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만물상] 허위와 홍범도

好學 2011. 7. 23. 22:52

[만물상] 허위와 홍범도

 

 

 

“나라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떻게 하랴. 나는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 1908년 전국 의병을 모은 ‘13도(道) 창의군’ 1만명을 이끌고 서울 진공(進攻)에 나섰던 의병장 허위(許蔿·1854~1908)가 일본군에 체포된 뒤 가족에게 남긴 편지다. 체포 직전 총리대신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외부대신을 제안했으나 허위는 거절했다. 그는 의병전쟁이 성공하지 못하리라 예감했다. “내 하는 일이 꼭 이뤄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왜적과 함께 살 수 없어 그러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겠다고 하는 것은 입뿐이다. 실상은 조선을 없앨 마음을 가졌기에 앉아 볼 수 없어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켰다.” 허위의 인품과 기개에 감명받은 서대문감옥 아카시(明石) 소장은 통감부에 구명운동을 펼쳤으나 허사였다. 허위는 1908년 서대문감옥 ‘사형수 1호’로 순국했다.

 

▶어제 3·1절 아침신문에 실린 허위의 손자 허 블라디슬라브 얘기는 3·1 정신을 무색하게 한다. 그는 안성의 공장에서 월급 120만원을 받으며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트럭 운전을 하다 형편이 어려워 작년 6월 입국했다고 한다. 허위가 옥사(獄死)한 뒤 가족들은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손이 러시아, 중앙아시아, 미국까지 흘러가 신산(辛酸)한 삶을 이어온다.

 

▶허위가 양반 출신으로 의병을 이끌었다면 홍범도(1868~1943)는 대표적인 평민 의병장이었다. 머슴, 광산노동자, 포수로 떠돌던 그는 1907년 일제가 무장봉기를 막으려고 총기를 압수하자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 부대는 함경도 삼수·갑산에서 일본군을 잇달아 물리쳤다. ‘홍대장 가는 길에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엔 비가 내린다.’ 함경도 사람들은 ‘날으는 홍범도가(歌)’까지 지어 불렀다. 홍범도는 1920년 항일무장투쟁의 꽃,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갔다. 1943년 세상을 뜨기까지 말년엔 극장 수위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의병전투에 아내와 두 아들 모두 바치고도/ 어금니로 눈물 깨물던 사람’(이동순 ‘홍범도’). 그러나 러시아에 있는 그의 후손은 허위의 유족처럼 어렵게 산다고 한다.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선열에 대한 예의와 대접이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