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유계준 장로 (장로교)

好學 2011. 8. 20. 21:51

 

 

순교자 유계준 장로 (장로교)

 

 

유계준 장로(1879-1950)


유계준은 1879년 4월 3일 평안남도 안주군 청산면 오리에서 유석덕씨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영변에서 알아주는 거부였으나 몰락하고 세상을 떠나자 13세에 아버지를 잃은 유계준은 평양으로 나와 어떤 상점의 점원이 되어 3년간 일하다가 1895년 청일전쟁으로 상점이 대성구지라는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그의 재치 있는 솜씨가 주인의 마음에 들어 상점주인의 사위가 되어 단독으로 장사를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평양에 이주 장인이 마련해준 미림리 장터에 한 가옥에서 단독으로 장사를 하게 되었다.

성실했으나 술만 먹으면 부인을 때리고 술주정을 하고 싸움만하면 치료비를 도맡아 물어주던 그가 평양서문통을 지나가다가 깡패 이기풍이 던진 돌에 맞아 터진 이마를 손으로 누루며 시종 웃는 얼굴로 "형님 예수믿고 구원 얻으세요" 하는 선교사 마포삼열의 행동에 아상한 감동을 받고 가까이 지내는 한석진을 찾아가 그 선교사는 미국에서 박사까지 한 석학인데 조선에까지 와서 선교하는 훌륭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중에 전도를 받아 감동되어 중생되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유계준의 부인은 남편에 대해 회고하기를 "중생이란 뜻이 무엇인지를 남편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예수 믿기 전에는 맹수 같았는데 복음이 들어가자 사람이 변해도 어찌 그렇게 변할 수가 있어요?" 천부적으로 효자였던 그는 예수를 믿자 홀어머니와 동생 계삼이를 평양으로 불러 한집에 살면서 동생을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숭덕학교 교사로 일하게 만들었다.

 

결혼 6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자 부인은 새벽마다 산정현교회에 가서 기도하여 6년만에 장자 기원을 얻어 기뻤으나 아들이 예능방면에 관심을 갖는 아들의 캠퍼스를 찢고 목사가 되라고 했으나 목사는 못하고 의학을 해서 인술을 베픈다고 하여 그것까지 막을 수 없었다. 자기의 기업을 사기업으로 키우지 않고 민족기업으로 키운 청지기 사상이 뚜렸한 기업으로 평을 받았다.

 

교육사업에 눈을 돌리고 숭덕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이사장이 되었다. 교육사업은 항상 미쪘고 모자라는 월급은 기업에서 충당했고 그러면서 그는 일찍이 양로원 사업을 시작했다. 극심한 기근과 일제의 수탈로 젊은이는 이민가고 노인만 고향에서 고생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며 굶어죽는 수가 적지 않아 기도하는 중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 땅에서도 알아주는 소금장사로 수출하는 소금속에 독립신문을 감추어 배포하였고 산정현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은 그는 독립자금모금 등 독립운동에 힘썼고 창씨개명 반대 학도병제도 반대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민족적 거목이었다. 교회헌납을 강요하는 공산정권에 반대하여 교회 정문에 두러누워 버티다가 1백명의 무장 군인에 의해 교회를 징발당하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사가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6.25가 발발하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28 북진하는 국군의 공세에 몰려 퇴패하든 공산군에 의하여72세에 총살당해 주님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