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안길선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8. 15. 21:40

 

 

순교자 안길선 목사 (장로교)

 

 

안길선 목사(1891-1950)


해방 이후로 지금까지 성동구에 자리한 한국교회의 지표로서 그 자리를 지켜온 신당중앙교회. 그 숨쉬는 역사를 힘있는 맥박으로 이어지게 한 심장부가 있다면 바로 교회 마당에 자리한 '안길선목사 순교기념비'의 신앙적 유산일 것이다.

그는 1891년 12월 8일 함북 성진에서 출생하셨다. 신사참배반대로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경성신학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음. 만주 각지역 교회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집회를 기획해 나갔다. 신사참배 거부로 중국에 망명 연변 용정에서 동산교회를 시무하시다가 1945년 해방과 함께 청진에 남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이승만의 앞잡이로 오인받기도 했다.

 

1948년 2월 월남하여 바로 신당중앙교회 시무하였다. 그는 자주적인 민족목회를 주장했고 신학교시절부터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로는 송창근 목사(조선신학 학장)와 박형용목사(고려신학 학장) 인권운동가로 유명한 김재준목사 등이 있고 송창근 목사는 안목사와 함께 북으로 납치되었다.

 

1950년 6월 27일 신당동을 지나가는 피난민을 보며 가족들은 안목사를 설득했지만 "만주서도 양떼들을 버리고 나왔는데 어떻게 나만 살자고 또 여기를 떠나겠느냐, 아직 피난가지 못한 교인들도 있는데 난 교회를 지킬테니 어머니를 모시고 너희들만 떠나거라" 고 하고

1950년 8월 23일 오전 10시 교회에서 기도하시다가 납북되어 순교하셨다. 아들 안철호 장로는 누이동생과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에 피난갔다가 9.28수복으로 서울에 올라온 가족들은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고 당혹감과 슬픔 속에 빠졌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아오지의 한'은 남궁혁 박상건 송창근 등 60명의 저명 종교계 납치 인사들은 50년 12월 10일쯤 압폭강 연안의 만포 부근까지 당도하여 헐어빠진 농가에 수용시키고 기독교도연맹에 협조할 것을 설득하다가 실패하자 식사도 제대로 안주고 불도 때 주지 않아 종교인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새우잠을 자야했고 발진티푸스에 걸리고 사경을 헤메는 등 결국 납치 당했던 인사들은 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하늘나라에 안식했다.

 

안길선목사는 김광훈목사, 한만영, 최원일, 정원석 목사 등 한국 교계의 귀한 종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많은 목회자와 일꾼들을 배출해냈다. 안길선 목사의 외아들인 안철호장로는 서울대에서 40년 교수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토목학계의 거목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안철호는 (주)범아 엔지니어링 회장으로 항공축량사업계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교육은 물론 회사에 신우회를 창립해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며 직원들의 영성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고 순결하게 살다가신 아버지 안길선 목사의 뜻을 기리며 안철호 장로는 이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과 주께서 흠향하실 향기로운 찬양의 메아리를 위해 헨드벨 콰이어 사역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하 글 출처- http://kcmm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