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35과 신명기(3): 모세의 두 번째 설교(2)(6-11장) 10

好學 2011. 4. 15. 20:13

제35과 신명기(3): 모세의 두 번째 설교(2)(6-11장) 10

 

 

 7-3. 축복과 저주의 길(18-32)

 

* 말씀의 생활화를 위한 지침(18-21)


  이 부분의 근본 의미는 각자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그 말씀을 모든 행동과 생활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부패한 인간들의 속성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떠나기 쉽기 때문에, 항상 그 말씀을 기억하고 모든 환경에서 말씀대로 살 수 있게 하셨다. 즉 손목에 말씀을 매고서 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고, 두 눈썹 사이에 말씀을 붙이고 늘 눈으로 말씀을 기억나게 하며, 말씀을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고서 출입할 때에도 항상 그 말씀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종교의식으로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는 보다 근본적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과 열심을 돕기 위해 취해진 예식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랑 없이 종교적인 열심만으로 말씀을 기록하여 옷에 달고 다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책망하셨다(마 23:5). (욜 2:13)에서도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고 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같이 말씀을 생활화하여 살 때에, 그들과 그들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직역하면 '그들과 그 자녀들의 날이 땅 위에 있는 하늘의 날들만큼이나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KJV). 이 말은 의역하면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날이 하늘이 땅 위에 펼쳐져 있는 한 영원토록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RSV).

 

 * 말씀 순종할 때의 형통함(22-25)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순종하는 이스라엘이 받게될 축복에 대하여 다시 한번 언급하였다. 여기서 '부종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다바크'는 '달라붙다', '굳게 매달리다', '바싹 뒤따르다'는 뜻인데, (10:20)에서는 '친근히 하다'로 번역되었다. 이는 하나님과의 전 인격적인 연합이나 친밀한 교제를 가리키는데, 모든 성도가 마땅히 취하여야 할 기본 자세이다(요일 1:3).

 (1) 자기보다 더 강한 민족들을 내쫓고 가나안을 차지함(23).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에 주어지는 구체적인 축복인데, 여기서 우리는 좋은 환경, 능한 처세술,  적절한 기회, 그리고 자신의 능력 등과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가 다만 하나님을 청종하면 진정한 승리의 삶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시 9:13-20 ; 눅 5:5, 6).

 (2) 가나안에서 강한 나라를 이루고, 레바논과 유브라데까지 영토를 차지할 것(24 절).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의 사방 최대 경계를 가리키는데,(창 15:18) 그 영토는 남쪽으로 아라비아 사막 광야 지대에서부터 북쪽으로 레바논에 이르기까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1:7). 여기서 '서해'(西海)는 일명  '대해'(大海)로도 불리는 지중해(민 34:6, 7 ; 수 1:4 ; 15:12 ; 겔 47:15, 19)를 가리키는데, 원어로는 '얌 아하론', 즉 '맨 끝의 바다'또는 '뒤쪽의 바다'란 뜻이다.

 (3)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당할 민족이 없을 것(25절).
  두려워하게 하신다('파하드')는 말과 무서워하게 하신다('모라')는 말은 둘 다 큰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두 표현은 두려움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기 위한 이중적 표현이다(2:25).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자 곧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것으로 자신을 무장한 자는 세상 권세가 결코 감당치 못한다(민 14:9 ; 왕하 6:16 ; 시 118:6  ;롬 8:31 ; 요일 4:4).

 

 * 복과 저주의 선포(26-32)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를 그들의 눈앞에 세워 놓으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행동에 따라서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 모세는 그들에게 말씀을 순종하여 축복의 삶을 살라고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순종을 원하시되 그 마음과 의지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저주의 선택권을 전적으로 인간들에게 맡기셨다. 모세는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신들을 좆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26-28).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지시했다(29).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서 레위인들이 선창하는 것을 복창함으로써 엄숙한 비준으로서의 동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다. 그들이 직접 땅을 밟고서 이 언약을 확인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기 위해서 법정에 들어섰다는 것을 말한다. 이 두 산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사람을 두 편으로 나누어 축복과 저주를 주고받을 경우에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를 응답 송으로 찬송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러한 모세의 지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때 따르는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보다 생생히 교훈하기 위함이었는데, 훗날 여호수아의 주도하에 실제로 거행되었다(수 8:30-35).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그 사이의 골짜기 동쪽 입구에는 세겜(창 12:6)이라는 성읍이 있다. 이 중 축복의 산으로 선정된 그리심 산(27:12)은 해발 854.7m에 달하며, 저주의 산으로 선정된 에발 산(27:13)은 해발 919.5m이다. 그런데 이 두 산이 왜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각각 나뉘어  선택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즉,

 

 (1) 위치상 그리심 산은 항상 햇빛이 들지만, 에발 산은 그늘이 진다(Schultz, Keil).
 (2) 그리심 산은 숲이 울창하나, 에발 산은 바위산이다(Strauss, Raumer, Voelter).
 (3) 그리심 산은 오른편에, 에발산은 왼편에 있다(마 25:33, 34, 41).

  이 두 산은 가나안 땅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비슷한 높이의 두 산이 마주 보고 있고, 약 700년 전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와서 하나님께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지점으로서(창 12:6, 7), 위치나 의미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해 지는 편으로 가는 길은 팔레스틴의 동서를 관통하는 길, 즉 세겜을 경유하여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를 통과, 지중해 연안으로 나아가는 교통로를 가리키며(Robinson, Ritter), 길갈은 여리고 평야의 길갈(수 4:19 ; 5:2-9)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서, 이곳은' 세겜 동남방 4km, 그리심 산 동쪽 1.6km  지점에  있는 현재의 '일일리아'(Jiljilia)인 것으로 추정된다(Keil, Baumgarten, Lange). 그리고 모레는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이른 후 장막을 친 곳으로  세겜 부근이다. 모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가나안 정복의 확신을 심어주고, 정복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라는 권하고 있다.

 

                                      

< 교 훈 >
1.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에서나 생활화되어 실천될 수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좆아 살 때에, 우리의 날이 장구해지며, 강한 사람들을 물리치고 약속된 기업을 얻게되고, 주변 사람들도 그들을 보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3. 성도들은 자기 입으로 말씀의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에 대하여 축복과 저주를 선포해보는 일이 필요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 말씀에 대한 다짐을 더 굳게 할 수 있고, 하나님께 말씀대로 살게 될 것을 더욱 다짐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