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조직신학組織神學]

조직신학(2) 조직신학의 필요성

好學 2009. 4. 26. 19:17

 

 

조직신학(2) 조직신학의 필요성

조직신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며 꼭 필요한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앙인들은 "복음주의"를 내세우며 또는 "성경중심주의"를 내세우며 조직신학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의 이유는 조직신학의 체계를 세우는데 필요한 "이성적 요소"와 "철학적 사고"를 신앙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속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되기보다는 개인의 주관에 의해 수시로 변하는 "치우친 신앙"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한 "치우친 신앙"의 가능성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화시켜 교리를 만들고 그 교리를 변호할 목적을 가지고 등장한 학문이 바로 조직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은 꼭 필요한 학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조직신학이 필요한 이유를 한번 살펴보기로 할까요?

첫째, 조직신학은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오늘날 어떤 신앙인들은 "이상하고 마술같은 신앙"을 참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나가는 두 사람이 대화하다가 A라는 사람이 "지난 밤에 회사일로 인해 밤을 세웠더니 참으로 피곤하군요"하고 말하니 그 말을 듣던 B라는 사람이 "그러십니까? 그러면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피로가 싹 가실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피상적으로 보면 B라는 사람의 신앙이 대단히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B라는 사람이 가진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는 기도를 무슨 소원이든지 이루게 하는 "마술 지팡이"쯤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잘못된 신앙행위를 인식하고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행위를 육성하기 위해 조직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조직신학은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연출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조직신학은 각 교파의 교리를 수호하는 역할만을 해서는 안됩니다. 조직신학이 각 교파의 교리를 수호하는 도구로 전락될 때 그것은 "치우친 신앙생활"을 조장하는 것이 됩니다. 이제까지 조직신학이라는 학문이 때때로 여러 신앙인들의 배척을 받은 이유는 바로 조직신학이 "기독교의 교리"를 수호하는 넓은 차원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교파의 교리"를 수호하는 좁은 차원에만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장로교에서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하면 목이 굳어져 누가 부르면 목만 돌아가지 않고 몸도 돌아가게 되며, 주일 성경공부가 오히려 예배보다 중시되는 경향이 있는 침례교에서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하면 머리가 두 배로 커지게 되고,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이 무조건 손을 내밀어 안수하기를 좋아하는 오순절교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 손이 두 배로 커지게 된다는 농담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조직신학은 자기 교파의 교리를 수호하려는 목적이 있기도 하지만 타 교파의 교리도 인지하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타 교파의 교리도 수용하려는 목적을 가짐으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조직신학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파괴하거나 슬며시 왜곡하는 이단을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는 어떤 파도 아닌 예수파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의 신앙을 은근히 자랑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입장에서 다 "예수파"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각 교파가 기본진리의 토대 속에서 나름대로 세운 조직신학적 체계를 우습게 여기는 언행은 삼가해야 할 언행입니다. 왜냐 하면 그러한 언행은 가장 신앙적인 모습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방에게 영적 교만이 가득찬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예로 역사상 이단으로 단정되었던 몬타누스주의와 재침례파 등이 그러한 주장을 했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몇몇 의심 가는 그룹에서 그러한 주장을 하며 자기 그룹만이 최고의 신앙을 가진 것처럼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입술로만 "예수파"임을 주장한다고 하여 그 밖의 모든 이상한 주장조차 진리로 생각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즉 어떤 단체가 입술로 "예수파"라는 것을 주장한다고 하여도 내적으로 성경이 밝히고 있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어긋난 주장을 한다면 조직신학은 그러한 주장이 오류임을 밝혀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은 이단을 방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학문입니다.

넷째, 조직신학은 넓은 범위로 말하면 기독교계 내에서 그리고 좁은 범위로 말하면 교단 내에서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 공동체에 10개의 그룹이 있다고 가정을 합시다. 그 중에 한 그룹이 자기의 주관적인 계시에 의해서 "92년 10월 28일 휴거설"을 주장한다면 나머지 그룹이 그렇게 주장하지 않을지라도 그 공동체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자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얼마지 않아 곧 공중분해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온전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조직신학은 필요한 것입니다.

다섯째, 조직신학은 아름다운 신앙심을 지속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역사상 수많은 이단이 명멸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단은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지만 어떤 이단은 꽤 오래도록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에도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몰몬교 등은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이단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이단들은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의 체계화된 조직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조직신학의 역할을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체계화시키지 아니하면 그 아름다움은 지속되고 발전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형제회(Brethren Church)"라는 교단이 있습니다. 그들의 경건생활과 신앙적 태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범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교단은 오늘날 가장 급속도로 쇠퇴하는 교단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 하면 이들은 "신앙심과 그 신앙의 열매만 아름다우면 되지 조직신학은 무슨 필요가 있는냐? 그것은 진리를 상자 안에 가두는 것이다"고 하며 조직신학을 우습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을 지속시키고 발전시킬 체계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캘빈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6세기 초 루터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그 와중에서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캘빈은 개혁을 부르짖는 형제 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혁을 외치며 군중을 자기편으로 이끌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박해받는 형제 자매들을 변호하기 위해 바젤시에서 조용히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붓을 놓았을 때는 기독교 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 강요"라는 책이 태어났습니다. 1536년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캘빈의 나이 겨우 26세였습니다. 칼빈이 26세에 저술한 이 "기독교 강요"는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천재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 강요"가 나오자 세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즉시 복음주의 신앙의 대표적 인물들 가운데 최상위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혁파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이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기독교 강요"가 개혁주의 교리를 변호하는 조직신학 책으로 개혁파 장로교회가 이 책을 토대로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장로교는 오늘날까지 기독교계에 심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은 이처럼 아름다운 진리와 신앙심이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조직신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서 자체를 연구하는 "주석신학자"들은 "조직신학자"의 연구를 신앙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조직신학자"들은 "주석신학자"들의 연구를 편협된 자기 중심주의가 개입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원래는 학문적으로 주석신학은 조직신학의 한 부분에 속해 있었는데 18세기 중엽 조직신학에서 주석신학이 분리되면서 서로의 학문이 경쟁관계에 서게 되었고 그래서 조직신학자들은 "주석신학은 기초가 없다"고 주석신학을 헐뜯고 주석신학자들은 "조직신학은 내용이 없다"고 조직신학을 헐뜯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참으로 불행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석신학과 조직신학은 동등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주석신학은 성서 자체를 상세히 해석하는 것이고 조직신학은 성서로부터 취한 진리를 통해 신앙의 뼈대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이 주석신학보다 성서를 덜 이야기한다고 해서 조직신학이 주석신학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직신학과 주석신학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주석신학이 조직신학을 멸시할 때 이상한 논리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시편 14편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 구절의 처음과 끝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없다"라는 구절만 인용한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해석이 가능해져 버립니다. 성경을 이런 방식으로 마음대로 주석해서는 안됩니다. 앞에서 소개한 예는 극단적인 예이지만 역사상 많은 이단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의 일부분의 구절을 자기의 주장에 맞는 대로 해석하였습니다.

반대로 조직신학이 주석신학을 멸시할 때도 이상한 논리가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조직신학과 주석신학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즉 조직신학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성경 구절에 대한 자세한 연구도 없이 성경의 한 두 구절을 이용해서 교리화시켜서는 안됩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성경에서 마태복음 27정 5절의 "유다가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누가복음 10장 37절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또한 요한복음 13장 27절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조합시키면 "너는 가서 자살하되 되도록이면 빨리 자살하라"는 교리가 되어버립니다. 조직신학이 꼭 필요한 것이지만 항상 주석신학과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조직신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