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김응조의 신학과 사상 [영암 김응조 박사]

好學 2011. 12. 12. 22:11


 

김응조의 신학과 사상

 

 


우리가 구약을 먼저 연구하는 것은 구약 가운데 신약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이러므로 구약은 신약에 대하여 뿌리요 신약은 구약에 대하여 열매라 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물이다.


 

I. 머리말


 

영암 김응조 박사는 성결교 교단에서 큰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첨예한 신학논쟁이나 물의를 일으 킬만한 신학사상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상과 신학교육에 관한 활동을 별로 괄목할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추측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더욱이 한 사람의 사상을 이해하려 할 경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뿐이다. 김박사는 그의 신학과 사상을 "한알의 신앙","한권의 성서","한가지 사명"을 갖고 개척하면서 전개해 나갔다. 그는 한국 신학계에서 문제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고, 바로 신앙중심의 보수주의자였기 때문에신 학없는 신학자처럼 취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학사상을 철저히 보수주의 신학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교파주의 신학자이기를 거부 한다 그는 교파에 속하되 교파주의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신앙노선과 신학이 한국 기독교계에 미친 영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성결교의 교단신학에서 그가 차지한 위치로 보아 그의 사상은 성결교단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영암의 생애로부터 그의 신학적 입장을 분석하면서 그의 사상의 중심점을 찾아 볼 것이다. 이 작업은 분명히 전기적 작업이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정확히 분석해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의 자서전과 그가 [크리챤신문]에 10차례에 걸쳐 간단하게 자기 생애와 신학에 관하여 쓴 글을 통해서 조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기에는 많은 부분이 서술형식으로 쓰여졌지만, 연대 표기가 빠진 곳이 많다. 특히 정확하지 못한 연대나 수치도 종종 발견되기 때문에 정확성을 찾기 위하여 환산을 하거나 연도 표기 없는 진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별로 어려움이 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다행한 일이다.

 

II. 영암 김응조의 생애

영암 김응조는 1896년 12월 3일 한국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는 경북 영

덕 농가의 세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곳은 태백산, 소백산 줄

기의 중추지대로서 산명수려한 산촌이었다. 옛날부터 유림들이 상경할

때 거쳐가는 곳이었고, 험한 산세에서 50번이나 구비치며 흘러내린다고

하여 오십천이란 별명이 붙은 냇물이 흐르는 산깊고 물많은 억센 지형

의 산촌이었다. 이런 지리적 영향을 받아 칼빈처럼 억세고 정의감 넘치

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술한다.

옛날 칼빈의 출생지 '비카델' 사람들은 지리의 영향을 받아서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 정신이 강하고 정의감이 굳센 것처럼 칼빈의 성격이 향

도의 영향을 받아서 동일한 기질을 소유한 것처럼 필자도 향도의 영향

을 받아서 어느 정도 칼빈의 성격과 비슷한 점도 없지 않다고 자인하는

바이다.

그는 그의 성격의 또 한면을 유전적 측면에서 서술하기도 한다. 이 글

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부친은 엄격한 성격과 정직한 실농가이다. 모친은 명철하고 단아한 품

성으로 현처 양모의 적당한 성격을 소유하였다. 내가 회고컨대 나는 이

두분의 성격을 가장 조화있게 물려 받은 줄로 생각한다.

그는 7살때 동리 서당에 들어가서 한학을 배웠다. 그리고 14세 때에는

경산 계동학교를 마치고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했다. 신학문을 배우면서

그는 미래에 대한 여러가지 포부로 들뜨게 되었다.

그의 신앙생활은 15세때 세례를 받으면서 매우 깊어졌다. 수세후 그는

16세의 나이로 기독계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가 상

급학교에 진학할 당시 집안 사정은 극도로 곤란하여 그에게 학비를 도

와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고학을 하며 공부를 계속했고, 하루 5 시

간씩이나 중노동을 하면서도 그의 향학열은 식을 줄 몰랐다.

소년 김응조는 한학을 배우면서 원님이 되겠다는 희망에 차있었다. 수

세 후에는 모세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신앙 생활을

했으며, 신학문을 접하면서는 변호사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실농가의

아들로서 참으로 윈대한 꿈을 지녔던 소년 김응조는 "고비원주의 웅지"

를 갖고 청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설계를세

우는 일이었다. 그는 너무 원대한 꿈에 사로잡혀 일면 방황하는 듯했

으며,내심으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미래의 청사진을 설정한 것에 자

신감이 없기도 했다. 특히 변호사가 되려는 꿈이 깨진 후에 그가 한 수

세 때의 신비한 감성적 체험으로 인하여 심경의 변화를 겪었다. 그는환

청의 경지에까지 접근하는 경험을 하곤했다.그의 귓전에 울리는 소리는

분명하고 똑똑했다. 그는 기뻤으며, 이러한 체험은 그의 선택을 좀더쉽

게 만들었다. 잡념도 없어졌고, 고민도 사라졌다. 언제나 귀에 들린 것

은 "헛되이 허비말고서 구주의 일하세"라는 거룩한 음성, 그것이었다.

1917년 4월 청년 김응조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현재 서울신학대학)

에 입학하였다. 18명의 신입생들과 어울리면서 그는 어릴 때 모세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한걸음씩 현신화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것에 그처럼 감사했던 것은 그가 하나

님의 음성을 들은 체험과 하나님이 길을 예비해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

이다. 배움에 대한 의지가 남달리 강했던 그는 입학 후 한달 쯤 지나

서 일본 성결교회 지방 전도대에 초청되어 일본 현지에서 노상전도에

동원되었다. 당시 일본 동양선교회 본부에서는 일본을 복음화하는데인

력봉사를 할 수 있으며, 이런 전도사업을 감당할 일본어를 잘 하는 신

학생을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조선 동양선교회에 전달했었다. 구체적

인 전도대원의 자격은 (1) 전도할 정도로 일본어를 할 수 있어야 하며,

(2) 신체가 건강해야 하며, (3) 신앙이 철저해야 했다. 그에게 이런조

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일본 전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그후

에도 항상 이 때 선발된 7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일본에 머물게 된 것

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섭리라고 생각하고 감사한다"는 자세로 열

심히 전도했다. 솔직히 그는 신학교 입학 후 한달만에 일본 저도에 참

여 하였기 때문에 신학지식은 물론이고 성서의 진리마저도 아직 깊이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전도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노방전

도 등을 하면서 "돌에 맞은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노방전도나천

막전도에 조금도 귀거스린 소리를 들으면 덮어놓고 돌을 던지고 '고로

세"하면서 폭동을 일으킨다" 고 그의 자서전에서 술회하면서, 그당시

원기왕성하게 일본전도에 임한 것을 그의 신앙체험의 은혜로 생각하였

다. 그는 특히 일본에 전도차 온 지 100여일째 되던 1917년 9월 13 일

거룩한 환상을 보았다. 그에게 보여진 환상은 분명했고, 그를 택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너무도 또렷했다. 그에게 성결과 재림의 예시를 보여

준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게 되었다. 너무 분명한 상황인 이 사건에 대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때는 1917년 9월 13일이다. 부산현 복정시 약송 여관에 우리 일행은

근거지로 정하고 전도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재림에 관한 신앙이나 지

식이 없었다. 이날 밤 여관방에서 자는데 나는 한복판에 누웠다. 밤중

에 비몽사몽 간에 하늘이 별안간 환해지면서 수많은 천사가 나팔을 불

고 예수께서는 흰 구름을 타시고 영광스러운 광체의 몸으로 천사의 호

위하에 강림하신다. 그때에 나는 너무 기뻐서 여러분 정신차리라 예수

가 재림하신다. 하면서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흔들고 야단을 쳤다.

일본 사람들이 자다가 깨어 정신 차리라고 주의를 준다. 그 환상이없

어지면서 공중에서 소리가 있는데 '요한1서 3장 3절'하는 지라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니 그 광경과 그 음성이 역력히 기억난다. 일본 사람

에게 그 성경을 읽어달라 하였더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자마

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도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3).

주님이 내게 재림의 광경을 보여주는 동시에 내게 성결하라고 암시하

신 모양이다. 오늘 내가 재림의 주를 열심으로 증거하는 것도 이때 계

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내게 귀한 환상을 보여 주신 줄 믿었다.

1918년 4월 일본 전도대에 동원된 조선 성결교 신학생들은 1년간의임

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김응조는 귀국 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기

분으로 새학기를 시작했다. 당시 성결교의 신학생 훈련방식은 신학교

육만이 아니고, 신학실습을 겸행했다. 그래서 1주일에 두번씩 노방전

도를 했고, "매일 오후에는 결심자를 심방"했으며, "매일밤 무교동 전

도관에서 구령회 전도"를 했다. 이렇게 마치 수도원과 같은 경건훈련

생활을 하며 공부하는 중에 1년이 지나갔다. 그는 이제 겨우 1년간의

정규 신학수업을 마쳤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그에게는 환상의 체험이

외의 신학지식은 미흡하였다. 그는 소박한 신앙열기와 구원의 확신 밖

에 가진 것이 없는 신학생이었다. 그가 일본 전도여행에서 "일년간 33

차의 설교"를 하면서 "나의 전도의 제목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 그의 귀국후 1년이 지난 그때까지의

그의 가슴과 머리속에서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신학의 학문성보

다는 오히려 신앙의 체험에 더 깊은 의미를 두고 있었으며, 이런 의미

에서 그의 신학은 이지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

다. 이러한 감성주의는 그의 일생 1세기를 거의 지배하는 힘이었으며,

능력이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항

상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는 감사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의 신앙과 노력과 결심이 오늘의 나를 만드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고 스스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독립 만세사건이 터진 날이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삼일운동의 열기는 확산되었으며, 그로인

해 각 학교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신학생 김응조는 3월 5일 많은선

언서를 휴대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독립만세 선동자로 지목

되어 투옥되었다가 1920년 9월에 출옥하였다.

그는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 사건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섭리와역

사하심을 체험했다. 이것이 그의 생애에서 특별한 계기를 주곤했다.

만세사건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그는 좌절과 불안의 심정으로

며칠을 보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대지를 만들어 외우면

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체험을 했다. 특히 옥중에 갇힌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해주고, 병든자들을 치유의 기도로 도와주며,

전도에 힘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특별기회임을 그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1년을 이렇게 보내면서 그에게 하나님이 역

사하신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는 바울과 같이 옥중에

서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입었으며, 교실에서의 신학공부보다 더 많

은 것을 옥중에서 얻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곳곳에서

간증하였다.

죽음의 갈망에서 성경을 보니 반갑기 한이 없었다. 그때에 나의 감상

은 이제는 살았다. 이 성경이 나를 살려줄 것이다. 나는 믿었다... 그

리고 마음에 위로와 힘이 생겼다.

내가 그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

는 말씀으로 산다" (마4:4) 는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간수의

눈을 피하여 성경말씀으로 같은방 사람에게 전도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해 준다. 병나면 기도해 준다. 나는 과연 바울의 로마행의 배 가

운데 죄수로서 다른 사람의 위로자된 것 같은 역할을 하였다. (행 27:

33-37).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도해 주는 것이 나의 일과이다.

... 나는 신학교보다 옥중에서 배운 성경이 더 많았다."

당시 신학교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그러나 그가 3년 수업기간중에신

학교에서 정규수업을 받은 것은 두 학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두 학기

동안의 정규 신학수업이 그의 전 신학연구기간이었다. "나는 사실상수

양기간 3년에 일본에서 1년,옥중에서 1년, 수양기간은 일년에 불과하

였다." 그의 이 고백은 그가 방대한 저서의 저자이며 신학대학 교수에

이르기까지 어렵고 난해한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거의 독학으로 공부

한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년간의 신학수업이 그가공

식적으로 신학연구를 한 전체 기간이라는 것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그는 이렇게 그의 학문적 성취의 의미를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서 얻은 경험과 옥중에서 직접 하나님께 배운 성경은 실상 학

교에서 배운 것보다 우수하였다. 그러나 나는 자만하지 않고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1920년 10월 1일 그는 옥중간증으로 들은 신학교원장의 특별인정을받

고 졸업장을 받았다. 1920년 10월 10일 그는 본부의 파송에 따라 처녀

임지 철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다시 경기도 광주, 안성을 거쳐

서울 아현교회에서 파송되었다. 아현 교회에 부임한 후에 그의 신앙,

자격, 목회성공 여부를 따져 조건이 맞으면 안수를 받게 되는데 안수

제도 하에서 그는 신학교 졸업 5년만인 1926년 4월에 목사 안수를 받

았다. 목사가 된 후 1926년 9월 그는 북부지방 감리목사로 임명받았다.

당시 북부지방은 성결교의 5교구 중에서 가장 큰 선교교구로서 함경남

북도, 북간도, 강원도 일부지방이 포함된 광대한 지역이었다. 북간도

에서 강릉까지 이르는 광역에서 전도와 감리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5년여동안 30여 교회를 북부지방 선교교구내에 신설하여

북선개척전도에 성공을 하게 되었다.

북선개척전도가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되자 그는 곧 만주전도에 전

념하였다.

나는 봉천을 중심하여 남만주에도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우리

동포에게 전하기도 하였으나 북만주는 나의 선교구역인 것만큼 전도에

도 열중하였다... 몇해만에 십여처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온갖 충성을 다하여 전도에 혼신의 힘을 다 쏟은 결과, 40 여

개의 신설 교회를 세우는데 성공한 그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으나,동

시에 그의 심신은 피곤하고 지쳐 병들어 갔다. 그의 진액이 쏟아져 세

워진 교회 숫자 만큼이나 그의 병은 깊어갔다. 이것은 그에게 하나님

의 은혜가 다른 형태로 체험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인생에 또

하나의 전기를 준 감동깊은 순간의 시작이었다.

김목사는 그 스스로 "유달산 기적" 이라고 말하는 강한 성령의 체험

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순간에 그에게 조용히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5년동안 북부지방 전도. 감리사역은 40여 군데에 교회 개척

이라는 큰 부흥을 일으키는 기적이었으나 그의 심신은 너무 병들었다.

피곤한 몸을 돌볼 여유도 없는 전도에 대한 열심은 그의 병을 악화시

켰다.

북선 지방에서 나의 몰아적활동은 나로 하여금 중병에 걸리게 하였다.

나는 원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진찰한 결과

는 폐병2기라는 진단이었다... 의사는 말하기를 기후가 따뜻하고 공기

가 맑고 생선 많은 곳에 가서 요양하라고 권한다. 이것을 알게된 교단

본부에서는 일기가 온화한 목포로 파송하면서 교역보다 요양에 주의하

라고 부탁했다.

1930년 5월 그는 7명의 가족과 병든 몸을 끌고 목포에 부임했다.그러

나 목포는 1년전에 개척한 교회로서 교인 10여명에, 교회당이라고는남

의 셋집 초가였으며, 목사사택은 단칸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건강

한 사람도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그래서 심경을 아래와 같이 서술

하였다.

이곳은 전임자가 신개척한 지 일년이요, 신자가 10여명에 교회당은 셋

집 초가에 주택은 한칸방이다. 성한 사람도 병이날 형편이다. 질병난에

생활난을 가해놓으니 죽을 지경이다. 한가지 병이 일곱가지로 확대되었

다. (폐병, 소화불량,불면증,신경통, 피풍,치질,습종) 병을 고치러 온

것이 아니라 병을 얻으러 온 셈이다. '어찌할꼬''내신세'남은 것은 죽

음뿐이다.

그때에 내가 생각하기를 하루 빨리 죽은 것은 축복이요 하루 더 사는

것은 저주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절망 상태에 빠졌다.

그는 고난과 고통의 나날 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연약한 인간의 모

습을 드러내었다. 절망, 좌절, 허망함이 그이 신변을 에워싸고 감돌았

다. 하나님이 선택한 종으로서의 그의 사역은 이제 막 포기된 인생에의

해서 모두 허물어지려는 절박한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다. 죽음으로 병

고를 벗어나려는 정도의 고통은 인간의 의지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육신이 병들자 곧 그의 심령에도 병이 들게 되었다. 복음을 믿

고 구원을 받으라고 일본 전국을 누비며 외쳤던 건강하고 용기충천하던

전도인었던 그가, 북선개척전도와 북만주에 이르기까지 전도에 힘을 쏟

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던 은총을 입은 그가, 병 앞에서 이렇게약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제2의 삶을 열어주려는 하나님의 또다

른 뜻이 있음을 그는 얼마 후에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의 하나님

의 기적을 이렇게 간증하였다. 육체의 병이 심령의 병으로 옮긴다. 최

후로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하여 '죽느냐' '사느냐' 두가지 문제를 가지

고 기어서 유달산에 올라간 것이 1930년 8월 10일 새벽 5시이다. "하나

님 죽음을 주시든지 삶을 주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죽음도 좋고 삶도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뜻이거든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하

옵소서." 이 순간에 두 눈에는 참회의 눈물이 쏟아지고 몸과 마음은 불

같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내가 앉은 바위가 갈라지면서생

수가 샘처럼 솟아 올랐다. 내 몸이 물위에 둥둥 뜬다. 그리고 하늘에는

태양같이 밝은 빛이 비추는데 내가 몇만촉 밝은 전기불 밑에 있는 것같

이 생각되었다. 그리고 내 몸을 보여주는데, 유리알처럼 맑고 깨끗한동

시에 일곱가지 병은 순간에 없어지고 몸이 날아갈 것같이 경쾌해졌다.

그리고 심신에는 힘이 약동한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뛰고 춤을 추면

서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이 찬송을몇

십번 불렀는지 알 수 없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산에서 내려오는데발

이 땅에 붙지않고 새처럼 날아서 내려왔다. 가족과 신자에게 이 간증을

하는데 모든 사람들은 눈물로 감사함을 표시하였다.

그에게서 "유달산 기적" 으로 불리워지는 이 엄청난 사건은 그로 하여

금 다시한번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했다. 이것은 그가 소년시절 모

세와 같이 되겠다는 소박한 신앙열기에 뜨거운 그 무엇을 느꼈던 때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아 신학교에 입학할 때, 그리고 동경에서 노

방전도대원으로 일하던 중 여관에서 환상을 본 성몽에 이어 그에게 다

섯번째로 하나님이 역사하신 큰 체험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유달산기

적"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성령의 체험", "위대한 환상", " 화세례"

,"불의 성령의 역사"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어떻든지간에 그 삶이 하

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신유되었다는 그의 간증은 그를 더욱 하나님

의 교회확장에 전념하게 만들었다.

1931년 4월 성결교 총회 본부에서는 김목사의 건강회복을 알고 그를 호

남지방(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감리목사로 임명하였으며, 대전에 상

주하며 전도와 감리에 힘쓰도록 했다. 그는 5년동안 호남지방 감리목사

로 일하며 36곳에 개척교회를 세웠고 39곳에 교회신축을, 그리고 결신

자 2천명을 얻는 일이 했다. "이것이 성령의 불길의 역사이다."

그는 5년동안 호남지방 감리목사로 사역에 힘쓰다가, 1936년 4월 총회

본부의 파송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그에게 맡겨진 중부지방 (경기도

강원도 일원)은 누구나 오기를 원하는 곳이었다. 그의 나이 40세에 중

부지방 감리목사가 된 것은 최연소의 일이었다. 그는 다음해인 1937 년

3월에 독립문 교회를 맡아 일반목회의 일도 겸해서 했다. 이때 김목사

는 그의 첫 저서를 출판하는 기쁨도 갖게 되었다. 1937년 7월 10일 [실

천신학 목회학]이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다. 신학교에서 정기교육

을 1년밖에 받지 않은 그로서는 신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목회학에

에 관한 저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할 따름이

었다. 그가 국내의 신학교에서 여러해 공부하고 일본이나 미국에서 유

학하며 신학 전문 교육을 받은 기라성같은 신학자들도 감히 손대지 못

하는 목회학관련 전문 서적을 집필했다는 것은 신학교 졸업 후 그동안

얼마나 독학으로 신학지식을 흡수하여 자기의 목회현장에서 활용해왔는

가 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는 "목회에 당면시마다

자신의 목회지식이 미숙함을 자인하는 동시에 목회자를 위하여 목회지

식을 함양하는 서적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소경함에다가 동서 명목

회자의 경험기를 참조"하여 집필하였다고 서언을 대신하여 저자의 변

을 피력하였다. 이 책은 그가 서언에서 밝혔듯이 그의 경험에서 축적된

신앙의 지혜였으며, 이론적 지식이나 논리적 주장의 집산은 아니다. 전

체 17장으로 나뉘어진 이 책은 그의 저작집 제1권 이었다.

그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총만 쏟아진 것은 아니다. 은총의 뒤에는 시

험이 뒤따랐다. 그에게 닥친 시험은 본인이 철저히 부인하고 있으나 민

족교회 앞에 엄청난 잘못으로 기록되었다.물론 당시 일제치하의 목회자

들의 힘과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별로 크지 않았

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어떻든 성결교단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

었던 중부지방 감리목사 김응조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생애의

과오요, 치욕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그가 신사참배에 참여

하는 선언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자신의 처신을이

렇게 말하고 있다.

1937년 4월 18일은 천장절 축하식이 배제학당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때는 대동안 전쟁이 절정에 달할 때이다 일제가 약이 오를대로 오른 때

이고 미리 형사가 와서 출석예약을 받고간지라 할 수 없이 참석하였다.

교역자,사회유지, 선교사까지 참석했다. 김종우 목사의 사회로 식은 끝

났다. 형사는 출입문을 지키고 서서 남산 신궁으로 가자고 한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이 앞뒤 형사의 인도하에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양

처럼 남산을 항하여 끌려 간다... 내가 신사참배를 하고 그들 앞에 순

종하느냐, 아니하고 버티고 나가느냐, 나 뿐 아니라 뜻있는 교역자면누

구나 고민의 문제이다. 교단 일부에서는 참배가 국가의식이요 죄가 아

니라고 주창하는 편도 있었다. 나는 이것은 약자의 변호라고 생각하고

적극 반대했다.

그는 "나의 생애와 신학" (4) 에서도 이 문제를 기술했다.

형사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들은 나를 신사참배

반대의 거두로 생각한 모양이다. 이 문제를 앞에 놓고 일주일 동안 싸

웠다... 죽어도 못하겠다.

그는 신사참배 문제로 고민했고, "죽어도 못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고 말했다. 그는 신사참배로 하나님과 민족 앞에 죄를 안지으려고 교회

를 사면했다고도 주장하였다. 그러나 후대의 교회사가들은 역사적 기록

을 가지고 이 문제를 논증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 교회사가인 민경배교

수는 정확하고 실증적인 자료를 갖고 김응조 목사와 신사참배 문제를언

급하였다.

 

그의 [한국기독교회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1938년 4월 25일, 장로교 총회의 비극적인 신사참배가 가결되기 5개월

전 서대문 경찰서는 유형기,최석모,김응조,장정심,박연서,김유순, 김종

우 등의 여러 교파 대표들이,신사참배는 물론, 기타 총후 보국 강조 주

간 행사에 참가할 것과,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황도정신을 발양

"하겠노라는 결의를 거쳐 선언문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 기록은 1966년에 출판된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제351쪽에 수록된

것으로서 민경배 교수가 그의 [한국기독교회사]초판(1982.7.20) 에서도

논증으로 인용 제시한 내용이다. 김응조 목사가 그의 주장대로 신사참

배를 "죽어도 못하겠다"고 하여 교회를 사임했다면 임종국의 [친일문학

론]이 출판된 후인 1966년 이후, 그리고 민경배 교수의 저술이 발표된

후인 1982년 이후쯤에는 분명히 자신의 당시의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상

황을 서술하고 논증하는 반박문이나 논문을 발표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

혀야 했다. 그러나 그가 역사적 자료를 묵묵 수용한 것은 그의 진술과

는 다르게 이미 그는 성결교단의 대표자로서 1938년 4월 25일 각 교단

대표들과 함께 결의를 거쳐 선언문을 적극적으로 발표할 정도로 그 이

전부터 열심히 신사참배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논리에 따라

서 그의 주장을 분석해 보면 그는 왜 그가 교회와 손을 끊고 야인 생활

을 해야했는지도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러한 몇

가지 점들이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기술된 곳이 있다.

필자는 김응조의 신학과 사상을 조명하려는 의도에서 이 글을 쓰기 때

문에 그가 신사참배자였는지 아닌지를 판결하고 비판하려는 생각은 없

다. 그는 부인하였고, 교회사가들은 기록을 가지고 증명하였기 때문에

더이상의 진실은 독자들이 이 문제만을 집중 추적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의 생애를 개인적인 입장에서 진술한 것과 역사적 자

료를 가진 사가들의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논증을 진리의 수용성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한번 그의 주장을 들어본다.

내가 공직에서 떠난 두 가지 이유가 있으니 (1) 교회의 책임자로 있으면 참배를 면치 못할 것과 (2) 성결단체가 다른 단체에 솔선하여 신사 참배 무죄론을 주장한 것이 비신앙이라는 점이다.

1943년 12월에 성결교는 강제해체되었다. 이후로 김응조 목사는 교파가 없어졌기 때문에 초교파로 부흥설교를 하며, 그를 부른 곳에 가서전 도집회를 하면서 일제 말기를 보냈다. 따라서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는 설교로서 좁은 세계관이나 편협한 교파주의를 현실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항상 그가 "나는 교파에 속하였으나 교파주의자는 아니다"라고 그의 신념을 밝히는 것은 그가 초교파적 전도 체험에서 내뱉는 고백이었다. 해방되기 1년 전 한해동안에 그는 산골에 가서 은둔생활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여기서 1년간 수양은 나에게 새 출발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고 하는 회고의 문장 속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신학공부에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반평생 그의 삶에 역사적 오점을 남기면서, 어려운 시기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은둔자의 생활처럼 묘사되고 있는 그의 생활동 실상은 어려움과 궁핍의 시기였다. 그는 스스로 " 산골 시내물에 발을 담그고 말씀을 연구한다. 반석 위에 앉아서 밤으로는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한다."며 매우 여유있고 낭만적인 시간을 만끽하는 자연에서의 삶처럼 묘사하였지만 그의 생활 자체는 "판자집을 짓고 짐승을 기르면서" 지내야 하는 매우 초조한 때를 보내야 했다. 그것은 절박한 시간이었으며 실존의 한순간이었다.그러나그의 생애에 가장 절망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전쟁의 태풍"이 언제 지나갈 것인지, 많은 식구들을 언제까지 이렇게 남겨두고 수양과 기도에만 힘쓸 수 있을 것인지, 이런 인생사의 문제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점이었다. 당시는 일본이 최후 발악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사람 누구나 겪는 삶의 현실이었다. 이 시간은 김응조 목사 개인에게 있어서는 제2의 생애를 준비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생애의 중간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은둔 생활로 참회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해방 후에 제2의 김응조는 한국 기독교 교회사에서 새로운 모습을 양각하면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도구로 다시 쓰임받는 은총을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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