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리춘석 집사

好學 2011. 8. 8. 21:34

 

 

순교자 리춘석 집사

 

 

리춘석 집사(1919-1950)


이춘석 집사는 1919년 8월 15일 서천군 서천면 두왕리에서 진사인 이중현씨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3살 때 마을 훈장이었던 엄친께서 영서하시고 편모슬하에 장성하였다.

서천군 거산면 완걸리 야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역경과 비운속에서 장성하였다.

1933년 어느 봄날 부위렴 선교사가 파송한 전도대가 완길리에 들어왔을 때 그 전도대에 의해 12살된 이춘석은 어머니와 함께 입신 종주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18세에 부위렴 목사에게 세례받고 교회를 열심히 봉사했다.18세에 화신교회 성극태씨 장녀 성경용씨와 결혼하였다. 19세에 집사임명을 받고 신전교회에 열심히 봉사하였다.

 

22세에 장남 요한을 낳았고 선춘교회에 이주하여 전북노회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석촌교회를 인도하며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2차대전 발발하게 되매 야학당에서 젊은이들에게 나라사랑의 길을 깨우치고 애국적인 노래들을 가르쳐 왜경들의 감시를 받던중 신사참배거부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는등 신앙의 절개를 지키던 26세의 그를 왜경이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일본에서 강제노역 중에 2년동안 강제노역에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전도에 열심인 이집사는 총감독 마쓰다의 호의로 식량관리자로 있으면서 징용자들의 예배를 인도했고 징용으로 번돈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해방 후 귀국하여 남은 돈을 이집사가 출석하는 석촌교회에 헌금하였다.

 

귀국 후 석천군청에 취직되어 근무하면서 신천, 남전, 옥산교회를 개척하고 순회예배 인도와 신송기도실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두신 뜻이 있음을 기도로 찾으며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6.25가 터졌다. 그무렵 서천읍교회 강단을 맡고 있는 그를 미워하고 있던 공산당은 인천 상륙작전 소식을 듣고 후퇴하기 전에 그를 체포하어 서천등기소에 감금했다가

1950년 8월 16일 감금된채 쏘아죽인후 방화해 버렸으니 그는 동족의 죄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면서 아쉬움 없는 32세의 젊음을 불태워 하나님께 드렸고 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장남 이요한 목사는 부친의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