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안봉진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8. 17. 22:16

 

 

순교자 안봉진 목사 (장로교)

 

 

안봉진 목사(1895-1949)


안봉진은 1895년 8월 10일(음)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장호리 116 번지에서 안기환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오성학교시절 입신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의술까지 시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에 서울에가서 서울의전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재정보증인이 없어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안봉진은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신흥우 박사의 스칼라쉽을 얻어 미국유학길에 고향에 들렸다.

조모의 반대로 미국유학 기회를 놓치고 장로교에서 안수받고 순회목사가 되어 경기도 양주 강원도 협곡 호양 고저교회를 돌보든 중 1948년 함경도 원산 신창 속후 등 여러교회를 전전하다가 북청교회에 안착하였다. 일제하에 그의 목회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북청교회 당회장으로 있으면서 함남노회장을 역임 교회재건에 동분서주 했다. 번듯한 민족교회를 역설한 그는 붉은 국가 건설을 위해 협력할 것을 강요하는 공산당의 요청을 반대하고 오히려 공산당이 싫어하는 조선 민주당 북청군당 위원장으로 활동을 하며 신앙의 절개를 다짐했다.

 

자연 공산당의 눈밖에 날 것은 당연했다. 공산당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편을 만들려고 8.15,3.1절같은 국경일에 원고를 미리 써주고 연사로 협력할 것을 강요하고 기독교도연맹에 군당위원장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 반동으로 몰아 가택수색을 하는등 공산당의 사찰정치에 시달렸으나 월남하지 않고 교회를 지켰다.

공산당의 사찰정치에 견디지 못한 교역자들이 하나둘 월남하자 1947년 북청성동초등학교 교사였던 외동 딸이 "그러지말고 아버지 남한에가서 살자고 "애원했지만 "목자가 양떼를 두고 어찌 도망치듯 피난할 수 있느냐? 이 아비를 삯군목자로 만들지 말거라" 그리고는 1948년 중앙교회를 거쳐 고향인 신창교회로 임지를 옮겼다.

 

안목사가 고향교회로 부임하자 기독교도연맹은 그를 군당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꼭두각시 노릇을 시키려고 했지만 안목사는 죽기를 각오한 듯 강경하게 거절했다. 1949년 크리스마스 때 내무서에서는 의도적으로 집회허가를 내주지 않고 크리스마스 전야에 집회승인 문제로 잠간 왔다가라는 연락을 받고 출두했으나 밤 10시에 서시베리아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이 돌아오나 해서 끝내 월남하지 않고 공사당의 학정에 몸서리치다가 정신분열증세를 보인 2남과 함께 북에 남았다. 세째 아들 순천만을 월남시켜 딸 준삼씨와 함게 교회 집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순천씨의 가족으로 자부 김월순 집사 사이에 손자 용검이와 손녀 미영이가 있고 딸 준삼씨도 3남 1녀를 슬하에 두었다. 한평용목사는 순교자라는 시를 써서 시베리아로 유배간 순교자들을 신학세계에 헌시해 위로 했다. 바람찬 시베리아 감옥 안에서 스라린 온갖 고생 다 당하다가 정 깊은 고국 하늘 바라보면서 불쌍타 남 모르게 세상 떠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