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이스라엘의 역사 2

好學 2011. 1. 30. 20:54

이스라엘의 역사 2

 

7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아슈케나지의 문화적인 뿌리는 남부 이탈리아와 북부 프랑스였다. 12세기 야콥 메이르 탐은 아슈케나지의 문화를 일으켜 나갔다.
특히, 이 지역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이고 근존적이며, 엄격한 유댜 사상과 관습 등을 지켜 나갔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다양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들은 외적인 영향보다는 내적인 전통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에게는 있어서 연구의 주된 관심사는 할라카적인 원리를 찾으려는 것이었기보다는 성경의 주석적인 활동이었다. 아슈케나지의 이와 같은 노력과 전통은 유대교의 학문적 전통의 뿌리가 되었다.
 
15­16세기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동부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이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지로 옮겨 갔다. 그들은 히브리 어와 독일어를 합성하여 자신들이 고안해 낸 이디시어를 사용했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여 많은 제의시등을 창작했다.
17세기 스페인의 유대인 학살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동부 유럽으로 이주해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아슈케나아지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1648년의 폴란드 대학살 및 18세기 러시아의 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오스레일리아, 남아프리카, 미국 등지로 흩어져 분산 되어 갔다. 
 
 유대인의 스페인 진출은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다만 기원후 711년 모슬람의 팔레스타인 정복 때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 곳까지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 언어저거으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증거가 있다.1148년, 알모하드의 박해 이후, 스페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집중되면서 유대 공동체에는 적지 않은 압력과 박해가 가해졌다. 1391년 박해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되거나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또 1492년에 유대인 추방령이 포고되면서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북 아프리카, 이탈리아, 터키 등지로 떠 나야 했으며, 이 칙령은 공식적으로 1968년까지 유효했다. 적어도 중세 유럽인의 디아스포라 역사에서 세파르디의 인구가 아슈케나지와 비교할 때 약 1/10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할은 활발하고 주요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문화와 잘 조화를 이루면서 유대인의 새로운 전통을 많이 창출해 냈다. 스페인 어 혹은 히브리 어와 스페인 어를 조화시켜 만든 라디노 어로 된 성경 주석, 시 드라마, 법전 및 신비주의 카발라 등 많은 문학작품을 양산 했다. 유대인들은 유랑자의 신부으로 생존을 위해서 경제활동을 활발히 해 나갔다.
 
특히 기독교 세계 내에서의 유대인의 경제활동은 유대인들의 재력을 바탕으로 한 지위 확보를 주력했는데, 봉건 영토 내의 먼 지역에 여행하여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거나 들여옴으로써, 지역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상업을 통하여 많은 돈을 번 유대인들은 이 돈을 일반인들에게 대여해 줌으로써 이자를 받고, 금융 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번 돈으로 금과 은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상업 활동이 순환적으로 계속되면서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남녀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이 많았으며, 모슬렘의 스페인에서도 유대인들은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중세 유대인의 지위는 항상 세속 정부의 인가에 의해서만 그 역할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지도자들은 항상 그들의 자치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유대인의 종교적 지위를 위협하는 입장과 유대인의 경제적,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려는 황제의 노력이 상호 교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요한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이 유대인의 경제력과 그들의 대부 행위였다. 돈이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돈능 빌려 주게 함으로써 면죄부가 되도록 해 준 경우도 있었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실제적인 법적 차별은 없었으나, 관습과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서 유대인은 언제나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었다. 많은 박해 속에서, 유대인들은 힘들고 위험한 곳으로부터 새롭고 안전한 삶의 거처를 찾아 떠나야 했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 세계로, 기독교 세계에서 또다른 기도교 세계로, 서쪽으로부터 동부나 북부로 이주해 갔으며, 주로 도시로부터 소도시나 시골로, 유럽의 주요 국가로부터 변방의 국가로 이동하였다.
 
서부유럽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동부나 북부 유럽으로 이주해 나갔으며, 주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 등지로 옮겨 갔다. 특히, 스페인의 카톨릭 지도자들은 1391년부터 149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스페인 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두 추방하였으며, 이들은 또다시 고향을 잃은 자들처럼 처참하게 쫓겨가야 했다.
 
추방된 유대인들은 주로 한 곳에 보다 큰 집단적인 정착을 실시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에게 있어서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정착 운동을 벌여 나갔다. 나아가, 이 식에 쫓겨난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로의 복귀를 서둘렀다. 순례단과 함께 팔레스틴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들가운데 은행가나 상인들이 많이 있어서, 팔레스틴의 경제적 이익과 부합되어 이주가 용이하기도 하였다.


8.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

이신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의 교육받은 계층은 계층은 유대인들의 그들의 종교나 신앙을 버리거나 변경하지 않고도 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통합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돔은 『유대인의 시민혁명』에서, 유대인들의 동등한 시민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격려했다.
나아가, 그들의 예배의 자유, 회당을 열 수 있는 권리 및 하교에서 과학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일도 허락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훈련의 부족을 보충하는 것은 그들이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후에 실시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기독교나 국가에 대한 증오심이 표출될 가능성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임을 경고하였다.
 
다라서, 그는 영향력 있는 정부 밑에서 새로운 교육을 통한 개량 방법이 창안,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였다. 유럽에 있던 유대교의 외적상태와 정신적 변화는 그들의 신앙과 사상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즉, 계몽주의와 더불어 정통 유대교의 새로운 교육 제도와의 만남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바알 셈 토브와 하시딤 운동이 그예인데 이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열정, 백열 상태와 초월적인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초월', '영원', '위'등의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하시딤 운동은 메시아에 대한 대망 사상을 약화시키지는 않으나, 이를 현재적, 내제적 개념으로 해석했다.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한 시대의 유대인에 대한 나쁜 감정일 뿐인가?
아니면,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발전된 하난의 체계적 개념이간?
이러한 질문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반유대주의가 하나의 실제로 이해되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며, 조작된허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궤적인 양상을 나타난다는데 있다.
반유대주의는 구약시대의 이집트에서 그들을 괴롭혔던 파라오의 행동과, 수산궁 하만이 모르드개와 그의 백성을 향한 대학살의 음모, 마카비 전쟁으로 통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갈등, 원인이 불명료한 수없는 많은 미움과 박해 사건들이 성경안에도 기록되어 있다.
 
반유대주의는 종교적으로 유일신 사상을 원칙으로 다신교를 숭배하는 열국들과 종교적, 정치적 타협을 거부하는것, 독특한 종교관습으로 안식일을 지키며, 까다로운 음식법에 따라 살면서 결코 동화되지 않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성격은 지배계층인 유럽인들에게 항상 눈에 거슬리는 혐오감의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성격은 종종 '선민'이라는 용어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중세유럽 사회에서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속한 사회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유대인들기리만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주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살아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물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변명이 없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눈에 비친 유대인의 모습은 적어도 그러하였다. 기독교 세계에서 반유대주의는 예수를 박해한 유대인들 스스로 짊어지게된 '피값'이라는 의식이 팽배하게 지배하면서 얻어지게 되었다.
이는 기독교의 자기 동일성 확보를 위한 유대인 혹은 유대교에 대한 신학적 거부로서 설명된다. 따라서, 그들이 당한 모든 역사에서의 고통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라는 신학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들의 신학적인 근거나. 근세­현대에 오면서 이러한 여러 유형들의 반유대주의 사상들은 유대인들의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보다 정치화되어 갔다.
 
특히, 유럽 사회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비인간화에 대한 생물학적 인종 차별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치적 반유대주의는 늘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한 정치적 수단 또는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현대 반유대주의는 초기 반유대인 운동과는 구별된다. 초기의 반유대인 운동이 주로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 및 전통에 대한 이방 세계 혹은 기독교 세계의 증오로부터 시작되었다면, 현대의 그것은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이러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의식이 정치적, 조직적 박해의 형태로 나타난다.
 
유대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유대적인 감정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드러나는 현상은 잠재 의식적 수준을 넘어서는 매우 정치적인 것에서 그 특징이 다르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신앙과 생활 방식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 반유대주의는 급기야 유대 정신의 파괴를 선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인종적 열등함을 강조하면서 인종 차별주의자와 연합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대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역할이나 영향에 대해 투쟁하려는 목적을 가진 유럽인들의 조직 및 정치적 정당의 확산이라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유럽 사회가 지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유대 문제'를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9.현대이스라엘의 건설과 중동평화

'시온주의'란 용어는 19세기 말 나단 번바움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는 1890년 4월 1일자 잡지에서, 시온주의를 '에레츠 이스라엘을 향한, 과도기에 설치한 민족적, 정치적 시온주의자 정당'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시온주의'를 정치적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그 후 시온주의의 아버지인 헤르츨은 『유대 국가』에서 이 개념을 재천명하였다.  
현대 시온주의의 아버지인 헤르츨은 1860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891년 10월, 파리에 있는 출판사에 고용된 그는, 정치, 문화 운동의 중심지인 그 곳에서 수년간 근무하였고, 그는 그 시대의 많은 새로운 정신을 배웠다.
 
1893년, 그는 교황의 알현을 신청하면서, 만일 교황이 반유대주의 추방을 위해 힘써 준다면 많은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겠다는 제안을 준비할 정도였다.
그는 이 일을 포기하고 큰 꿈을 꾸며 유토피아를 그려 보았다. 그는 당시 유대인 박애주의자였던 바론 히르시를 만나제휴를 건의 하고, 그는 36세가 되던 1896년 2월에 『유대 국가』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과 함께 정치적 시온주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의 이상적인 유대 국가 건설을 꿈꾸며 이미 실질적인 기본 구상을 하고 있다. 그의 시온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단연코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첫 과제는 지구 한 모퉁이에 우리의 상당한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영토를 차지하여 국제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독립 국가로서의 주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도덕적이고 합법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운동일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 오랫동안 열망해 오던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반유대주의라고 불리는 박해는 총체적 경험은 유대인들에게 유토피아의 꿈보다는 현실의 고통에서 이해되는 해방이 더 크고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재정도 없이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곧 유대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의 환상은 분명히 지극히 낙관주의이며, 계몽사상으로 믄여진 발전적인 이상 사회를 그리고 있다. 또, 그의 이러한 환상은 사회주의 운동의 중요성이 무시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꿈은 정확히 그의 예언대로 50년 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모든 비판을 멈추게 한다. 영국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은 벨푸어 선언 직후에도 변화가 거의 없었다. 팔레스타인 내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앎어였으며, 공식 언어로 히브리어가 첨가 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로 여겨졌다. 또 팔레스틴에로의 이민은 여전히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1918년, 시온주의의 공식 대표가 팔레스틴에 도착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정착촌, 보건소, 교육 기관, 도로, 항만, 등이 세워지기 시작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의 11개의 정착촌은 1918년 여름가지 모두 29개로 늘어 났다.   이제 팔레스틴은 에레츠 이스라엘로 불렀고, 청색과 흰색의 깃발, 공휴일로 안식일과 종교 절기가 정해지기도 하였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착지에 있는 젊은이들은 군사적인 힘을 갖추기로 하여 1918년 2월에 1100여 명의 지원자로 구성하고, 이집트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대규모 이민이 시작되면서, 전쟁당시 미국에 있었던 시온주의 지도자인 벤구리온과 벤츠비가 들어왔다. 벤구리온은 당시 '시온의 노동자들'과 '청년 노동'으로 나누어져 있던 노동 캠프를 하나로 연합하여 '노동 연합'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당시의 경제적 사정은 매우 어려웠으며, 영국 군정의 대표들과 시온주의 지도자들의 사이에 종종 충돌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특히, 아랍인들의 공격은 유대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밸프어 선언이 곧 국가 건설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유대 기구는 먼저 영국이 통제하는 팔레스틴 발전 기구를 만들어 개발한 후, 나중에 국가 연합이 관리하는 형태를 제안했고, 바이츠만은 영국이 영국인의 국가인 것처럼 팔레스틴에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보다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이주해 와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팔레스틴은 영국이 위임 통치를 하는 형태로 최종 결정 되었다.
 
1920년 4월 산레모에서 열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화합에서, 영국이 오스만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아 통치하도록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유대인들에게 보다 유리한 결정 이었르나, 아랍 팔레스틴들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셈이었다. 영국 정부는 첫 팔레스틴 지방 장관으로, 친유대파 조지가 지명한 사무엘을 판견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그들의 국가 건설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셈이었다. 영국의 팔레스틴 위임 정부는 1920년 11월 2일에 공식적으로 일을 시작 하였다. 위임 정부는 '유대 인족 국가'건설을 위한 밸프어 선언을 수행하기 위해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방 장관인 사무엘은 이러한 일을 수행할 분명한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밸푸어 선언을 수행하는 것을 꺼려하며, 아랍인들의 요구를 들어 주도록 장려하는 군사 고문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팔레스틴에로의 이민을 사실상 방해하였으며, 영국의 기금에 도움을 청하는 대신, 시온주의 기구가 보다 많은 발전 기금을 확보하도록 요청하였다. 여러 정치 단체나 민족주의 기구들에 속한 아랍인들은 영국 정책과 유대인 이민에 반대하는 시위를 일으켰으며, 이러한 일은 영국 총독부의 군사 행정가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아랍인들은 예루살렘, 특히 구도시에서 많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으며, 이 일에 맞서 유대 젊은 자위 청년단들을 조직하여 싸우던 야보스키는 영국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15년간의 형을 받고 복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921년 여름, 사무엘은 활동 보고서에서, 아랍인들의 관심과 유대인들의 민족적 야망이 연합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팔레스틴에 이룩하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야망은 현재의 거주자들의 권리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여기서 말하는 '거주자의 권리'란, 유대 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모든 아랍인의 권리를 말한다. 이 정책이 나오면서 전 아랍인들의 반대 투쟁은 더욱 격렬해져 갔다. 이 결정은 예루살렘에서 아랍 민족주의를 이끌어 오면 후세이니를 더욱 자극 하는 셈이 되었다.
 
이들의 투쟁 목표는
 첫째, 아랍 민족 독립을 위한 열망,
둘째, 유대 국가 건설에 대한 증오와 우려였다. 아랍 지도자들은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당을 매매하는 일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이 처럼 시온주의자들과 영국 정부 사이의 긴장은 국가 건설을 위한 과정에 중대한 장애를 가져왔으며, 이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정책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영국 정부로 하여금 팔레스틴에 두 민족의 생존권 보존을 위한 계획을 갖도록 해 중다. 즉, 지중해안, 갈릴리, 이스라엘 골짜기, 예루살렘, 베들레헴, 욥바를 포함한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에브라임 산지, 유대 산지 및 네게브 지역에 아랍 국가를 건설하는 계획이 세워진다.
이 계획이 세워지면서 영국 정부는 아랍 국가 건설로 예정되 지역의 땅을 유대인에게 매매하는 일을 금지시켰으며, 1938년 3월에는 유대인 이민을 연 8000명으로 제한하기로 결정하였다. 유대 시온주의자들은 영국 정부의 이러한 제안을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서 '아랍의 유대인으로 남는 것'이 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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