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시사 칼럼]

타지마할 사원

好學 2011. 9. 29. 21:36

 

                                                                   타지마할 사원

 

 

 

휘영청 보름달이 타지마할 사원의 첨탑을 감싸면 야무나 강 위에는 사원의 상앗빛 잔영이 출렁인다.

무갈 제국 황제 샤자한의 세 번째 부인 뭄타스 마할은 황제의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39세 나이로 요절했다. 신혼 첫날밤 황제는 뭄타스의 아름다움에 매혹돼 밤새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한다. 유난히 달밤을 좋아했던 황제는 보름달이 환한 밤이면 달빛에 비친 황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한다.

황제는 황후를 애도하기 위해 22년의 대역사 끝에 1654년 순백의 타지마할을 완공했다. 이 대역사에는 2만명의 인부와 1000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됐다. 사원이 완공된 직후 황제는 건축 총감독의 목을 베고, 장인들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이 지상에서 타지마할과 유사한 건축물이 다시는 만들어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샤자한은 타지마할 강 건너편에 검은색 사원을 지어 흑백의 조화로써 뭄타스의 죽음을 다시 애도하려 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부인 소생의 아들 오랑제브가 황위를 찬탈하고 부친을 성 탑 안에 감금했기 때문이다.

오랑제브는 연금 상태로 생을 마감한 부친의 시신을 뭄타스 옆에 안장하도록 배려했다. 샤자한과 뭄타스는 오늘도 나란히 누워 못다한 사랑을 나누고 있을지 모르겠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은 서양문화의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예술품들로 가득 차 있다. 십 수년 전 성베드로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필자는 웅장하고도 정교한 예술품에 매혹됐다. 그러나 그 작품들 아래에 써 있는 설명을 읽으면서 감탄은 탄식으로 변했다. 상당수의 작품들이 중세 암흑기에 폭군으로 악명 높았던 다섯 명의 교황 치하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라미드, 진시황릉, 타지마할, 앙코르와트 등 선인들이 남겨놓은 찬란한 문화유적에 감탄하며 그들의 창의력과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러한 대창조물에는 그 당시 수많은 백성의 피와 땀이 응어리져 있다. 재산을 수탈당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었던 스러져간 사람들. 백성을 착취해 업적을 남긴 군주의 이름은 역사에 뚜렷이 각인되고, 백성의 평안을 우선시했던 군주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김중근 주인도대사]

 

 

 야무나 강에서 본 타지마할

 

 

 

                                                                                                 타지마할 사원

타지마할 사원은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그라 교외 아그라성 동쪽 약 2 km, 자무나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만들어진 궁전형식의 묘묘(墓廟)이다. 타지마할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으로 샤 자한(Shah Janhan)이 17년의 결혼기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번째의 아이를 나으려다 1629년 세상을 떠난 부인 뭄타즈 마할(Mumtax Mahal)을 추모하여 만든 무덤이다.샤 자한은 부인을 기념하여 타지 마할과 같은 호화 분묘를 조성하는것 뿐만이 아니라 수도를 델리로 옮기기로 계획하고 레드 포트(Red fort) 등과 같은 엄청난 공사들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여 국가가 흔들릴 정도로 제정을 휘청거리게 만든다. 이러한 실정을 구실삼아 막내아들 아우랑제브는 (Aurangzeb) 반란을 일으킨다.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의 총애를 받고 왕위를 이를 아들 다라 시코(Kara Shikho)를 포함한 모든 왕자들을 죽이고 1658년 아버지인 샤 자한에게서 왕위를 박탈한다. 아우랑제브(Aurangzeb)는 샤 자한을 타지 마할이 마주 보이는 아그라 포트의 8각형 탑과 같은 형식의 구조물인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에 가두게 되는데, 감금된 후 그곳에서 타지 마할을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지내야 했던 샤 자한은 1666년 죽어서야 부인 곁에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타지 마할은 이란의 쉬라즈(Shiraz) 출신인 우스타드 이샤(Ustad Isa)에 의해 설계된 것인데, 설계된대로 만들기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등지에서 동원된 장인들을 포함하여 총 인원이 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건축 자재 운반을 위해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으며 라자스탄의 마크라나(Makrana)에서 채취된 대리석을 비롯하여 건물 안의 세세한 장식을 위하여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입 했던 여러 가지의 돌이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준비 과정과 장인들을 동원하여 만든 타지 마할의 건축비는 상당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1631년에 짓기 시작하여 22년만인 1653년에야 완공된 이 건물의 정면 마당에는 수로가 있는 정형적인 무굴(Moghul) 양식의 정원을 두고, 좌우로는 회교사원과 회당을 둔 구조로 되어 있다. 타지 마할의 뒤편으로는 야무나(Yamuna)강이 흐르고 있는데, 높은 축대로 쌓여진 야무나 강 쪽의 뒷면을 제외한 타지 마할의 삼면은 모두 높은 담이 둘러져 있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 타지 마할로 들어서기 위한 1차 관문이 있고 이 1차 관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는데 타지 마할은 이 마당을 건너 또다른 문을 통과해야 볼수 있다. 타지 마할로 통하는 최종 관문으로 세워진 붉은 사암으로 된 문에는 아랍어로 코란(Kolan)의 경구들이 새겨져 있다.

 

 

                                                       

                                                                                                   본관 과 서쪽별관

 

서쪽별관

 

서쪽별관 입구 

 

 

 

 

다얄 바그 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