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시사 칼럼]

유럽 좌파에는 있고, 한국 좌파에는 없다

好學 2011. 9. 24. 23:46

유럽 좌파에는 있고, 한국 좌파에는 없다

 

 

소련수용소 참상 본 유럽 좌파는 공산당 비판하며 집권까지 성공, 공산좌파와 反共좌파의갈림길에 서있는 한국 좌파는 수용소 끌려간 혜원·규원 위해 촛불 들 수 있을 만큼 정직한가

프랑스에서 '좌파(gauche)'라는 말은 1789년 대혁명 당시 국회에서 급진파가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쪽에 앉았던 데서 유래한다. 이후 유럽에서는 좌·우파가 경쟁하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왔다.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제국(帝國)들이 팽창하면서 유럽의 정치이념과 제도가 전 세계로 확산됐고, 한국 좌파도 유럽 좌파의 지적 영향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좌파에는 있지만, 한국 좌파에는 없는 것이 있다. 강력한 반공(反共)좌파의 전통이 그것이다.

1917년 이후 공산주의가 유라시아를 휩쓸 때, 동유럽은 물론 서유럽도 공산화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서유럽의 공산화를 막아낸 것은 일차적으로 우파의 공(功)이었지만, 사회당과 같은 반공좌파도 큰 역할을 했다. 사회당은 공산당을 잘 알았고, 정치적 지지기반에 있어서 같이 서민층을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공산당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 소수파로 시작했던 사회당은 결국 공산당을 이기고 승리했다. 서유럽에서 집권하거나 집권 가능성이 있는 유럽 좌파는 공산당과 싸웠던 반공좌파의 후예들이다.

서유럽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확실하게 선(線)을 긋게 된 것은 세계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였던 레닌의 교시 때문이었다. 1917년 2월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케렌스키 혁명정부를 전복하고 집권했던 레닌은 1919년 공산주의국제연대(코민테른)를 만들고,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공산주의자가 되라고 명령했다. 1920년 프랑스 투르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부르고자 하는 다수파는 프랑스공산당(PCF)이 됐고, 사회주의라는 명칭을 고수한 소수파는 프랑스사회당의 뿌리가 되었다. 영국노동당도 공산주의를 배격했다. 영국의 대표적 '강남좌파'였던 러셀은 직접 러시아로 가서 과연 볼셰비키 노선이 인류의 새 희망인가를 연구했다. 그의 결론은 "아니다"였고, 러셀의 결론이 옳았음은 그 후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한국인 중에서는 독립운동가 조소앙이 반공좌파의 선각자였다. 그는 일제(日帝)와 싸우기 위해 코민테른을 추종하는 것을 경계했고, 유럽을 방문하여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이 공격했던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의 편에 섰다. 당시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는 이동휘 등이 창설한 한인사회당조차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국가보훈처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을 사회주의자라고 바꿔 부르면서 보훈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엄밀하게 구별되었던 적대적 명칭이었다.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 반공좌파가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일제의 폭압적 지배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고, 6·25전쟁 이후에는 공산주의 대(對) 반공주의의 대치 구도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1949년 중국 공산화에서 1975년 베트남 공산화로 이어지던 세계냉전기의 최전선에서 한국의 반공우파는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와 한통속, 이른바 '용공(容共)'이라고 몰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좌파가 '반(反)반공코드'에 함몰되어, 사리사욕을 위해 악용된 반공주의는 물론 '사상으로서의 반공' 자체에 반대하는 것을 지성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반공좌파의 전통이 계승되지 못했지만, 유럽에서는 반공좌파가 집권까지 할 수 있었다.

유럽 유권자들의 눈에 비친 반공좌파의 이미지는 공산좌파와 달랐다.

 

첫째, 반공좌파는 공산좌파보다 착했다.

솔제니친에 의해 소련 강제수용소의 참상이 알려졌을 때, 공산좌파는 조직 내의 갑을 관계와 겨자씨만한 기득권에 얽매여서 소련 정권을 싸고돌았지만, 반공좌파는 "인권 없이 좌파 없다"는 원칙에 따라 소련 민중의 편에 섰다.

 

둘째, 반공좌파는 공산좌파보다 똑똑했다.

반공좌파는 공산좌파처럼 진실이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지 않았다. 반공좌파는 비록 소수라도 결국 진실이 승리한다는 지성적 입장을 견지했다.

 

셋째, 전쟁과 평화를 보는 시각도 달랐다.

20세기 유럽에서 좌파가 득세했던 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수천만 명이 전사하는 전쟁의 참혹함을 목도하면서 "우파는 전쟁, 좌파는 평화"라는 도식이 유행했다. 이러한 도식이 깨진 것은 1979년 중국공산당이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을 침공했던 제3차 인도차이나전쟁 때였다. 제1·2차 인도차이나전쟁에 대해서는 공산좌파와 반공좌파가 함께 프랑스, 그리고 미국을 비판했지만, 중국공산당이 도발한 제3차 인도차이나전쟁은 공산좌파와 반공좌파를 갈랐다.

지금 한국 좌파도 갈림길에 서 있다. 2002년 미선이·효순이를 위해 들었던 촛불을 북한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혜원이·규원이를 위해서도 들 수 있을 만큼 착한가? 천안함 폭침을 자행하고 나서 히죽거리고 있을 북한 정권을 비호하는 대신, 그 진실을 직시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가? 그런 착함과 똑똑함을 함께 갖춘 반공좌파라면, 한국자본주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반공'의 역사를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뿌리 없는 우파보다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더 보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