 때는 구속에다 주안점을 두고서 논했다는 것이다. 야웨는 창조주인 동시에 구속자가 되신다는 것이다.(사43:1, 42:5-6)

그리고, 구약에서는 천지창조와 에집트 탈출이라는 두 사건을 같은 형용과 어법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사51:9-10)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상대로 행하신 야훼의 역사적 활동을 '창조'라고 이해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하느님은 곧 천지의 창조주이시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착취와 비참의 상황을 깨뜨리고 공정하고 형제애가 넘친 한 사회를 건설하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해방신학에서는 천지창조를 단순한 하나의 신화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구원사건으로 해석하며, 출애급이라고 하는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 야훼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쏟으시는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고, 완전한 해방의 선물이 이스라엘에게 부여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해방신학에서는 출애급이라는 정치적 사건속에서 종교적 사건들이 발생한다고 이해한다. (Q : 정치적 사건이 먼저인가? 종교적 사건이 먼저인가?) 해방신학에서는 야웨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정치적으로 해방하신 것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출애급을 구원을 토대로 하는 역사로 보며, 출애급 이래로 세상에 불어온 자유의 숨결이 이 압제와 참상을 그 날로 걷어 없앨 수 있다고 설명을 한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업을 이해하고 있다. 이제 창조와 구원은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고, 만유가 그분 안에서 구원받고 있다는 것을 성서(골1:15-20)은 말하고 있다고 이들은 소개한다.

또 한가지 출애급을 통해서 발견한 사상은, 출애급은 천지창조와 직결되었을 때, 인간이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위치에 있음을 말한다는 사실이다. 출애급 사건은 곧 사회적 행동규범을 '비신성화'한 계기이며, 그 순간부터 사회라는 영역이 인간의 고유한 활동무대가 됐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해방신학은 출애급이라는 경험을 인류사에 있어서 하나의 모범으로 보고 있다. 이후로 하느님의 백성이 역사의 도정을 밟아가면서 체험하는 역사적 사건들의 생생하고도 친근한 표본이 된 것이다. 해방신학에서는 일한다는 것, 이 세계를 변혁시킨다는 것은 곧 인간이 된다는 것,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며, 이를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또한 비참과 착취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정의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구원활동의 일부가 된다고 이들은 본다. : 이제는 현세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단지 인간화의 작업이 아니라, 구원과정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약속

성서는 '계시'이자 '복음'이기도 한 이 '약속'이 성서의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약속 때문에 성서가 희망의 책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역사의 주님이시오, 우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다고 한다. 이들의 눈에 비췬 예언자들의 사상적 특징은 그들의 '미래'를 바라보는 그들의 지향이며, 다른 일면으로는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에게 출애급 사건이란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이었고, 또한 미래를 향한 도약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예언자들은 현재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기네가 증언하는 그 시대의 역사적 변동과 상황에 그만큼 주의를 쏟고 있었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예언은 구체적 사건을 가리키면서, 그 사건 속에서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충만한 다른 사건-그것을 향해서 역사가 줄달음치는 사건-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래서 종말사상을 정확하게 알아듣고자 한다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서 투영되는 종국적 사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성립되는가를 파악해야한다고 본서는 말하고 있다. 그것을 줄여서 말하면, "현재의 사건 속에 내포되어 있는 미래를 향하는 투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약속이 '현재'에서 역사적으로 실현될 때는 - 그 약속이 장차 올 것을 향하고 있는 약속인 이상 - 그 실현 자체가 '미래'를 향해서 열리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에서는 역사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활동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종말론적 전망에 비추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종말사상은 현재나 미래에 다 해당함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현재와 미래의 '영성적' 실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종말사상이 현재생활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일은 없다. 단 이 말이 걸핏하면 오해를 살 염려가 있는데, '현재생활'이라는 말을 '현재의 영성적 생활'로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종말사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소치라고 말한다. 종말의 '현재성'이란, 역사내의 실재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해방의 완성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는 인류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정의의 사회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곧 구세사의 일익을 이루고 있다.

해방신학은 현세적 진보와 그리스도 왕국(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대해서 다루면서,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은 현세적 진보 그 이상임을 설명한다. 다시말하면, 양자는 긴밀한 관계를 갖기는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위의 두 가지 사상만 이해한다면, 여러 가지 신학적 입장 가운데서 점차 새로운 합치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개연성을 제시한 것이라 이해가 된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설명은 더욱 인간다운 조건은 선의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신앙과, 만인의 아버지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생명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의 정신적 일치라고 설명을 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계'와 은총의 연속성을 근거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 않고, 전체성을 절대적으로 보존하면서, 하나님이 당신을 열어보이시는 친교의 선물을 힘입어 인간적인 것 전부를 개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해방의 차원

과거에는 창조는 구원을 나란히 놓거나 억지로 창조를 구원에 포함시켰으나, 이제는 창조는 구원속에서 여전히 독자성을 고수하며 거기에 함몰되지 않으려고 버틴다. 그러므로, 창조와 구원의 관계를 단일한 것으로, 단일한 원리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창조계의 해방자,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거의 묵살하였다. 인간이 창조계의 주인이며, 자기 구원을 성취하는 일에도 기여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역사속에서 자기를 창조한다는 개념이 없으면 창조와 구원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 출애급사건으로 말미암아, 창조는 '최초의 구원행위'로 나타나고, 구원이 '새로운 해방'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정치적 해방이라는 안목을 갖지 않으면 구원과 창조라는 두 개의 다른 '질서들'의 관계의 범위를 벗어 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방자 그리스도

죄의 배후에는 인간의 책임이 반드시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델린회의에서 언급했던 '죄악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만행, 그들의 모든 책략과 정책, 즉, 교회를 포함하는 기존체제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죄론-해방신학의 죄에 대한 관점)그러므로, 해방신학에서는 죄를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무엇, 인간 내면에서만 해당하는 무엇으로 보지 않는다. 죄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며, 인간들간의 사랑과 형제애의 부재요, 하느님 및 타인들과의 친교를 단절하는 것이며, 따라서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균열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죄를 이해할 때, 죄악의 집단적 차원을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상을 해방신학에서는 성서의 죄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며, 이를 곤잘레스 루이스는 '죄악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다.

죄는 압제적 구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민족들과 인종들 사이에서 또 사회계급 사이의 지배와 노예제도 속에 죄는 엄연히 현존하며, 그러므로 죄는 근본적 인간소외이며, 불의와 착취라는 상충의 근본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죄가 그 자체로 포착되는 일은 없으며 반드시 구체적 순간에, 특정한 소외에서 포착이 된다. 그리고, 죄의 구체적 노정을 알려면, 그 근저를 이해해야 하는데, 죄는 결국 근본적인 해방을 요구하며, 이 해방은 필히 정치적 해방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해방은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것인데, 이는 성자께서 죄가 인간을 굴복시킨 '모든' 예속상태에서 만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며, 예속이라고 하는 것은 기아와 비참, 압제와 무지, 불의와 증오 등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기심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크리스챤의 생활을 일컬어 빠스카, 곧 넘어감(유월)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 * 해방의 개념 : 1)정치적 해방, 2)역사를 통해서 달성되는 인간의 해방, 3) 죄로부터의 해방과 하느님과 친교의 개시)

역사적, 정치적 해방사건이 곧 그리스도왕국의 성장이며, 구원사건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왕국의 도래 '자체'는 아니며 구원의 '전부'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역사적 실현이며 따라서, 그 완전상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

해방신학에 있어서 구원이란 개념은 단지 종교적 영역에만 머무르며, 사회질서와는 간접적, 함축적으로밖에 연관되지 않으며, 사회의 근본구조와 핵심에는 연관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해방신학은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형태의 비참과 모든 형태의 착취와 모든 형태의 소외에서 인간을 풀어주는 철두철미한 해방임을 인정하고 있다. 만유를 총괄하는 해방운동의 완전한 의미가 발견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다.

" 우주와 인간역사의 동력, 정의와 인간애가 군림하는 세계를 창조하려는 움직임,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비참과 무지와 굶주림 등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 인간존엄성에 대한 각성 등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서 유래하고 변혁되며 완성에 도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은 바로 인간역사의 한가운데에 현재화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 인간행동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3. 신학적인 한계점

사실 이 발제를 준비하면서, 특히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읽으면서, 너무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고, 그리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 그 안에서 주제넘게 신학적인 한계점을 지적한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우리의 전통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진 신학이기에 몇가지 의문점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볼 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기준점에 의해서 정의가 되어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령, 그리스-로마 시대는 제의적이며 법적인 구원의 주제가 강조되었고, 실존주의적 경향이 강한 근래에 이르러는 개인의 내면적인 의식과 실존의 주체적 결단이 구원의 요소로 강조되어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해방신학에서는 이와는 다른 구원의 개념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듯이, 구원도 입김 센 사람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둘째, 오늘 제가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 구원에 관한 문제인데요, 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문제와 직결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죄가 해결되는 그곳에 구원이 임한다는 생각을 저는 평소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에서는 죄라고 하는 부분을 어떤 정치, 경제, 사회, 권력, 구조, 등의 죄를 이야기하지 결코, 개인의 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개인의 거듭남의 문제는 해방신학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의문으로 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개인의 해방의 관해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개인의 거듭남, 회심에 관한 문제에 대한 바른 제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째는, 구원의 보편성 문제인데요. 우리가 흔히 던지는 질문입니다. 해방신학에서 항상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의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그리스도적 구원이 마치 가난한 사람들의 독점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결 론

이제 결론적으로 몇가지의 이해들을 서술하면서 본 발제를 통한 교훈이나 신학적인 교훈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남미의 교회는 현실에 대한 진지함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교회내적인 문제만으로 신학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교회외부로 그들의 시선을 돌렸고, 우리가 소홀히 하는, 쉽게 흘려버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겁니다. 우리들 자신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설교나 행사 대부분이 교회 내부의 일에 치중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진지하게 사회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자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 어떠한 교회의 체제가 현실문제의 도전들을 감당할 수 가 없을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그 시대정신에 따른 개혁전통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셋째, 남미의 교회가 대담하게 정치적 영역에서 가지지 못한 자를 도와주는 결단을 위해 행동하며,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우리의 할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한국교회 자체내의 신학, 신앙하는 풍토가 세상과의 구별을 하기 원하는 이원론적인 구조를 좋아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넷째, 남미의 교회는 연대라고 하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연대입니다. 이것은 계급, 교단, 국가적인 차원을 넘어서 의식의 확산인 겁니다. 우리 나라안에서도 이런 연대문제가 원활하게 해결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학교 내에도 북한 어린이 돕기 기도회, 식권 사기 운동이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전체 학우의 참여를 얻어 내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연대(솔리데리티)가 약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나오는 말입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신학이 제기하고 있는 신학적 방법론으로는 오늘날 소위 제3세계의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기가 속한 나름대로의 자리에서 사회, 역사적 상황을 중심으로 한 창조적인 신학적 사고와 방법론을 새롭게 형성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해방신학을 이해할 때, 상당한 교훈과 도전을 주는 학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본 발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