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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2

好學 2011. 7. 16. 07:05

십자군 전쟁 2


5. 제4차 십자군

 

  1202년 동로마는 제위 계승 문제로 분열되어 있었다.   1203년 6월 제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포위한다.   동로마의 입장에서는 전혀 의외의 상대에게 습격을 당한 격이었다.   1203년 7월이 되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십자군에게 정전을 제의한다.   8월에 알렉시우스 4세와 이사크 2세가 동로마를 공동 통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1204년 2월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두 황제를 살해한다.   그리고 4월,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거하고 약탈한다.   또한 십자군은 라틴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나라들이 난립함으로서 동로마는 분열되었다.   사실상 제4차 십자군의 활동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제4차 십자군은 왜 동로마를 공격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당시 동지중해의 상업분쟁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동지중해의 가장 중요한 상업권은 동로마와 교역하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을 수송한 것은 베네치아의 상인들이었으며, 1081년 로베르의 그리스 침략을 저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래서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보상의 의미로 동로마 교역에 있어서 많은 특권을 부여하였고, 동로마 상업의 대부분이 베네치아 상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경계심을 품은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피사인들에게 베네치아 상인들과 비슷한 특권을 주어 견제하였으며, 그의 아들 요한 2세는 제노바인에게도 비슷한 권리를 주어 베네치아 상인들의 경쟁자를 늘려놓았다.   이러한 상황은 그동안 동로마 교역을 거의 독점하였던 베네치아 상인들에게는 불만을 가지도록 하였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상당부분 베네치아 상인들의 사주나 충동질에 의한 것이 많다.   즉,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로마 교역에서 나오는 많은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동로마 교역을 독점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제4차 십자군을 사주하여 동로마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당시 제4차 십자군을 수송한 것은 다름 아닌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의 상선이었다.   때문에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베네치아 상인들은 좋은 결과가 나올 경우 보상할 것을 약속하였다.   또한 동로마를 공략할 경우에 더욱 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다.   결국 제4차 십자군은 종교적 열망보다는 물욕을 쫓아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다.   때문에 제4차 십자군은 가장 더러운 십자군이란 오명을 얻게 된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십자군의 행태 역시 그러한 오명에 빛을 더하였다.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3일간 마음껏 약탈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단순히 약탈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약탈은 그리스의 기독교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었으며, 창녀를 소피아 대성당의 총주교 좌석에 앉히는 등 신성모독도 서슴치 않았다.   비록 로마교회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런 행동은 십자군의 행동이라고 믿기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교황은 처음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완강히 거부하던 것과는 달리 현실과 타협하였다.   교황이 반대했던 것은 성지로 가지 않는 다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라틴제국이 들어서자 환영하였다.   이미 일은 되돌릴 수 없었고, 로마교회의 영역이 동로마 지역으로 확장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교황이 원하던 동·서교회의 통합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그 목적에 다가간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 점령 과정에서 신성모독과 3일간의 무차별적 약탈이 자행되었으나, 교황이 이를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제4차 십자군의 결과 동로마는 분열되어, 라틴제국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밑으로 테살로니카 왕국, 아테네 공국, 아케아 공국과 그 밖의 나라들이 들어섰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큰 구역과 유보에아 전역, 크레타, 코르푸, 두라쪼 등의 많은 중요한 항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베네치아 총독으로부터 수많은 섬나라에 나라를 세우는 것을 허용받았다.   동로마의 제후들은 십자군이 영역 밖에 나라를 세웠다.   동로마 황제의 사위였던 테오도르 라스카리스는 니케아 제국을 세웠으며, 알바니아의 산악지역에는 황실의 사생아가 에피루스專制國을, 콤네누스조의 두 왕자는 흑해 남해안을 포괄하는 트레비존드 제국을 세웠다.   이 시기부터 동로마는 내전을 1261년 재통합하기까지 겪어야 하였다.


6. 제5차 십자군과 소년십자군

  제4차 십자군에 의해 동로마가 분열된 이후, 1205년 베네치아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1208년에는 알렙포(모술)와 통상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십자군은 1213년까지 알비·왈도파에 대항하여 싸웠다.

  1217년 헝가리왕이 십자군을 주창한다.   1218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소년십자군이 출발하지만 실패하였다.   소년십자군은 해상으로 이동하였는데, 기아에 허덕이다 도착도 하기 전에 죽는 경우가 많았으며, 일부는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하였다.   결국 소년십자군은 도착도 하지 못하고 붕괴되어 버렸다.

  제5차 십자군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집트를 상대로 전과를 올렸다.   1219년 예루살렘왕 존이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점령하였으며, 이집트 술탄은 다미에타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예루살렘과 교환할 것을 십자군에 제의한다.   하지만 십자군은 이를 거부한다.   1220년에는 십자군이 카이로로 쳐들어가 불태웠다.   하지만 1221년에 이집트군이 십자군을 격파하고, 8년간의 휴전에 들어가는데, 이때 다미에타를 포기한다.   이렇게 십자군과 이집트의 아이유브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중에도 동로마는 분열되어 내전을 겪고 있었다.


7. 제6차 십자군

  122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제6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의 아이유브조가 타미에타를 상실함으로서 예루살렘 방어에 적극적일 수 없었다는 점, 십자군과 8년간 휴전을 하고 있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유브조가 살라딘이 살아있던 시절에 비해서 힘이 매우 약해졌다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으며, 다음해 십자군과 휴전을 10년 더 연장한데서 알 수 있다.   이미 아이유브조는 예루살렘까지 방어할 전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타미에타를 십자군에 상실했으며, 카이로는 불태워지기 했으니, 이집트를 방어하기에도 급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점령 이후 1229년 예루살렘왕에 등극한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내에 반황제파가 대두되자 신성로마제국으로 돌아갔다.

  1230년대에 들어서면 십자군전쟁에 예기치 않은 요소가 등장한다.   그것은 동쪽으로 불어온 태풍이었다.   몽골이라고 하는 강력한 태풍이 유럽뿐 아니라 이슬람세계를 휩쓸기 시작한다.   우선 1194년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이란을 탈취했던 코라즘이 1231년 몽골에 멸망하였다.   1236년에는 몽골이 동유럽 원정에 나서서 1237년 모스크바, 1240년 키예프를 각각 점령하였다.   또한 1241년에는 헝가리를 침입하고, 쉴레지엔을 침공하였으며, 핀란드까지 침공한다.   그 중 쉴레지엔 침공할 당시 리게닛츠·발시타트 전투에서 유럽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1242년에는 쿠자다그에서 루움 셀주크를 격파하였다.   루움 셀주크는 1078년에 루움 총독인 술레이만이 창건하여 1086년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하였다.   이처럼 몽골의 침입은 유럽과 이슬람세계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8. 제7차 십자군

  1248년. 제7차 십자군이 출발한다.   제6차 십자군은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끌었다.   1254년까지 이어진 제6차 십자군은 최후의 십자군으로 봐야한다. 하지만 제7차 십자군의 활동은 미미하였다. 1249년 카이로를 공격한 것 정도가 가장 큰 군사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7차 십자군이 진행되는 동안 이집트에서 아이유브조가 몰락하고 아이베크가 이끄는 맘루크조가 등장한다. 이후 십자군은 퇴색일로를 걷게 된다.   1260년 맘루크조의 장군 바이바르스가 일 칸국의 훌라구를 격파하여 시리아를 장악한 후에 술탄에 올랐으며, 1265년에는 맘크조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십자군으로부터 탈취한다.

  그 사이 동로마는 분열을 마치고 다시 부흥한다(1261). 하지만 동로마가 십자군전쟁에 끼어들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9. 십자군전쟁의 종결

  1268년에 맘루크조는 안티오키아 공령을 멸망시켰고, 1280년에는 팔레스타인 공략, 1281년에 알렙포(모술)를 침략하여 시리아에 진출한다. 1289년에는 트리폴리 백령을 멸망시켰으며, 1291년에는 악콘을 점령하였으며, 이로서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한다.   이어서 티루스·베이루트·톨로즈를 점령함으로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버렸다.   이로서 십자군 전쟁은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의지에 따라 시작된 이후 약 200년 만에 그 끝을 보았으며, 결과는 이슬람세력의 승리였으며, 바꾸어 말하면 십자군의 실패로 마무리 되었다.

  십자군은 위에 언급한 7차례의 큰 십자군원정이나 소년십자군 이외에도 10여 차례나 되는 소규모의 원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성지탈환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제대로 수행한 십자군은 제1차, 제6차 십자군뿐이었다.   제2차 십자군은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실패로 끝났으며, 제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강화를 맺은 후에 돌아섰다.

제4차 십자군은 어떤가. 가장 더러운 십자군으로서 동지라 할 수 있는 동로마를 물욕에 눈이 어두워 공격하였다.   소년십자군은 제대로 도착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집트에서 출발한 제6차 십자군은 이집트의 예루살렘과 다미에타 교환을 거부하였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성지를 원하였다면 그 제의에 동의 했을 것이다.   제7차 십자군은 최후의 대규모 십자군이었지만 성과 없이 끝나고 만다.   대규모 십자군 원정이 이런데 소규모인들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결국 십자군은 실패하였다.


(3) 십자군전쟁의 결과

 

1. 이슬람세계

  이슬람세계에서는 강력한 국가가 등장한다.   바로 오스만 투르크다.   1299년 오스만 1세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가 성립되었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는 차근차근히 동로마를 공략하였다.   1326년 동로마의 브루사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으며, 1330년에는 니케아를 점령한다. 1353년에부터 유럽침입을 본격화하여, 1357년 가리폴리 점령으로 발칸반도에 진입하였다. 1360년에는 왈라키아를 급습하고, 1363년에는 제1차 마리차강 전투에서 발칸 연합군을 격파한다.   1365년에는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의 고립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1369년에는 아드리아노플로 천도하여 침공을 더욱 본격화하였다.   1371년에는 제2차 마리차강 전투에서 세르비아를 격파하고 마케도니아를 침입한다. 1385년에는 소피아를 점령하고, 롯소보 전투에서 발칸연합군을 다시 격파하여 발칸반도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1413년 메흐메트 1세에 의해 제국통일이 완성되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지속적으로 동로마를 공략하였으며, 1422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으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스탄불이란 이름으로 오늘날도 터키의 수도로 이어져 오고 있다.


2. 동로마제국

  동로마는 십자군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사실상 1095년 3월에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사절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한데서 십자군이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로마가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이슬람세력에게 상실했던 지역을 잠시나마 회복할 수 있었으며, 더욱 큰 이득은 나라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십자군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동로마는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되기 훨씬 이전에 멸망하였을 지도 모른다.   십자군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세력이 동로마를 공격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는 분명 동로마의 수명을 연장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십자군이 동로마에 이득만 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제1차 십자군은 이동하는 길에 많은 약탈을 자행하여 동로마에 피해를 입혔고, 제4차 십자군의 경우, 동로마를 직접 공격하여 동로마에 라틴제국을 건설하기까지 한다.   결국 분열된 동로마는 한동안 내전을 겪느라 힘을 비축해야 할 시점에서 힘을 낭비하고 만다.

  1291년 십자군 세력이 완전히 축출되자 동로마는 이슬람세력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더 이상 동로마를 막아줄 방패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1261년 다시 부흥한 동로마는 끈질기게 나라를 지켜나간다.   1266년에는 미카엘 8세의 딸을 깁차크 칸국의 벨키칸에게 시집보내었다.   하지만 벨키칸이 그해 전사함으로서 별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어려운 형국에서 1677년 샤를이 알바니아왕을 자칭하여 독립하였으며, 미카엘 8세는 1281년이 되어서야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로마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스파니아의 카탈란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도 하고(1305~1307), 1342년부터 1349년까지는 텟살로니카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1349년에 루마니아인들이 몰도바 공국을 수립한다.   1388년에는 아테네 공국이 소멸되었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1423년에 베네치아에 텟살로니카를 매각하였다.   그리고 1430년 아케아 대공국이 소멸됨으로서 동로마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   물론 그동안 콘스탄티노플이란 요새에 기대어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해왔다.   하지만 1453년 콘스탄티노플마저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됨으로서 동로마는 멸망하고 만다.


3. 로마교회

  십자군 전쟁의 시작은 교황권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결과적인 실패는 교황권의 몰락을 함께 가져왔다.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난 몇 년 후인 1303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아나니 굴욕을 겪어야 했으며, 1305년 교황은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에 의해 프랑스에 억류당하는 상황을 겪는다.   이것이 1309년의 아비뇽 유수 로 이어졌으며, 1377년 아비뇽 유수가 종결된 이후에는 아비뇽 교황청의 교황과 로마 교황청의 교황,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대분열을 1417년까지 겪어야 하였다.

  1417년 대분열이 종결되었지만, 로마교회 교황의 권위는 더 이상 세속 군주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그저 종교적인 권위로 국한되었다.   결국 교황권의 절정기에 일으킨 십자군 전쟁은, 십자군 전쟁 차제도 실패하고 교황권의 약화 및 세속권의 상실을 가져온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4. 서유럽

  십자군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무려 200년 가까이 이어진 십자군전쟁은 서유럽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십자군전쟁 이후 유럽에서 향신료 소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위에서 말하였듯이 십자군전쟁은 200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가 6차례, 소규모는 10여 차례 십자군이 이슬람세력과 싸웠으며, 십자군이 세운 국가에서 짧게는 수개월에서 아예 정착하는 경우도 많았다.   십자군들은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이슬람식 식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기후를 비롯한 많은 조건이 서유럽과 달랐기 때문에 서유럽식 생활은 그곳에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십자군은 필연적으로 이슬람 문화와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이러한 요소들은 십자군들의 생활 자체를 바꿔놓았다.   이슬람식 생활에 익숙해졌으며,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는 이슬람식 음식에 길들여졌다.   그들의 식습관은 서유럽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찾았으며, 십자군전쟁기간 동안 동원된 인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은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그들 전부가 그러진 않았더라도 상당수는 향신료를 필요로 하였으며, 그것만으로도 많은 향신료를 소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그러한 식습관은 그대로 민간에도 퍼져 나갔으며, 이는 향신료 시장을 더욱 확장시켰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십자군전쟁을 전후의 서유럽 향신료 소비는 질이나 양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십자군전쟁이후 향신료 소비의 폭발적인 증가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향신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시아에서 생산된 제품들, 예를 들자면 비단이나 양탄자 같은 물품들의 소비가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이러한 물품의 교역은 전부 이슬람 상인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이슬람 상인들은 많은 중개이익을 올렸다.   그리고 그 부분은 고스란히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떠넘겨 졌으며,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더 높은 가격으로 서유럽 지역에서 상품을 판매하였다.   어느 정도의 가격 차이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이슬람상인이 원가의 10배의 가격으로 베네치아 상인에게 넘기고, 베네치아 상인은 다시 그것의 10배의 가격으로 서유럽 지역에 판매하였다.   그러므로 서유럽 소비자는 원가의 100배의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격이다.   하지만 실재로는 그 이상의 폭리를 베네치아 상인들이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이 신항로를 개척에 나선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즉, 지중해 무역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의 맞서 원산지와 직접 교역이 목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항해시대 개막이었다.

  십자군전쟁의 직접적 영향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 영향으로 발생한 것이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멸망하면서 많은 동로마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넘어오면서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동안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많은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의 부유한 상인들은 귀족 못지않은 삶을 영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삶의 질에 있어서도 높은 수준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이후 르네상스가 서유럽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서유럽에 큰 변화를 가져온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르네상스의 출발이 십자군전쟁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십자군전쟁이 갖는 의미를 알 수 있다.


(4) 십자군의 의미

  십자군의 의미는 단순히 종교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는다. 십자군전쟁이 종교 문제로 인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한 종교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화전쟁이었으며, 상업전쟁이었다.   또한 영토분쟁이었다.

  사실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던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종교전쟁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슬람, 셀주크 투르크에 빼앗긴 소아시아 지역의 회복을 원하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교황에게 사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군전쟁의 원인은 단순한 영토분쟁이었다.

  단순한 영토분쟁이었던 문제를 종교전쟁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교황이었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의 의도와는 달리 교황은 이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로 보았다.   즉, 성지의 회복 문제로 바라보았다.   교황이 그렇게 인식하는 순간부터 이 문제는 단순한 영토분쟁에서 벗어나 성전, 즉 종교전쟁으로 확장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토분쟁의 요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실 십자군전쟁을 통해서 동로마는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토분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번졌으며, 십자군은 점령지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십자군전쟁은 순수한 성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십자군에 참여한 귀족들은 영토를 바랐던 것이다.

  상업전쟁의 요소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제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의 제해권 장악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자신들의 무역 독점에, 이제는 방해물이 되고 있는 동로마를 제거하기 위하여 제4차 십자군을 사주하였다.

  또한 십자군전쟁은 문화전쟁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즉,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충돌하였던 것이다.   비록 시작은 영토분쟁이었지만, 십자군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서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 베네치아 상인과 동로마 사이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군전쟁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동서문화 교류의 새 장을 열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십자군에 참여한 많은 유럽인들은 이슬람문화에 익숙해졌으며, 본의 아니게 이슬람 문화의 전달자 역할을 하였다.   반대로 이슬람은 십자군을 통하여 유럽문화를 배웠다.   비록 십자군과 이슬람세력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나, 문화만큼은 그런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교류되었다.   이 문화교류는 이후 유럽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상업이란 관점에서 십자군전쟁은 지중해무역의 최전성기를 가져온다.   당시 동양의 특산품은 모두 지중해무역을 통하여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그런데 십자군전쟁 이후 아시아에서 주로 사용하던 향신료의 소비가 유럽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지중해무역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이에 더하여 많은 동양의 물품들에 대한 소비도 증가하여 지중해무역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런 지중해무역의 발전은 지중해무역을 장악하였던 베네치아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럽 문화의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르네상스의 밑바탕이 되었다.

  십자군전쟁은 단순히 별 이득도 없었던 전쟁이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십자군전쟁을 통하여 발생된 유럽의 많은 변화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단어는 지양되어야 하겠지만, 만약 십자군전쟁이 없었다면 르네상스가 올 수 있었을까.   르네상스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일어났을까.   또 십자군전쟁이 없었다면 향신료의 소비가 폭증하였을까.   향신료 소비의 폭증이 없었다면 대항해시대가 열렸을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보면 십자군전쟁이 서양사에서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십자군전쟁은 로마교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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