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박경구 공산당에 저항하다 순교

好學 2011. 7. 16. 17:09

박경구 공산당에 저항하다 순교

박경구 

[1903-1950. 장로교 목사, 교육가]
황해도 황주군 청룡면 포남리에서 출생]

 

1. 성장과 교육계 투신

박경구 목사는 1903년 황해도 황주군 청룡면 포남리에서 당포교회 박태화장로와 송태신 권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 박태화 장로는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5회로 졸업하고 재령읍교회를 시무했으며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되어 많은 선교의 공을 세운 형인 선교사 박태로 목사의 전돌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박경구는 독실한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지라 신실한 기독교신자로서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평양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수석으로 1926년 졸업했다.

당시 그의 실력이나 신앙 인격등이 선교사들에게 인정되어 꼭 목사가 될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는 애국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거절했다. 그는 애국입국의 대의를 위해 교육계에 투신했다. 우선 황해도 신천에 경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이어서 사리원 덕성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가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교장의 추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없었다. 수년의 세월을 덧없이 보내던 차에 진남포에 있는 득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여기서 그는 온갖 정열을 다해 교육에 전념했다.

 

2. 목회자의 길에 들어섬

그러던 중 여기서 그는 주의 종으로서 목회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정열을 쏟았던 교육계를 사임하고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재학중 신사참배문제로 갖은 고초를 다겪으며 1941년 제36회로 졸업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평남 대동군 이목리 이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으며 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황해도 장연군의 서부교회로 부터 청빙을 받아 곧 목사로 시무했다.

그해 어느날 그는 일제로부터 한통의 공문을 받았다. 내용인즉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직들을 소집하고 신사참배결사반대의 의;지를 천명하고 제직들과 더불어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일제의 압제와 핍박은 나롤 극심해져 그는 끝내 서부교회를 사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1944년 겸이포중앙교회로 전임되어 1년 남짓 목회하던 중 일제의 발악적 탄압에 더 이상 목회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황해도 황주군 점촌이라는 곳에 은거하며 과수원을 경영하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는 "정방산 비밀 결사사건"의 혐의로 그를 체포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그나마도 그를 버려두지 않고 구금했다. 이 사건은 1945년 봄 박경구 목사를 비롯한 교회합방으로 목회를 떠난 4.5명의 교역자들이 정방산에 모여 수양회를 가졌는데 일제가 이를 알고 이곳에 모였던 목회자들을 비밀결사 협의로 체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1945년 4월 6일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여기에서의 체험을 그는 "옥중천국"이란 글로 발표했다.

이런 괴롭기만 한 세월도 가기마련 드디어 8.15 해방을 맞았다. 한편 그는 곧 출옥해서 다시 장연읍의 서부교회에 부임했다. 출옥과 더불어 함께 모시던 목사를 모시게 된 교인들은 너무나 기뻐했으며 교회는 날로 부흥 성장을 거듭했다.

 

3. 공산당에 저항하다 순교

그러나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국토의 분단이었던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설립된 공산당 정권은 박목사의 새로운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평양장로회 신학교에서도 사상적 대립과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래서 노회에서는 박목사를 교수로 추천했다. 그는 김영윤 목사등과 천길을 멀다않고 출강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가 강의한 것은 주로 로마서와 목회서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경건회시간에는 학생들과 한 몸이 되어 조국의 통일과 신앙의 자유와 옥중에 있는 종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기독교 연맹"이 결성되면서 공산당의 압력은 날로 심해서 나중에는 신학교육마저 공산주의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그는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맞서서 저항했다. 그러나 이 단체에 가입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목사는 그들의 회유와 강요를 끝내 거절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산당은 박목사를 연맹의 문제로 의논할 것이 있다는 구실로 연행해서는 잔인하게 고문하다 마침내 죽이고 말았다. 박경구 목사는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과 고문을 끝내 이기고 순교의 신앙의 지조로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