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유영복 정교 (구세군)

好學 2011. 8. 20. 21:53

 

 

순교자 유영복 정교 (구세군)

 

 

유영복 정교(1914-1950)


유영복은 1914년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사업을 하던 유춘실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중학교때 부친이 부도가 나 빚독촉에 못이겨 금화로 이사가는 바람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부친을 따라가 토건업을 하면서 토관제조업에 착수 1년만에 약관 20에 큰 토관제조회사로 발돋움했다.

그때 유영복에게 새로운 전기가 될 기회가 왔다. 김화시장에 군복을 입은 이들이 북을 치며 강연하는 것을 듣는 인파에 들어갔다가 예수를 믿으면 죽지 않는 다는 강연을 듣고 죽어도 다시 사는 비밀을 알아보기 위해 영문에 출석하기 시작 하게 되어 병사가 된 것이다.

유영복은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금주 금연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김화영문에 출입하기 시작한 그는 성령세려를 받아 열심있는 병사가 되었다. 바쁜 일중에도 전도대원들과 함께 매주일과 수요일 오후에는 북을 치며 찬송을 부르며 전도를 하며 큰 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그의 열심으로 아내는 물론 부모까지도 교인이 되었고 유씨 집안은 이제 착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유영복은 25세에 부교가 되었고 그의 열심은 4년후 30이 되기전 정교가 되었다. 그가 정교가 된 후에는 김화영문의 살림을 도맡아 했다. 김화영문에서는 강습소를 운영했는데 구세강습소는 학교를 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과정에서 중등학교 과정까지 있었다. 대입검정도 지도했는데 김화에서는 구세강습회가 명문고로 통하고 있었다. 학생도 물론이고 교사강사료도 무료였고 영문이 담당했는데 그것은 바로 유영복정교의 몫이었다. 금화영문의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구세강습소를 무료로 운영하며 담임사관을 불편없이 보필함으로 교세가 불어났다.

그의 사업은 이상하리만치 번창했고 구세강습회는 많은 학생들을 수용했다. 유영복정교는 구세군 영문중에서도 사관님을 따뜻하게 모시는 정교로 소문날 정도였다. 담임사관이 오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쌀도 팔아다 독에 채워 드리고 도서비다 심방비다 예비비다 해서 목회에 지장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일제의 교회 탄압으로 교세가 위축될때에도 김화영문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고 교육에도 힘을 기울여 교세가 부쩍부쩍 늘어났다.

그가 남다른 열정으로 김화지역 선교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일제하에서도 그의 열정은 그의 사업도 잘되고 교세도 불어난 것이다.

 

1945년 해방후 영문안 프락치들은 담임사관의 설교를 메모해 보고하고 기독교도연맹에 가입압력에 못이겨 영문사관이 서울로 가버리고 유영복정교가 책임을 지게 되었다. 유영복은 담임사관 파견을 요청했지만 공산당이 교회를 없애려고 탄압을 느추지 않고 박해중이라 오는이가 없어 유영복이 영문을 책임지고 이끌어갔다.

1950년 6.25가 터지자 남한으로 피난가자는 권유도 물리치고 교회를 지키다가 1950년 10월 28일 UN군에 패퇴하던 인민군에게 끌려가며 배교를 요구받았으나 거부하자 배우개고개에서 따발총으로 사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