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이스라엘의 역사 4

好學 2011. 1. 30. 20:58

이스라엘의 역사 4

 

 

13.중동 평화

 

국제 문제가 복잡하지 않은 것이 없겠느나, 으뜸 가는 것이 있다면 단연코 중동 문제일 것이다.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라고도 불릴 만큼 그 분쟁의 역사나 정도가 깊고 크다.
 20세기 후반에도 이 지역에서는 여섯 차례 이상의 큰 국제 전쟁이 일어났다.
최근에 일어난 걸프 전쟁도 이에 속한다.
 
이 지역에서의 분쟁은 다른 지역의 분쟁과 그 역사와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실질적인 분쟁의 원인은 영토 분쟁임에 틀림이 없으나, 지정학적으로 이 지역은 3개 대륙의 교량으로서 고대로부터 주도권 쟁탈의 사움터였다.
 
또, 세계 3 대 유일신 종교가 시작된 곳으로서, 그들 간의 깊은 신앙적 차이와 더불어 역사의 골도 상당히 깊다.
성도 에루살렘의 경우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또, 이들은 본디 유목 민족들로서, 이들이 형성해 온 문화와 오랜 전통 가운데 '피의 복수법'이 널리 행해 지는 이유로 인하여, 서로 간에 그칠 줄 모르는 보복과 재보복이 되풀이되어 오고 있다.
 
현대 사회는 지구 모퉁이의 한 분쟁이 그 지역에만 영향을 기치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세계는 한 가족으로서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여 서로 간의 이해와 폭넓은 관심이 요청된다.
 
1969년 2월, PLO가 창설되면서 의장에 아라파트가 취임하였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랍-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은 6일 전쟁 이후 요르단 영내에 거주하면서 게릴라 활동을 해 왔는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요르단에 자주 침입, 격전이 지속되자,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1970년 9월 17일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다.
 
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검은 9월단'은 요르단의 타르 수상을 카이로에서 암살하였다. 또, 1972년 5월 30일, 팔레스타인 게릴라는 일본 적군파를 시켜 텔아비브 공항을 공격하여 승객 다수를 사상하게 하였다.이를 계기로 요르단은 1972년 팔레스타인의 본부를 요르단에서 추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요르단 주변 아랍국가들로부터 심각한 비난을 받으며 아랍 연맹에서 축출당하였다. 그 해 9월 5일,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촌을 급습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자, 이스라엘 선수들은 즉시 귀국하였다.
 이어 '검은 9월단'은 미국 낙슨 대통령과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수상의 회담에 반대하여,
1973년 3월 1일에 수단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서 미국 대사를 포함한 3명의 외교관을 살해했다.
 
요르단에서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긴 PLO는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계속적인 테러를 자행해 오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수시로 레바논의 PLO 본부를 공격하여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그 후 PLO는 아프리카의 튀니지로 그 본부를 옮겼다. 한편, 1987년 12월에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어린이와 부녀자를 앞세워 반이스라엘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 나왔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은 아랍-팔레스타인들에게 발포하여, 현재까지 약 1,000여 명이 사살되고, 20,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15,000여 명이 감금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박해가 세계에 알려지고,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일자,
1988년 '팔레스타인 민족 평의회'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선언하고 아라파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다음 해 제네바에서 열린 UN 총회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회원국 절대 다수의 지지를 얻어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독립 국가'로 인정되어, 몇몇 국가에 대사관을 상설하고 '영토와 주권 없는 나라'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최소한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회복하여 자치 정부 혹은 독립 국가를 이루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다


14.현대 아랍 무제의 근본적 원인과 전망.

1946년, 유대 철학자 마틴 부버는, 시온주의자들의 정책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과 지역 협정에 그 기초를 두지 않고 국제 협정에 의해 '정복'할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는 해석을 받게 된다면, 시온주의에 대한 아랍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할 뿐 아니라, 아랍인측으로 보았을 경우 유대인과 아랍인 양 민족의 상호 이해를 위한 모든 노력은 의심을 받게 되어, 아랍인은 이러한 노력이 진정한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고들 상상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한 유다 마그네스도 말한다. "유대 국가의 실현이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력에 의하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다.... 아랍인들에게 유대 국가 소리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유대 국가는 그 정의에 있어서, 유대인이 그 유대 국가 내에 거주하는 타 민족을 통치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야보틴스키 역시 이전부터 이러한 분쟁의 가능성을 에견하였다.
"자국을 스스로 내놓을 국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도 그렇지. 힘으로 강점당하지 않는 한 주권을 포기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결국 시온주의자들로부터 파문당하여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처음부터 시온주의자들의 독립 정책은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배태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 역시 그들에게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47년 11월의 UN결정은 결정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영구 분쟁의 불씨를 낳고 말았다. 이들 열강들은 영국의 밸푸어 선언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비유대인들의 권리와 지위가 손상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입장이었고,
또 루스벨트나 트루먼 대통령도 "아랍과 유대, 두 민족에게 충분히 자문을 얻은 다음이 아니면 팔레스타인에 관한 어떤 결정도 내링 않을 것이며, 도 아랍측 이익에 반대되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겠다." 확약하였던 바가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 양자 간의 이해의 차이를 줄일 만한 어더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두 민족 간의 상호 불신과 테러는 상황의 개선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PLO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이스라엘을 보는 기본 입장은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갈등의 본질은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의 두 이데올로기가 대립하고 있는 것이지, 두 인종이 대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반유대주의 정책의 희생자들인 난민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느냐 아니면 '영원한 유대 민족 국가의 부활'로 보느냐에 따라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질 것을 나타낸다. 왜냐 하면,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이나 다른 제국들의 자본가들과 전혀 무관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들의 이상을 위해 이들과 부분적으로 결탁하였음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결코 그들의 조종을 받은 자들로 규정될 수는 없다. 그들은 이런 자기들의 오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귀향'이라는 굼과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비어 있는 땅'을 찾아온 것이며, 그 곳은 그 시대에 영국의 식민지였을 뿐이다. 문제는 1897년, 헤르츨이 선언한 "팔레스타인에 공법으로 보장되는 유대 민족을 위한 고향을 세운다."는 입장이 , 1917년 밸프어 선언의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는 선언과 상호 대립된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엑 있어서 이스라엘의 독립은 약 2,000여 년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씻는 명예 회복이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방랑과 수난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이다. 국가 없던 이스라엘의 흩어진 백성들의 생존권이 보호되어야 하듯이, 역시 팔레스타인에 나라 없이 살던 원주민들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들도 인간이며,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국가를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1961년 1월,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에서 개최된 공개 토론회에서 행한 역사가 토인비의 견해는 옳다. "1947년, 유대인이 아랍인에 대해 취한 태도는, 나치스에 의한 600만 명의 유대인 대학살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일은 예전에는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일이다.
 
1991년 1월 15일 자정을 기해 시작된 걸프 전쟁은 중동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 주었다. 먼저, 걸프 전쟁은 중동의 아랍 국가들의 분열을 가져다 주었다. 이라크의 침략에 대한 입장이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양분되었으며, 특히 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아랍 제국의 군사력은 전후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축으로 바뀌었으며, 아랍 연맹의 방향이 각 아랍 국가의 국제적 이해 관계에 따라 분열된 셈이다.
특히, 시리아의 국제적 지위, 전후 미국과의관계 변화를 대단히 중요한 중동의 변화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걸프전 당시 PLO의 아라파트 의장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면서 심각한 재정난과 정치적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은 팔레스타인의 전적인 지지를 얻어 왔던 아라파트의 정치력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에 소련에 붕괴로 말미암아 민족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실상 설득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지위가 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동에서의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동 진출의 교두보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걸프전으로 말미암아 다중 외교를 선택한 미국은 이스라엘의 국내 문제와 관련하여 외교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이 걸프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이스라엘로 건너온 이민자들의 정착을 위해 지원하기로 한 300억 달러의 지급을 이스라엘 내의 아랍 팔레스타인의 법적 지위 문제를 지적하면서 중단한 사실이다. 여기에 또, 전쟁 참가 당사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로 날아든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은 이스라엘 국민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군사적 힘의 우위를 통하여 자국의 안보가 유지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교훈적으로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걸프전 이후 이러한 국제 관계의 변화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인식 전환을 계기로, 미국과 프랑스가 중재하여 제 1 차 중동 평화 회담이 1991년 11월, 에스파니아의 마드리드에서 열려, 6일 전쟁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 이후 워싱턴 등지에서의 여러 차례의 회담은 서로의 입장의 차이로 인하여 결렬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최근에 '팔레스타인의 구향 권리법'이 제안되었는데, 미국이 이에 찬성하고 있어서 이스라엘은 긴장을 하고 있다. 한편, 1992년 6월 24일에 치러진 이스라엘 총선거에서 보수 집권당인 리쿠드가 패배하여 물러나면서, 소수 정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출범한 노동당은 평화 협상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노동당의 당수인 라빈과 외무부 장관인 시몬 페레스는 점령지 내의 아랍-팔레스타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꾸준히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1992년 9월 2일, 국민들에게 점령지 포기를 강력히 호소하면서, '성서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의 영토 전부를 장악하겠다는 희망을 버리라.'고 촉구하였다. 라빈 총리는 이 날 연설을 통하여 '대 이스라엘 건설에 관한 종교적 환상을 떨쳐 버려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고, 이스라엘은 중동 평화 회담에서 아랍측과 타협책을 강구해 나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국력이란 영통의 크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신념과 사회, 경제, 국방 체제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달린 것'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9개월 내에 점령지 내의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에 관해 합의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노동당의 신 사고는 단순히 중동 평화 정착뿐 아니라, 나아가 평화 정착 후 아랍 세계의 기름과 이스라엘의 고도 산업 기술의 결합을 통한 중동 경제의 블록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 보다 미래 지향적인 사고이다. 페레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단순한 정치적 평화가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한 아랍의 기름과 이스라엘의 고도의 기술이 연합한 세계 경제의 중심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역설해 왔다.
 
이스라엘 내의 많은 극우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페레스는 냉전 종식이 중동 지역에 가져다 준 환경 변화 속에서, 불신과 편견에서 벗어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중동의 새로운 평화 정착이야말로 양 대립 당사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신념 아래, 과거의 "팔레스타인과는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는다."는 정책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오스로에서의 구준한 비밀 접촉 결과,
1993년 9월 13일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는 워싱턴에서,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중동 평화안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미결인 채로 남아 있는 수많은 문제들 때문에 이 평화안이 팔레스타인에 곧바로 안정된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백년간 게속되어 온 이 지역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희망적인 역사적 사거이 아닐 수 없다.  
 
◎ 참고문헌 ◎
 ☞ 최창모,「 이스라엘 史」 , (서울: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3)
☞ 레온 우드, 김의원, 「 이스라엘의 역사」 ,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