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이스라엘의 역사 3

好學 2011. 1. 30. 20:56

이스라엘의 역사 3

 

10.유대인 대학살.

1929년의 세계는 대공황이라는 바람에 휩사였다. 1933년 1월 30일, 정부를 이양받아 독일 수상이 된 이틀러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반대자들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계획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20세기의 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독일 내의 유대인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었다.
즉, 이들의 스로건은 '유대인을 처단하자'는 것이었다. 나치 정부는 유대인 지도자, 법률사 등을 체포하였으며, 유대인이 저술한 책을 불살랐고, 유대인의 상점과 공공 건물에 방화를 하였다. 1935년 6월에 독일 의학 협회에서는 의학 잡지에 『유대인과 결핵균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유대인을 숨겨 주는 모든 이들에게 결핵 감염의 위험성을 경고하기까지 했다.
 
 1939년 11월과 12월에는 모든 유대인들은 도시의 특정 구역인 게토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첫 게토는 1940년 2월 로지에 세워졌으며, 1940년 11월 바르샤바 게토가 세워졌다.
1941년 10월에는 게토 밖에서 발견된 유대인은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을 선언하였다. 게토에서의 통치 독일에게 있어서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우선 유대인들을 감독하고, 앞으로 멸종시키기 위해 한곳으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얼마 동안 경제적 착취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대규모의 게토에서 군사 물자를 만들기도 하였고, 작은 곳에서는 도로 건설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이 제공되었을 뿐, 인간적인 삶의 모습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1940년, 폴란드에 설치된 여러 게토에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며, 예배와 교육 등 종교 행위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음악과 연극 활동을 하였고, 카페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얼마간의 활동마저 1941년 중반에 와서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게토 안에서의 기아와 질병, 전염병의 만연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갔으며, 생존을 위한 초인적인 노력도 허사가 되었다.

11.현대 이스라엘 독립과 그 과정.
 
제 2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팔레스타인의 모든 유대인들은 밴구리온이 제 21 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제안한, "히틀러와 싸우자"는 연설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히트러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유대 군사력을 위한 조직을 제안하였으며, 또 전쟁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으나, 영국 정부는 이들이 팔레스틴에 남아 줄 것을 엄격히 요구하였다.
 
1942년 4월, 바이츠만은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의 빌트모아에서 가진 유대 지도자들과의 화합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정치적 활동'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이를 후에 '빌트모아 계획'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선언의 내용은 ①팔레스틴으로 향한 대규모의 유대인 이민의 문을 열것. ②이민을 포함한 국가 발전을 위한 모든 관련 업무를 유대기구로 통합할 것. ③팔레스틴에 유대 독립 국가 설립을 요구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빌트모아 계획서는 1942년 11월 ,시온주의 대표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영국 처칠의 연립 내각은 유대 국가 건설을 지원 할 것과 팔레스타인에서 다수의 유대인이 정착하는 문제에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1945년 7월 노동당이 재집권하였으나, 여전히 이민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대 기구는 즉각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설립을 요청하였으나, 외무 장관 베빈은 그 해 11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위한 영국의 이중 의무'를 거듭 천명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선언은 팔레스타인이 유대인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님을 의하고 있으며, 유대인 난민들에게 유럽에서 다시 재건설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츠만은 10월, 런던에 건너가 베빈 장관을 냉대 속에 만나 이 문제를 논의 했으나, 그는 정부의 이같은 백서는 유효하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한편, 베빈 장관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토의할 영미 심의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여, 1946년 1월 7일에 워싱턴에서 영국과 미국의 동수(同數) 위원회가 설치 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유대인들의 토지 거래 금지법을 무효화시켰으며, 영국의 위임 통치권을 UN이 인수하는 것도 제안하였다. 이로부터 차차 대 독립을 위한 진보가 이룩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4월, 두 척의 배가 불법 이민자를 싣고 이탈리아의 항구 라스페치아를 떠나려고 하자, 영국은 압력을 가하여 이 배를 억류하였다. 그 배 안에 있던 전 유대인들은 석방될 때까지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사건이 유대인의 승리로 끝나자 더 많은 이민자가 이주를 희망하였으나, 영국은 계속하여 이민을 방해하고 금하였다. 또 불법 입국자를 잡아 텔아비브에 수감하였다.
 
1945년부터 독립할 때까지 약 7,000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불법으로 이민해 왔으며, 이들가운데 약 5000명은 체포되어 사이프러스 섬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이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 올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UN이 관할해야 한다는, UN이 제안한 위임 토치권에 관한 안이 영국에 의해 거부되자,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이 수립되었다. '
모리스-그래디 안'이라 불리는 이 계획서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유대인(17%), 아랍인(40%), 그리고 두 영국 지역으로 분할한다는 것이다. 또, 영토 전체의 관할은 영국이 담당하고, 유대 및 아랍지역은 자치로하는 안(案)이었다. 같은 해 5월에 시작된 안보 이사회에서 소련의 대표 그로미코는 '자기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들의 정신을 지지한다."고 발언하였다.
 여기서 이사회는 UNSCOP를 발족하여 11개 국가를 선출 하였다. 급기야 1947년 11월 29일, UN안보 이사회는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로 분할하여 독립시킨다는 역사적인 결정을 33:13으로 가결하였다.
영국은 1948년 2월 1일에는 유대인 이민을 항구를 열고, 같은 해 8월 1일에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다.
UN안보리가 열리는 동안, 아랍인들은 분할 계획을 전면 반대하고 나섰다.
UN안보리의 결정 직후부터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자동차와 건물에 공격을 시작하였고, 주변 아랍 국가에서 소위 '해방군'에 들어와 이를 지원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묵과하였다. 유대인들도 이에 맞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마을 입구 초소를 경비를 강화하였다.
 
 1948년 3월, 아랍인들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면서 예루살렘과 네게브, 서부 갈릴리의 통로가 차단되었다. 이 때까지 약 1,200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하고, 체코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선적하여 싣고 들어왔다. 이 무기를 사용하여 4월 초'나흐숀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을 다시 열였다. 그러는 동안 키브츠 미시마르 히멕은 아랍 '해방군'들에 의해 공격당했다.
 
1948년 4월 중순과 5월 중순 사이에 '하가나'는 하이파, 티베리아, 사팟 등을 정복하고, 5월 13일에는 텔아비브 위성도시인 욥바를 점령하였다. 예루살렘에서는 4월 13일에 스코프 산으로 가는 의사와 간호사가 탄 버스가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가다가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아 전원 살해된 사고가 발생했다. UN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전쟁을 막는데 성공하지 못하자, 1948년 4월 16일, 안보 이사회를 소집하여 이 상황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이 때, UN은 UN의 결정을 곧 수행할 것을 토의하였으나, 영국이 UN 대표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나서는 바람에 아무런 새로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폐회되었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하티크바'라는 제목의 국가가 불려진 후, 벤구리온이 독립 헌장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이 선언은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건국의 지도자들이 알파벳 순서대로 서명 하였다. 이스라엘 국가의 정부는 임시 국민 의회에 의해 곧 비준되었다. 독립 선언 직후 미국과 소련 정부로부터 이스라엘 국가는 사실상 인정되었다.
그날 자정 1 시간 남겨 둔 시간에 영국 식민지 대표는 하이파 항을 떠났고, 다음 일요일에는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으로 하임 바이츠만이 선출되었다. 아랍군의 공격으로 전쟁은 발발하고 이러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UN은 중재자로 스웨덴 사람인 버나도트를 파견하여 휴전을 제안 하였다.
 
그는 1947년 11월 29일 UN의 결의를 지켜 줄 것을 이스라엘에 요구하였다. 이 안은 얼마 후 아랍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랍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침략하였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에 더 많은 영토를 내주게 되었다. 휴전이 끝나던 7월 9일부터 10일 동안에 이스라엘은 나사렛을 점령했고, 갈릴리와 룻다와 람레를 점령 하였다. 결론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의 꿈인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은 시온주의 창시 자인 헤르츨의 예언대로 50년 만에 세워졌다. 이렇게 하여 한 예언가의 꿈은 이룩되었으며, 유럽에서의 수없는 박해와 대량 학살 가운데서도 살아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땅과 주권을 가진 새로운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국가 건설의 꿈은 많은 이들의 피흘림의 결과였으며, 아직도 산적해 있는 많은 과제들을 두고 있는 이스라엘은 어떠한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12.이스라엘의 정책과 중동 전쟁.1

신생 이스라엘을 지탱해 주고 있는 두 요소가 있다면, 첫째가 대량 이민이고, 둘째가 아랍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전이다. 전자가 이스라엘의 성격을 '다원 사회'로 규정하는 요소라면, 후자는 이스라엘의 '안보 의식'을 보다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이스라엘은 약 100여개 국가로부터 이민해 온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각각 역사적, 종교적, 정서적 뿌리는 함께 하고 있지만, 언어와 삶의 양식 및 습관은 달리하고 있는 공동체이다.
새 이민자들은 대체로 '아슈케나잠'과 '세파르딤'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 지금가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아랍 국가로부터의 끊임 없는 도전과 생존의 위협 속에서, 이들은 개인의 생존권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생존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관심은 '공동체의 생존과 통합'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흩어짐'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다시 '모음'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신학적 사상이 구약 시대부터 있었다.
 
 이 사상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이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2000년 동안의 디아스포라의 삶이 히틀러의 대량학살로 끝나면서 더욱 간절한 희망으로 부각되었다. 그들의 꿈인 '팔레스타인에로의 자유로운 귀향'이 보장되면서 이 일은 계속 수행되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1950년에 제정된 '귀향법'이 여전히 발효 중이고, '이민부'를 두어 이 일을 전담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이민 정책은 다산 정책과 함게 인구 증가의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최근 소련 몰락 이후 약 400,000명의 새 이민자와 이디오피아 등에서 대량 이민을 추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1951년 봄에 시리아와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으며, 산발적인 공격을 해 왔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격퇴하였다.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아스왈 댐 건설로 인한 재정 확보를 명목으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이 운하를 봉쇄하여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을 통제하는 한편, 이스라엘 상선을 강제로 나포하기도 하였다.
 
계속되는 이집트와 산발적인 충돌은 1956년 10월 29일, 시나이 캠페인으로 번져 제 2 차 중동 전쟁이 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100시간 만에 공수 부대와 탱크를 앞세우고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에 이르렀다. 많은 무기와 6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당시의 국방상은 벤구리온이었고 참모 총장은 샤론이었다.
 
11월 3일, UN안보리는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하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하여, 영국 및 프랑스 연합군을 파견하여 이집트를 공격, 11월 7일에 휴전을 성립시켰다. 소련과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점령지 반환을 위해 압력을 가했으며, 기름 공급 협정을 취소하였다. 이스라엘은 1957년 11월 7일,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와 협정하여 시나이 반도를 포함한 가자 지구를 이집트에 되돌려 주었다. 이스라엘은 독립 후, 1949년 5월 11일 UN 총회에서 UN회원국이 되었다.
 
1949년 12월 9일, 카톨릭과 아랍이 주측을 이루어 예루살렘을 국제 도시화하자는 새로운 제안이 나왔으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하고 수도로 재확인 하자, 많은 나라가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등 압력을 가해 왔다. 또, 가장 어려운 문제는 블록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변 아랍 국가에게 많은 무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나라는 영국이었다. 1950년 5월, 이스라엘은 소위 중동 국가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국경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강대국들의 무기 공급에 반대하는 선언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3국 선언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강대국들과 외교적 관게를 정상화시켜 나갔다. 냉전 체제에서 중국과 미국, 소련, 동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대사급 외교 관계의 길을 열어 놓았다. 1961년, 아랍 연합 공화국이해산된 후 시리아는 계속적으로 국경분재을 일으켜 오다가, 1963년 이스라엘이 추진하고 있던 물 공급 계획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시리아는 여러 차례 산발적인 공격을 이스라엘의 갈릴리 지역에 해 왔다.
 
 1967년 4월 7일, 이스라엘은 기습으로 시리아의 수도 마다스쿠스를 공격하여 시리아가 보유하고 있던 미그 6대를 파괴하였다. 소련은 즉각 이집트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며, 5월 14일, 이집트의 참모 총장 무하마드 파우지가 다마스쿠스르르방문하고 돌아왔다.
5월 15일, 이집트의 2개 보병 사단이 시나이 배치되었고, 시나이 반도에 주둔학 UN군에게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에서 물러나 줄 것을 명령하였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만이 무기 원조를 위해 협력했다. 미국은 외교적 해결을 요구하는 입장이었고, 이러한 외교적   노력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랍국가들은 차차 군사적 압력을 가해 왔다.
 
 1967년 6월 5일 새벽 7시 46분, 이스라엘 전투기는 이집트 국경을 기습적으로 넘어 카이로 공군 기지에 배치, 출동   준비가 완료된 수백 대의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및 이라크 전투기를 요격했다. 이로써 제 3차 중동 전쟁은 시작되었다. 지상전 역시 시나이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싸워 나갔으며, 기갑 부대의 활동이 눈부셨다.
이집트나 시리아의 신예 소련제 탱크에 비해 이스라엘의 탱크는 열등하였으나 군사들은 월등히 앞서 싸웠다. 이집트에 전투는 3일 만에 수에즈 운하 및 가자에 이르는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전쟁이 발발 되자, 이스라엘의 수상 에시콜은 UN을 통하여 요르단에게 평화적 유지를 제의했으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이를 거절하고 예루살렘 유대인 지역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맞선 이스라엘은 6월 7일, 예루살렘의 구도시를 탈환하고, 그 다음 날에는 요단강까지 점령 하였다. 전쟁의 숭리는 이스라엘 군대의 기동성과 현대적인 군사 작전의   결과이며, 또 아랍 군대의 약함 때문으로 요약된다. 나세르가 6월 9일에 사임을 전격 발표하자  수많은 지지 군중들의 데모가있었으며, 결국 사임 발표를 취소하는 정치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랍 국가의 군사적, 정치적 실폐가 패배를 자초한 셈이다. UN은 1967년 11월 안보리에서 UN 결의 242조를 통하여 중재를 시도하였다. 이 결정은 "이스라엘은 6일 전쟁 이전의 군사 분계선으로 철수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철수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아랍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의 아랍 점령 반환'을 선동하며 압력을 가하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느 전쟁 패배로 당한 그들의 정치적 궁지를 어떻게든 빠져 나와야 했다. 드디어 1973년 10월 6일, 대속죄일에 기습적인 이스라엘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제 4 차 중동   전쟁이었다. 24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이들의 전력의 절반을 파괴하였고, 다음 날에는 기선을 제압하고 공격을 하여 밀어붙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은 골다 메이어였으며, 국방상은 모세 다얀 이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아랍국들은 더 이상 무력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음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집트와 요르단은 1973년 12월 21일에 열린 제네바 회담에 참석하였으며, UN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비무장 지대에 1250명의 UN감시군을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3·4차 중동 전쟁을 통해 외교적 손해를 많이 입게 되었다. 그 동안 관계를 맺어 온 많은 나라들과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1948년에 선포된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에서는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에 의해 직시된 자유, 정의, 평화에 기초한다. 모든 국민은 종교, 인종, 성에 의한 차별을 받지 않으며, 사회적, 정치적 동등권을 가진다. 종교, 양심, 언어, 교육, 문화의 자유를 보장하며, 모든 지역의 성지를 보장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의회 민주주의 제도를 기초로 하는 입법.행정.사법부가 있다. 삼권의 분립을 기초로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다. 행정부는 입법 부인 크네세트의 신임에 의해 설치되며, 사법부는 법률에 의해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120명의 크네세트 의원은 매 4년마다 실시되는 비밀, 비례제에 의한 총선거에서 선출되며, 국민은 정당에 투표한다. 투표 결과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행정부 구성의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종교 정당을 비롯한 각 이념과 계층을 대변하는 수십 개의 정당들이 군림하며,
다수당인 노동당과 보수당인 리쿠드가 정권을 교환해 가며 상호 견제와 경쟁을 통하여 정치 발전을 꾀하고 있다. 의회가 선출하는 임기는 5년의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이며, 정당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12.이스라엘의 정책과 중동 전쟁2.
 
히브리어의 '나시'는 고대 이스라엘의 최고 의회였던 산헤드린의 수반을 일컹는 용어였다. 대통령은 법관, 이스라엘 은행장 및 외교관의 임명을 당당하면서,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고, 2회에 걸쳐 연임 될 수 있다. 내각의 수반인 수상은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며, 25명의 각료를 임명하는등 의회 정치의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 수상과 국회 의원들의 임기는 4년이다. 법원은 독립되어 있으며, 9명으로 구성된 대법원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 밖에도 종교법원이 있다.
 
종교적인 사안이 되는 유대인의 결혼, 이혼 및 개종에 관한 재판을 시행한다. 이스라엘은 불문율을 기초하고 있으며, 1950년에 제정된 귀향법등의 특별법이 있다. 이스라엘은 지방 자치 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48개의 시의회와 143개의 지방 의회가 있으며, 53개의 지역 의회가 있다. 시장과 지역 의회 단체장은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읍과 지방 의회 의원은 크네세트의 국회 의원의 수에 비레하여 임명한다.  
 
이스라엘은 1993년 1인당 GNP는 약 13,000 달러로 세계 20대 선진 국가에 해당된다. 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각은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 총생산은 그리 많은 편이 못 되며, 국가 보안이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농업을 비록한 첨단 과학 기술은 국제 무대에서 그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 25년간 이스라엘은 연 10% 정도의 높은 경제 성장율을 보여 주었다.
이는 네 차례의 전쟁, 대규모의 이민 등 내외적 변화 속에서 이룩한 성과라는 점에서 '경제 기적'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1984년을 비롯한 몇해 동안의 높은 인플레이션은 이스라엘 경제를 위축시키기도 하였다. 외채도 1991년 말 약 240억 달러 가량이나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제는 부족한 천연 자원과 제한된 경작지, 보잘것 없는 내수등의 악조건 때문에 일찍부터 고급 노동력과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의 수출에 읜하고 있다. 특히 E·C 공동체에 판매하고 있는 많은 농산물은 외화 획득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나아가 무기 산업을 비롯한 첨단 과학 기술, 의료 정밀 기계, 통신 과학, 정밀 화학, 컴퓨터, 다이아몬드 산업 관광 산업 및 사해 생산물 등 비교적 부가가치 높은 산업에 주력을 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선진국형으로 잘 발달된 사회보장제도는 기본 임금제, 노동 시간 및 세제등을 통하여 소득의 균형을 이루고 있어, 매우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유대인은 단일 민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수천 년 동안 흩어져 산 민족답게 그들은 세계 약 130여개 국가로부터 이민을 온 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만도 현재 약 80여개나 된다. 이들은 각각 다른 전통과 문화, 가각 다른 정치 이념과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국가를 건설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동서 유럽, 아메리카 및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이민을 온 자들을 아슈케나짐이라 부르며, 이들은 재부분 고대 히브리어와 독일어를 혼합하여 만든 『이디싱 어』라고 불리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치 독일로부터의 박해를 건너온 생존자들이다. 현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바로 아쉬케나짐이며, 정치, 교육을 비롯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스페인과 포루트칼을 비롯하여 지중해,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에서 살다가 15세기에 추방되어 이스라엘로 이민을 와사는 자들은 세파르딤이라고부른다. 이들은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들로서, 음악, 의복, 음식 등 전통적인 유대 문화와 더불어 아랍 문화와 전통의 영향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다.
 
 독립 이후 이민자들과 구별하여 본토에서 태어난 인구가 차차 증가하는데, 이들을 가리켜 히브리 『어로 사브라』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본디 '차바로'라 불리는 선인장을 일컫는 말로, 겉에서는 가시가 돋아 접근이 어려우나 속은 달콤한 맛을 지닌 선인장의 특성이 곧 사브라의 특징이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 나아가, 이스라엘 영토 내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아랍인들은 소수 부족인 드루즈족이나 베두인족들과 함께 소수 민족으로 취급되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의 인구는 약 500만 명으로, 이 가운데는 유대인 410만 명, 비유대인 100만 명이며, 점령 지역 내의 아랍-팔레스타인은 약 150만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의 90%는 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최근 많은 이민자들로 인해 인구는 게속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인구 54만 명의 수도 예루사렘을 비롯하여 텔아비브, 하이파, 브엘세바,페타크티크바 등은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들이다. 전체 인구의 약 10% 가량은 시골 지역에 살고 있는데, 주로 키브츠나 모샤브를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나 차차 산업의 구조를 바꾸어 나가면서 매우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어, 도시 거주자들보다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
 
400여 년의 문화 유산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은 다양한 전통 문화와 더불어 현대 문화의 특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전통적인 종교 문화는 이스라엘의 보수적인 종교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동시에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현대인들의 새로운 문화 창출 또한 첨단을 이루고 있어, 두 문화의 보존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종교 절기를 통한 전통 문화의 유지 및 보존은 여러 민속 공연 행사를 통하여 전수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8개의 오케스트라는 수준 높은 고전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현대 히브리어의 부활은 이스라엘의 각 분야의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들의 문학적 주제는 그들의 특수한 고난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유대인의 자기 정체성과 신앙, 그리고 유대인의 관습 및 고통 등을 보편화시켜 나감으로써, 일류의 일반적 공감대를 얻어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80여 개의 각 분야의 박물관은 년 1000만 명의 관람객을 가지고 있으며,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의 사해 사본은 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은 국보이다. 또, 텔아비브 대학 내의 디아스포라 박물관 역시 2000년 동안의 디아스포라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역사 연구에 큰 몫을 한다.
 
 그 밖에도 음악, 연극, 영화, 미술 , 조각, 춤 등 다양한 창작 및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매년 실시되는 이스랑엘 대축제는 세계의 여러 나라의 예술을 접하며, 자신들의 예술 활동의 향상을 도모하는 축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사회는 다양한 언어와 이념만큼이나 종교적 특성도 다양하다. 성경 시대 이래 유대인들은 유일신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유대교라 함은 곧 종교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민족적인 개념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경의 기본 규범인 『토라』와 이를 제도화한 할라카를 중심으로 매우 엄격한 규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특히 정통파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오랜 전통을 가장 엄격하게 게승한 자들로서, 안식을 비롯한 각종 절기 등을 일상 생활에서 엄격하게 지켜나가고 있다.
 
 이들은 복장이나 외모로부터 일반 유대인들과 구별되고 있으며, 늘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다니고, 결혼한 부인들의 경우 머리를 삭발한다. 이들의 자녀들조차 종교인 학교에서 공부하며, 일상적인 교과목 든 배제한 채 오직 율법과 미쉬나, 탈무드만을 교육받고 있다. 이들은 국방, 납세의 의무로부터도 제외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비종교적인 현대인들로서,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서 산다. 이들은 세속적인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방인들과 거의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에 익숙해져 있으며, 서구적인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다.
아들은 정통파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많으며, 경우에 따라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여 종종 상호간의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정통파 유대인들과 세속적인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습관을 지닌 사람으로서 전통적인 유대인이있다. 이들은 지나치게 종교적이지 않으면서도 세속적이지 않은 사람들로서 일상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밖에 소수의 기독교인, 아랍 회교도, 사마리아 등 소수 종교 및 종파의 사람들이 분포되어 있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를 종교별로 보면, 유대교(82%), 회교(14%), 기독교(2%), 그리고 기타(1%) 정도이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종교의 전시장이라 일컬어질 만큼 다양한 종교와 종파를 이루고 있다.
유대교의 회당은 안식일에, 기독교의 교회와 성당에서는 일요일에,
그리고 회교의 사원에서는 금요일에 각각 예배를 드리고 있다.
시온주의의 목표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독립이었다.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여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고유한 인도적 권리에 속한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독립은 시온주의의 완성인가/ 이스라엘 독립 이후의 시온주의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온주의 운동은 끝났는가?
 
196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제 27 차 시온주의 총회에서는 시온주의의 프로그램으로 다음과 같은 5개 항을 결의 하였다. 
①유대 민족을 통합하고,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
②흩어진 모든 나라들로부터 유대인을 역사적인 조국으로 불러모은다.
③유대 국가를 예언자들의 최고의 가치였던 정의와 평화 위에 굳게 세워 나간다.
④모든 유대인에게 히브리어, 유대 문화, 유대 정신을 교육시킴으로써, 유대 민족의 자기 동일성과 특성을 보존해 나간다.
⑤유대인의 권리를 보호한다.
 이와 같은 결의를 보면 시온주의 운동의 미래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의 독립이 시온주의의 끝이 아니라, 이 운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상을 제시함으로써 영속적인 변형 또는 재정립 되어 가고 있슴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결의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시온주의 운동의 방향을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심화와 흩어진 유대인의 모음이다. 첫재 요소인 '이스라엘의 구심화'는 이스라엘 모든 유대인의 구심점으로 삼는 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유대교의 운명을 이스라엘의 운명으로 일치시켜 보자는 것이다. 더 이상 이스라엘 없는 유대인은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여겨야 하며,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문화, 종교, 교육, 학문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중심적 위치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시온주의를 유대인의 생활 속에 재통합하자는 의도의 해석이다. 두번재 요소인, '모음'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모여야 한다는 것으로, 디아스포라 속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단지 '시온을 사랑하는 자'일뿐 시온주의자는 아니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위의입장에 대해 거부하는 '이상 공동체'는,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유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역사적 근거로 ①이스라엘 안보, ②창조적인 활동력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이스라엘의 안보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과, 나아가 이스라엘에 문화적, 종교적 활력을 넣을 수 있는 점을 들어 이스라엘의 이민을 거부한다.

 
 디아스포라의 삶이 이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의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며, 이것이 곧 다원 문화 환경에 알맞는 주장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디아스포라의 균형 있는 발전을 괴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온주의의 완성은 바로 이 두 공동체가 상호 보완할 때 이룩되는 것이다. 이 두 관계는 경쟁적 관계나 택일의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어야 할 것이다. 시온주의의 위기는 오히려 외부적 도전에 의해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내적 갈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재삼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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