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서두성 목사 (성결교)

好學 2011. 8. 15. 21:35

 

 

순교자 서두성 목사 (성결교)

 

 

서두성 목사(1920-1950?)


서두성 목사는 1920년 2월 11일(음)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에서 부친 서정원씨와 모친 최옥진여사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한편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이수 후 향학열에 불타는 소년으로 마을 어른들께 칭찬받는 모범학생으로 손년기를 보냈다.

예수믿는 노인 여집사의 인도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노인집사의 외손녀와 백년가약을 맺었고 부인 이기남 권사는 독립문성결교회 권사였다. 신혼의 보금자리에서 멀지 않은 단양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낮에는 농군 밤에는 야학선생님 마을 무료봉사 이발사 주일에는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중추적인 역활을 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서울신학교에 입학였으며 신학생 시절에 마포구 신수동의 신수동성결교회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48년 11월 첫 부임지이자 마지막 사역지이기도 한 경기도 용인군 백암리 소재 백암 성결교회에 부임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한 해로 사상적 경제적 혼란한 어려운 시국에 지방관서의 협조를 얻어 시국강연회를 얼어 공순주의의 이중성에 현혹되지 않게 노력을 했다.

서목사는 거리가 멀거나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할 수 없는 청소년들을 보고 교회사택을 수리하여 교실을 만들고 서울에서 선생님을 초청하여 수업을 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백암중학교의 모체이다. 청년들의 의식개혁을 위하여 청년단을 조직하여 사경회 시국강연회등을 열어 신앙을 바탕으로 한 확고부동한 국가관을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6.25 전쟁으로 모두 피난을 떠날 때에도 서목사는 교인과 인민군 점령하에 숨죽이며 교회에 모여 기도하며 교회를 지키다 공산군에 체포되어 다른 교인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감금되었다가 1주일 후 석방되어 사택에 머물다가 내무서로 연행되어 북송되던 중 수원의 어느 야산에서 살해되었다.

후배로 목사님을 따르던 권유석(현 부산 소재 동광성결교회 담임)목사도 서목사의 목회활동과 그의 사랑실천과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청년운동 어린이 정서교육을 힘쓰고있다.

또한 특히 굶주린 사람을 만나면 당신이 잡수시던 것 까지도 내어주었으며 유치장에서도 당신 몫으로 나온 밥을 먼저 체포당해 오랜 옥고로 몸이 쇠약해진 사람에게 먹여주었고 평상시 추위에 떠는 이웃에겐 입었던 옷까지 벗어 주므로서 목사는 변변한 외출복도 없었다고 한다.

 유족들은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아 그분께서 못다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도리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