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종교)韓國 의 宗敎들

십자군

好學 2011. 7. 16. 07:01

십자군 - 위키백과에서

십자군(라틴어: croisade)은 교황의 호소로 조직된 기독교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군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는 직접적으로 성지와는 관계없는 레콩키스타동유럽에 파견된 동방십자군, 발트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원정을 감행한 북방십자군, 이단에 대한 알비 십자군 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그 취지와는 다르게 십자군측이 예루살렘을 확보한 기간은 1099년 ~ 1187년 및 1229년 ~ 1244년뿐이었다. 이후 20세기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당시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십자군은 의로운 군대로 이 전투는 성전이 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세계의 여러 나라들 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 문화권이였던 동방정교회의 나라들까지 공격해 들어간 침략군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사자심왕 리처드 등 서유럽의 대표적인 세 나라의 군주들이 함께 참가한 제3차 십자군이 가장 유명하고,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이었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그리스를 방문하여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약탈행위 등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했다. Image:Carte croisade.png

 

원인 및 배경

3세기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의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 순례 여행을 해왔다. 이슬람의 통치자들이 종교적인 목적의 성지순례를 용인했음에도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를 시작으로 동로마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서유럽은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중심으로 성지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안티오키아(안타키아), 예루살렘 등 그리스도교 성지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단행한다. 그러나 성지 회복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동방정교회를 로마 가톨릭 관할권 아래 흡수, 통합시키고 교황권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더구나 당시 서유럽 내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대표적인 예가 1차 십자군에 참가한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그 동생 볼로뉴의 보두앵이다). 또한 도시 상인들의 시장 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밖에 서유럽 각계각층의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서 십자군원정이 단행되게 된다.

또한 중요한 점은 흔히 알려져 있는“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으로 괴로워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라는 기록은 서유럽 측의 왜곡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당시 알렉시오스 1세 황제의 딸인 안나 콤네나 공주의 기록인 《알렉시아드》와 서유럽 측 역사가들의 기록이 많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평화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이슬람 세계는 내분이 일어나 서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일부 해적들을 제외하고는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십자군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1].

전개

 군중 십자군 (1096년)

 
 

중세 서유럽, 교황 우르바노 2세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하여 교묘히 전쟁을 선동한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전대사를 주겠다고 반포하였다. 그에 따라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여러 쟁쟁한 인물들이 성지를 회복(노략질)하러 떠난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은자 피에르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발터와 함께 한발 앞서 떠난다.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 하는데 그들은 시작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우선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방향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이 있는 대략 동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베오그라드에서도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헝가리 왕국의 기병대의 반격을 받고 군사의 태반을 잃었으며,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대에 의해 또다시 대패하여 우여곡절 끝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당시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그간 이들이 저지른 행위를 잘 알고 있어,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 영토에 데려다 주었다. 군중 십자군은 거기서도 계속 약탈을 하다 셀주크 투르크군을 만나 제리고르돈 요새와 키보토스 요새에서 전멸,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하고 은자 피에르는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목숨만 구해 달아난다(일부 서양 사학자들은 은자 피에르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고 하지만 그다지 신뢰성이 없다).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년~1099년)

 
Image:1099jerusalem.jpg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바노 2세
예루살렘 전투

당시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차 십자군은 먼저 군중 십자군에 대한 승리로 자만하고 있는 니케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니케아 전투) 안티오키아를 공략한다(안티오키아 전투). 그러나 도중에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 간의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 할거로 치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제2차 십자군 원정 (1147년~1148년)

Image:Saint-Bernard prêchant la 2e croisade, à Vézelay, en 1146.jpg

당분간 중동에서는 십자군 국가 등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과 군소의 도시 등에 거주하는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슬람 측에서 영웅 이마드 앗 딘 장기가 등장하여 에데사 백국을 점령함으로써 열세를 만회하였다. 이에 따라 서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또다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못하고,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어떻게든 간신히 팔레스타인까지 도착했지만 다마스쿠스 공략에 실패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3차 십자군 원정 (1189년~1192년)

1187년에 이슬람교 세계의 영웅인 살라딘에 의해, 대략 90년 만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에게 점령, 탈환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고 사자심왕 리처드, 존엄왕 필리프,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가 참가, 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보통 십자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3차 십자군이지만 원정 도중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다 미끄러져서 물에 빠져 익사하고[2] 필리프 2세는 1191년아크레를 탈환한 뒤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면서 귀국하고 만다[3]. 어쨌든 이렇게 3차 십자군은 사실상 ‘리처드의 십자군’이 되고 만다. 사자왕 리처드는 어차피 예루살렘을 점령해봤자 얼마가지 못하고 다시 이슬람교 사람들에게 점령당한다고 판단하여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또다시 실패로 끝났다. 이 때 리처드는 휴전 조건으로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를 보장받았지만, 살라딘은 예루살렘 순례를 제한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년~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실행에 옮겨졌는데, 이번에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도항비가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수송을 하청받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송료의 부족분을 지불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공략하였다.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다. 그럼에도 베네치아는 헝가리를 공략한 다음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새 황제가 되어 라틴 제국을 건국하였다.

하는 수 없이 교황청은 라틴 제국을 승인하고, 그 대신 예루살렘을 목표로 원정할 것을 요청했으나 실시되지 않았다.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족들은 제국령 각지에 망명 정권을 수립했다. [4]. 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둘러싼 내용에 대해서는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십자군 측)과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비잔티움 제국 측)란 두 사람의 뛰어난 역사가들이 기록을 남겨 지금까지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알비 십자군 (1208년)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툴루즈를 중심으로 알비(알비주아파라고도 함)라는 영지주의 교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세속의 일이 사악하며 인간의 영혼만이 선이라고 보았다. 12세기 로마 교황청은 알비파를 이단으로 선언, 1208년 알비파 토벌을 위해 알비십자군을 일으켰다. 결국 알비파는 1350년에 소멸되었다.

 제5차 십자군 원정 (1218년~1221년)

칭기스칸 초상화
칭기스칸 초상화

아크레 왕국(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의 장 드 브리엔느 등이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머나먼 동방에서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의 프레스터 존이 대군을 인솔하여 십자군을 도우러 온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정체가, 훗날 유럽 전 국토를 뒤흔드는 몽골 제국의 군대라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 알아채지 못하였다.

 제6차 십자군 원정 (1228년~1229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여러 번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이행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 아유비드 왕조의 술탄 알 카밀은 내란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상황인지라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 정책에 휘말려,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그레고리오 9세는 교회로부터 파문된 채로 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된 것을 구실 삼아,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켰지만 황제군에게 격퇴당하여 1230년에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풀어주었다. 1239년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 1239년부터 124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제후 등이 원정에 나섰지만, 역시 싸우지 않은 채 귀환하였다.

제7차 십자군 원정 (1248년~1249년)

알 카밀이 죽은 후,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 2000명 남짓한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되었다. 1248년 오랫동안 십자군 원정을 준비한 프랑스의 성왕 루이가 원정을 하여 이듬해 다미에타를 정복했다. 그러나 아이유브 왕조살라딘 2세의 이집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패하고 1250년 그 자신도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루이는 1254년 까지 이집트에 머물면서 몽골과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제8차 십자군 원정 (1270년)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재차 출병하여 바이바르스가 주도하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다. 이 때 시칠리아 왕인 루이의 동생 샤를도 형을 도와 출병하였으나 루이는 1270년 튀니스에서 병사하였고 샤를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아크레에 머물면서 십자군 원정을 계속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한편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계속 전진하여 트리폴리를 차지하고 1291년에는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십자군 지역인 아크레마저 점령하여 사실상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

 어린이 십자군

어린이 십자군(또는 소년 십자군)은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거나 해상사고로 수장되고 말았다. 이들 중 노예로 팔린 소년들은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의 관용으로 해방되었다.

 결과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이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아마드 앗딘 장기(통칭 장기)나 살라흐 엣 딘(통칭 살라딘으로 불림)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 점령시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보였고, 이는 이슬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했다. 심지어는 적인 어린이 십자군이 유럽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자 이들을 해방시켰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써 야기한 내부 분쟁이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라시를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점령한 적도 있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에서 십자군들이 벌인 동방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정교회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교인 동방정교회와 십자군 기사들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하게 고착되어, 1054년에 있었던 교회 역사 최초의 분열 사건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이 고착화되게 했다.

 총론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동질성을 부여해왔던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화되자 각 나라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각개약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 중 이슬람과 비잔티움에서 약탈한 물건들로 발전했다. 십자군은 기독교가 아닌 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렀고 근 1000년동안의 유대인 대학살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근 사백여년 동안 우호적이던 기독교와 이슬람이 적대적으로 되는 시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