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원성덕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8. 20. 21:51

 

 

순교자 원성덕 목사 (장로교)

 

 

원성덕 목사(1889-1951?)

 

1889년 10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서 태어나 민족의 요람 선천 신성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구성면 면서기가 되어 근무했다.

면서기로 근무하든 중 3.1만세 사건이 전국을 강타하게 되었을 때 독립선언문을 구해서 친히 손으로 써서 등사를 하여 구성군의 유지와 청년들에게 배포했고 원성덕의 애국적 행위에 감동받은 군민들은 4월 첫 구성장날을 택해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폈다.

 

 필적수사를 통해 원성덕의 필적임을 알게된 일경은 그를 수배했고 원성덕은 윤하영과 함께 최창학의 폐광굴로 숨어들어 부인이 두레박으로 내려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피신하다가 중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계획으로 윤하영과 약속하고 헤어진 후 부인과 작별을 하고 산자락을 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선천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미 잡혀온 윤하영과 함께 일경에게 고문당해 몇번이고 까무라쳤다.

마침 선천경찰서장이 원성덕의 먼 친척으로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어 2년 형을 받고 출소했으나 그와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6명의 동지들이 하나같이 고문으로 옥사한 사실을 알고는 세상의 허망함을 느끼던 나머지 하나님의 사자가 된다는 소명감을 가지고 평신에 입학 1926년 19회로 졸업한후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남시교회에 부임했다.

 

남시교회를 시발로 천산의 영동교회 원세평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중 1945년 8월 14일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애국가를 가르침으로 반일감정을 고취했다고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이튿날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

공산군은 원목사에게 애국자라는 표창을 주며 회유했으나 거부하자 요시찰인물로 일거수 일투족 감시대상이 되었다. 공산화된 북한에서 신시교회, 영산교회를 를 섬기든중 6.25사변을 맞고 가족들의 월남권유를 "양떼를 버리고 목자가 어디를 가겠느냐?"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교회를 사수하다가 UN군 북진할 때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 산에서 대검에 무참히 찔려 죽임을 당했다.

 

살아있는 원목사를 대검으로 찔러죽인후 머리, 팔, 다리 등을 각을 떠서 주검의 시체는 가마니에 넣고가버렸다. 잡혀가는 원목사를 뒤따르던 교인들과 부인과 자손들이 원목사의 주검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원목사의 후손으로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다문리에 사는 딸 원옥경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