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노형래 집사 (성결교)

好學 2011. 8. 8. 21:33

 

순교자 노형래 집사 (성결교)

 

 

노형래 집사(1923-1950)


노형래는 1923년 7월 27일 충남 서천군 마서면 한성리에서 한성교회 장로 노승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기독교신앙으로 자랐기 때문에 부여를 거쳐 예산군 고덕면으로 이사해 삽교 보통학교를 재학할 때는 신사에 절하지 않아 호되게 야단을 맞고도 반성하지 않는다하여 급기야는 퇴학처분을 받았다.

“잘했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신앙에의 길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란다”

아버지 노승우 장로는 오히려 아들 형래를 칭찬했다. 그 길로 노장로는 아들을 기독교 계통인 사립예수교 배양학교에 편입학시켰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형래는 배양학교에서 특출나게 공부를 잘했고 졸업 후에는 서울로 상경하여 학업을 계속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17세에 결혼을 했으며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할 일을 찾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 사립학교인 배양학교를 졸업하였다.

1948년 노승우 장로 부자는 사랑방을 털어 한성성결교회로 간판을 걸었고 노형래 집사는 자전거로 4 개 교회 예배처를 돌며 예배를 집전했다. 2차대전으로 젊은 이들을 전선으로 내몰자 부친의 권유에 따라 노형래는 만주로 피신했다가 귀국해 1945년 해방이 되자 . 해방된 조국은 노형래같은 인텔리 청년을 농사만 짓도록 가만 두지않았다.

 

당시 도마다 건국 준비위원들이 선발되어 있었고 청년단 운동이 군 단위까지 파급되어 조국건설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민족청년단에 가입했고, 서천군 당 위원장이 되어 활동을 했다. 그는 그러한 분주한 중에서도 성수주일은 물론 교역자없는 4개의 교회를 돌며 예배를 집례했다. 이런 분주한 세월속에 노형래는 6.25를 맞았다. 공산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점령했고 1주일이 가기 전 대전까지 점령했다. 서천도 이내 공산화되고 말았다. 부친 노장로는 결사적으로 아들을 피난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망설였다.

 

 민족청년단은 뒤로 미룰 수 있었지만 교회만은 떠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아떻게 교회를 버리고 도망하겠습니까” 노형래는 많은 고민을 했다. 피난해서 생명을 구할 것인가 주의 강단을 지키다가 순교할 것인가? 친우 최동규전도사를 만난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노형래는 끝내 죽는 길을 택했다. 육신은 죽으나 영원히 사는 길,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결국 노형래 부친장로와 또 동생 등 3부자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내무서에 갇히게 되었다.

 

1950년 6.25로 서천도 공산화되고 노형래 집사는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에게 체포되었다. 노형래 집사는 교회지도자로 활동하지 말 것과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오히려 그를 심문하는 내무서원에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며 전도했다.결국 회유가 불가능하자, 대전 형무소로 이감된 후 처형되었다.

 

1951년 8월 3일 서천군청에서는 유족들과 그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위령제를 드리고 장례식을 거행했다. 순교자 노형래의 시신은 불타고 없어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식기를 관에 넣어 교회 앞산 가족묘지에 묻었다.(장례예배에서 황봉의 장로가 낭독한 고인의 약사는 순교신서 4권 163-65쪽에 있음)

유족으로는 장남 노태철 목사(제일교회 당회장), 차남 노희석목사(명일교회 당회장) 딸 노평란(허성활 목사 사모), 손자로는 노윤식 목사(미국 에즈베리 신학대학원 졸, 성결대학교 선교학 교수), 노윤숙(유경렬 목사 사모), 노윤성 안수집사(미국 NYU 졸업, CJ 부장), 노윤철 집사(미국 하바드 졸, 치과의사), 노유림(디자이너), 허상범 목사(미국 바이올라 대학 선교학박사과정), 허종범 집사(컴퓨터 전공박사), 허대범(회사원)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