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교회소식]본이 되는 교회

<18> 천안 하늘중앙교회

好學 2011. 12. 10. 12:57

<18> 천안 하늘중앙교회

 

 

충남 천안시 백석동 하늘중앙교회는 전국의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신앙의 공간이자 쉼터가 됐다. 교회는 출신 국가별로 꾸려진 커뮤니티를 통해 이들의 정착을 돕고 있다.

외국인근로자들이 교회에 마련된 공간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하늘중앙교회 제공
 

 

《 KTX 천안아산역에 내려 맞이방 밖으로 나가자 찬바람과 함께 ‘마천루’가 눈앞에 펼쳐졌다. 경부선과 장항선이 교차하는 이곳에는 최근 몇 년 새 초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 건물이 줄지어 들어섰다. 변화는 이것만이 아니다. 천안과 아산 곳곳의 공단에서는 동남아 각국에서 몰려든 외국인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 대부분은 실직과 구직을 반복하며 공단 주변의 낯선 환경과 외로움, 가난과 싸우고 있다. 》

충남 천안시 백석동 하늘중앙교회(감리교)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 처음엔 간식과 국제전화카드 나눠주기, 한글 강습 등을 하며 선교를 시작했다. 소문을 들은 근로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초반에는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우여곡절이 많았다. 교회는 다양한 국적을 지닌 이들의 공통어가 영어라는 데 착안해 유학 중인 필리핀 출신의 여성 목사를 데려와 외국인 예배를 진행했다. 그러나 예배를 시작한 지 몇 분이나 됐을까. 파키스탄 출신 근로자들 사이에서 고성이 나왔다. “왜 여자가 앞에 나와서 이래라 저래라야?” “내려와라!” 장내가 아수라장이 됐다. 예배가 중단됐다. 동남아국가 출신들은 여성의 리더십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또 중국인은 몽골인과, 인도인은 네팔인과 갈등이 많았다. 몸만 부딪쳐도 큰 소리가 났다.

유영완 담임 목사(52)는 고심 끝에 국가별로 커뮤니티를 나눠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시작은 출석률이 좋은 ‘네팔 공동체’였다. 자국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게 하자 이내 교회에서 네팔 카레 요리의 독특한 향취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어 교실과 친교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면서 네팔인들이 “고맙다. 당신네들 성경이라도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 “우리끼리 예배를 해보겠다”고 했다. 교회는 네팔인의 헌금은 자신들을 위한 용도로 쓰도록 배려했다. 2003년에는 네팔에서 현지인 목회자가 건너와 예배를 시작했다.

유 목사는 “외국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화하려고 했던 기존 노선을 고친 것”이라고 말했다.

네팔에 이어 중국, 스리랑카, 몽골, 태국 커뮤니티가 차례로 만들어졌다. 지난달부터는 캄보디아 커뮤니티가 가동됐다. 식사와 간식 제공, 의료서비스와 법률 상담 지원, 미용 봉사와 야외 활동, 운동회로 한 해 일정이 빼곡해졌다. 외국에서 오는 목회자들에게는 전액 장학금을 주며 유학을 장려했다.

2008년 실직한 근로자들을 위해 교회 옆 건물에 쉼터를 만들었다. 돈 한 푼 없어도 마음껏 음식을 조리하고 편하게 생활하도록 했다. 쉼터에서 만난 네팔인 다르멘 씨(29)는 “일자리를 잃어 다른 지역에서 왔는데 이 교회를 알고 있어 이곳에 왔다”며 “당장 숙식이 걱정되는 상황인데 아늑한 보금자리가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국가별 커뮤니티는 지역 기업체 사장 1명씩을 운영위원장으로 두고 있다. 운영위원장들은 외국인 근로자들을 커뮤니티로 인도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한다. 커뮤니티는 근로자들 간에 구직과 한국 생활 정보를 교환하는 장이 됐다. 지난해 4월부터는 노동부 한국산업인력공단 산하 외국인력지원센터를 위탁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는 최근 전국 7개 지원센터 가운데 고객만족도 1위를 차지했다.

교회는 2000년부터 지역아동센터인 ‘중앙파랑새학교’를 열어 무료급식과 학습지도, 특별활동 등을 지원하고 있다. 2002년부터는 그룹 홈인 ‘다윗가정’을 운영 중이다. 빈곤과 가정해체에 직면한 아이들에게 거처를 내준 것. 7명이 함께 생활하는 2층짜리 그룹 홈은 아이들이 꿈을 키우는 공간이 되고 있다.

교회의 나눔 활동은 종교의 벽을 허물고 있다. 2008년 불교와 가톨릭, 개신교 단체와 연합해 ‘천안시 천사운동본부’를 열었다. 화재 등 불의의 사고로 보금자리를 잃은 불우이웃에게 긴급 주택을 제공하는 ‘무빙러브하우스’를 비롯해 사랑의 연탄 나누기, 다문화가정 의료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유 목사는 목원대 신학과에 재학하던 1970년대 말부터 10년간 목회자의 길을 미룬 채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서른이 돼서야 학교로 돌아왔다. “당시 사회에 투신하며 고문과 옥살이도 했지만 목회의 길은 오히려 선명해졌죠. 교회가 ‘나만의 천국’을 건설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유영완 목사의 ‘내가 배우고 싶은 목회자’ 故김규태 목사 ▼

‘교단 정치’ 하지 말라던 가르침 생생

1980년 11월, 대전교도소 앞에서 맞은 싸늘한 새벽바람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해 5월 18일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붙잡혀 수감됐다 1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버스도 없는 그 시간, 내 앞에는 김규태 목사(감리교 전 남부연회 감독)님이 계셨다. 출감일을 알고 새벽부터 기다렸던 것이다.

그분은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상대를 압도하는 눈빛 뒤에 따뜻한 품을 숨기고 있었다. 옳고 그름에 분명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목사님은 스스로 교단 정치의 중심에 계셨음에도 내게 “절대로 ‘교단 정치’를 하지 말라”고 했다. 참 목자의 길을 가라는 가르침이었다.

3월 그분의 부고를 받고 빈소로 달려간 나는 마치 아버지를 잃은 듯한 상실감에 빠졌다. 그분은 나를 목회의 길로 이끈 영혼의 멘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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