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임인재 장로 (장로교)

好學 2011. 9. 15. 21:48

 

순교자 임인재 장로 (장로교)

 

 

임인재 장로(1900-1955)


임인재는 1900년 3월 2일 황해도 화우군 삼전면 철도리 941번지에서 태어났다 . 그는 아버지와 함께 그의 집 사랑방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어릴때부터 충성스럽게 교회봉사에 임했다.

그의 사랑방교회를 찾아오던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션스쿨 영흥중학교를 졸업한뒤 상경하여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해재면 신정리 무의촌에 들어가 해동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개업을 했다. 그가 무의촌을 택한 것은 기독교신앙에 연유된 것이고 목포 양동교회 이남규목사의 권면을 받았던 것이고 그의 아내 정득씨의 조언도 큰 힘이 되었다.

 

주일이면 교역자 없는 양매교회 나가 교역자 역할도 했고

1942년 10월 5일 무안교회는 그를 장로로 안수해 개교회 교역자로 세운 것이다.그는 의사요 교역자요 면에 유지로 행정 자문까지 맡게 되었다. 2차대전에 전쟁물자 공출로 경찰들이 교회의 종을 떼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집의 성물을 감히 경찰이 압수해 갈 수 있다니"하면서 소리치자 공무방해죄로 연행해 무수히 구타하며 시시콜콜 감시하며 괴롭혔다.

 

1945년 해방되자 면지도자로 대한독립촉성회 및 국민회장직을 받았다. 공산주의가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활동하면서 임장로는 타도대상이 되었다. 임장로를 괴롭히기 위해 그들은 임장로가 사랑하는 교회에 불을 질렀다.임장로는 한걸음에 뛰어가 종을 처서 화재사실을 알려 진화했다. 30분 이상 불이 탔는데 지붕만 탔고 기둥과 석가래는 말짱했다.

임장로는 땅에 무릎을 꿇고 감사하며 몸바쳐 축성하기로 기도를 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공산주의 자들은 지도 세력을 무차별 감금하기 시작했다. 교인들의 피난 권고에도 임장로는 머리를 저으며 " 양들을 버리고 장로가 저만 살겠다고 도망을 치라고요? 저는 못합니다 아니 합니다"하고 거절했다. 결국 임장로는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당하여 모진 매질을 당하던 중 부상병들이 몰려오자 공산군은 그에게 치료를 부탁했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에게 의술을 페풀수 없다고 하여 거부하자 국민학교 교사인 그의 맏아들 정순씨를 아버지 앞에서 고문하여 후유증으로 6개월만에 죽게 했다.

 

 1950년 8월 8일 해제국민학교 교정에서 임장로를 비롯한 양매교회 전도사 집사 등 네사람을 인민재판으로 총살했다. 임장로는 세번의 총을 맞고 총살을 당하면서도 입에서 성경말씀이 쏟아져 나왔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한12:25) 어디서 '흑흑'우는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면민들은 소리내어 울지는 못하지만 얼굴위로 흘러 내리는 눈물을 지우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의사로 사랑으로 상처를 싸매주던 임장로에 대한 위로의 조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