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이스라엘의 역사 1

好學 2011. 1. 30. 20:52

이스라엘의 역사 1          

 
1. 서론

   오랜 기간동안 나라도 없이 살던 이스라엘이 현 미국과 강대국에서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며, 실력가로 군림하고 있는 현 시대를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란 어떤 민족이며, 그들의 신앙적 배경-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 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작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민족,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하심을 바탕으로 하여 본 자료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근원 자료는 구약성경에서 주로 발견된다. 이런 많은 자료가 담겨 있기에 이스라엘 역사는 그 주변 나라들 보다 더 자세하게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 당시 위대한 나라들 보다 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연구가 그들 이야기를 상당히 자세하게 채운다 해도 이스라엘 조상의 배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외국 땅에서의 형성시대, 약속의 땅에서의 각 지파의 시작, 이 지파들이 한 개의 왕국으로 연합된 일, 왕국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징계, 또한 계속적인 경험을 겪으면서 포로로부터 돌아오는 많은 백성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앞으로의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를 구약 성경에서 기초하여 찾으려고 하는 바이다.
 
위의 서론은 바로 구약 성경을 그 자료로 하는 것에 대한 배경적 서술이다. 구약 성경의 주목적이 역사를 기록하는데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 대한풍부한 자료는 제공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목적이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에 관심을 갖고 그의   구원 섭리를 예비하신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므로 역사에 있어서 빠진 부분도 있으나 다른 자료들과 일반적 배경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과정에 의해 한 민족이 되었는가 ?
그들의 하나님 야훼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는가 ?
이러한 질문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질물들에 앞서, 이스라엘이 살아온 근동 지방의 다양한 역사와 변화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한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계 3대 대륙인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연락하는 교략적 위치에 놓여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과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관계를 맺어 왔다.
상대적으로 약세에 처해 있던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아 왔으며, 그들로부터 종교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문명과 경제적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페르시아와 이집트의 문명의 만남, 즉 동서의 만남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 이스라엘은 '기름진 초승달'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야와 사막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동쪽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 줄기를 타고 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북서쪽으로 발달한 기름진 평야는 이스라엘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 끝을 이루고 있으며, 이집트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사막과 만나게 된다.
 
족장 이전의 팔레스타인의 환경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사실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는 아브라함 이주 이후의 역사로부터 취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동안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로 인하여 족장 이전의 모습에 관하여 대강의 모습을 구성할 수 있다.

기원전 2000년전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패턴의 대변혁기 였다.
이집트는 신 왕조의 시작과 함께 막강한 힘을 뻗어 나갔으며 , 북쪽의 히타이트 역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에서 여러 차례 지배를 받아오면서, 이들의 이주는 아모리인의 이주로 큰 변화를 맞게된다.
 
 이들의 이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조교의 발전을 이루며 살게 된 계기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 등의 세력들이 함께 팔레스타인에 머물러 살게 되면서, 가나안 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들의 문화는 주로 도시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고, 때로는 도시 국가간의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중앙 집권 형태의 구조를 가진 제국들과 맞서 나갔다. 구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최초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사인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한다. 창 12:1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스라엘 문명사의 전환점이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다른 지역에서 살던 한 유목민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디 아브라함의 고향은 메소포타미아의 한 도시 우리였다. 당시 이 도시는 메소포타미아의 최고의 도시로서, 그는 '기름진 초승달'지역을 지나 가나안이라 일컬어지는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가 지나간 하란 역시 매우 번창했던 도시였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가나안에 입주한 시기를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브라이트, 넬손 그릭, 롤랑 드보등은 이때의 시기를 기원전 2000-1500년 즉, 중기 청동기 시대로 잡았으며, 이러한 주장은 유프라데스의 마리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코프만, 고든, 아리스펠트등은 가나안 정복과 정착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14세기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창세기 15장16절을 들고 있다. 그런데 대표적인 시대 착오적인 성경의 기록은 족장들의 기록에 '약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낙타를 길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2세기였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연대는 일반적인 연대나 족보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살던 시대의 삶의 상황과 형태는 반문화적 형태를 띠고 있었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유리하는 아람인'으로 여기저기 이주하면서 살았다. 족장 가운데에는 부분적으로 농업을 하기도 하였다. 유목 문화의 특징으로는 계절에 따라서 이주하는 생활, 가축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직 사회의 구성, 지파간의 권리 보호를 위한 계약 제도 형성, 피의 복수법, 손님에 대한 대접과 상속법들이 있었다.  
 
유목민들은 대체로 광활한 광야에서 살면서 종교적인 것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것이거나 그 어떤 속박도 용납하지 않는 자유로운 자들이었다. 요약하면, 먼저 족장들은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으며, 도시 문명 지대의 영향권밖에 머물면서 모시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고, 천막을 치고 이주하는 생활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몇몇 무덤들이 발견한 것을 제외하면 고고학적인 증거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아브라함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소위 족장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족장들은 단지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꽤 규모가 큰 씨족들의 추장들이었다. 이시기의 팔레스타인은 수없이 많은 유목민 씨족들로 뒤섞여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이들 가운데 한 집단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역사와 삶을 대체로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모두12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조상이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12지파의 역사로 전개되고 있으며, 각 지파간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편, 요셉의 생애는 그가 살던 시대의 배경을 무대로 하여 문학적으로 잘 구성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다 종합하면, 기원전 20-18세기에  기름진 초승달 지역의 북부 문명 지역 한으로 수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왔으며, 그들은 작거나 큰 조직 사회를 형성하였다. 특히 , 족장 중심의 성경 기록은 이 시대의 여러 민족들의 이주와  더불어 이해 될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개별적인 민족 혹은 부족으로서 존재해 오던 것이 하나의 계보로 결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대체로 반유목민들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족장들을 각각 씨족의 수호신을 숭배하고 있었으며, 토착적인 종교 제의가 행해졌다.  족장들의 초기 유산은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과 신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쳐 왔으며, 그런 점에서 족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상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경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흐름이 요셉의 이집트에로의 이주 기사를 기점으로 , 팔레스타인의 족장 전승의 기록이 이집트 이후의 모세 전승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혈속들은 모두 70인이었다.  이들의 숫자가 기아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가나안 정복 시대와 사사 시대까지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시대로 정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적어도 200년간 투쟁을 하게됐고, 가나안에서의 시간들을 B.C. 1000년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3. 제1차 성전 시대 ( 1024-586 B.C.E.)

고대 이스라엘의 군주제는 4세기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부족간의 동맹체제보다 두배나  긴 기간이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71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때가지와 남 유다 586년의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까지 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주제를 실시하였다.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사울은 1012-1004 B.C.E.로서, 주요 업적은 산악 지대에서 블레셋을 몰아 내는 일이었다.
다윗과 솔로몬은 1004-965 B.C.E의 다윗과 솔로몬의 965-926 B.C.E.까지로 보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부와 지혜, 그리고 명예의 상징이었다.
 
성경이 전하고 있는 가로몬 시대의 평화와 번영, 안정과 화려한 생활,그리고 그이 지혜는 다분히 과장적이라고 하더라도 신빙성이 높은 것들이다.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다윗에 의해 세워진 국가 체제는 무너져 내리고, 기원전 926년 고대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남 유다와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말았다.  
남유다는 영토가 작고 가난했지만 동질적인 주민이 어울려 살았고, 지리적으로 비교적 주변과 격리되었기 때문에 확고한 왕조 전통을 바탕으로 정돈되어 왔다. 한편, 북이스라엘은 영토가 넓고 비옥했으며, 그리고 옛 지파 동맹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주민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외세의 외세의 영향을 받기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왕조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많았다.
 
 
이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미가등이었는데, 이 두 왕국을 오가면서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정치, 군사, 경제등 각 분야에 걸친 남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지속시킬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 관계는 기원전 721년 , 북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먼저 멸망당하고 그의 영토에 편입되면서 깨어졌으며, 이 때 북왕국의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 유다로 몰려들면서 예루살렝의 인구는 급증하였다.

 4. 제 2차 성전시대 ( 538 B.C.E. - 70 C.E. )

근동 지방의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에 따른 이스라엘의 멸망은 민족의 강제적 이동과 추방,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의 이민 등으로 인하여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삶의 터전을 잃고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지배를 겪으면서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사조들과의 충돌 및 갈등을 통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을 낳게 되며,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 전통으로 연결되어 발전하게 된다.
 
흔히 '신구약 중간사'라고 일컬어지는 이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포로생활을 본토로 귀향하게  되는 과정과, 그로 인하여 발생한 사회 구조 및 사상 체계의 변화, 그리고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배체재와 헬레니즘과의 충돌로 인하여 발생한 문화적 변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 등 약 600여 년간의 과정에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예수 공동체의 본질과 특성을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더불어 고찰하게 됨으로써 ,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원전 721년 ,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 남유다는 여러왕들의 개혁과 발전 의지를 통하여 독립을 계속 유지해 왔으나 589년 1월 예루살렘의 포위와 함께 선전이 파괴되고, 유배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고레스의 칙령으로 538년 이스라엘은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하여 되돌아오게   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와의 개혁운동을 이 시대를 주류하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336년에서 323년의 등장으로 동방과 서방의 만남과 헬레니즘이 이스라엘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마카비 전쟁167-164 B.C.E으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헬레니즘의 수용과 거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부터 모든 유대교는 하나의 유대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헬라적 유대교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어야한다.  이 시기의 유대인들은 '두 언어'와 '두문화'사이에서 살았기 때문에, 같은 공동체 내에서도 각각 다른 생각과 사상을 형성하며 살아가데 되었다.
 
기원전 500년경에 로마시를 중심으로 한 라틴족의 도시가 세워졌는데,  로마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헤롯이 유대나라를 다르시게 되었고, 헤롯의 통치기간은 37-4   B.C.E.까지이다. 이제, 예수의 탄생으로 가보도록 하자. 예수가 사시던 시대의 특성은 한 마디로  '다양성'의  시대였다. 유대 사외의 어느 하나도 통일성을 갖춘 것이 없었다.
 
특별히 종교 사상들의 경우,   긴박하고 변화가 많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체계적인 사상이 형성되기 보다는 변화에 다른 각   종파간의 이해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고 해석되었다.  유대민족간의 메시야 사상의 간절함이  메시야의 극적인 탄생을 부인하게 만들었고, 이에 의해 초기 기독교회의 핍박 역시 가세하게 된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적대적 , 대리적 긴장은 예수께 있다기 보다는 두   집단간의 역사적 긴장관계가 시작되면서 각각의 정체성을 정당화 하기 위한 신학화가 이룩되어 갔으며, 그 결과 두 집단간의 분리가 다 이루어졌다.

 

5. 미쉬나, 탈무드 시대 ( 70-640 C.E. )

제 2차 성전의 멸망은 유다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대전환점이었다.
정치적 독립의 상실로 인하여 더 이상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 대부분의 백성을 흩어지게 했다.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있는 동안, 예루살렘의 랍비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는 중도파 바리새인들과 함께 성을 빠져 나가 야브네로 갔다. 야브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55km, 지중해변으로부터는 5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야브네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던 그는 이 곳에 학당을 세우고, 종교적 기초를 놓음으로써 유대교의 생활을 계속 이어 가려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만 행한 많은 관습과 행위들을 과감히 고쳐 나감으로써 생존의 뼈대를 세워 나갔다. 이 시기의 야부네에서의 활동은 새로운 질서의 형성으로부터 차츰 규법화로 이동하여 갔다.
 
제 2차 성전 시대의 사회 안에 퍼져 있던 다양한 사상들과 활동은 성전 멸망 이후 전적인 변화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산헤드린은 헬라어 시네드리온에서 온 용어이다. 본래는 '함께 앉다'이다. 이것은 일종의 지방 자치 행정 기구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 행정 기구는 예루살렘에 둔 대산헤드린의 중앙 권위를 인정하도록 설계하였다.
 
야브네에 설치한 산헤드린의 주요 활동은   헬라 로마 세계의 혼합된 문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유대교의 삶의 표준을 안내해 주는 것이었다. 성전 멸망 이전의 유대 사회의 대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왕과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왕조가 사라지게 되고, 다윗왕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물려받을 반한 왕가가 존재하지 않게 되자, 미래의 희망을 이룩할 현실적인 민족적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역할을 하던 것이 '나시'이다.
 
제 1차 유대반란이 진압된 후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로마의 주피터 신전이 건설되었으며, 일상적인 종교적 생활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제 2차 유대인의 반란이 132-135 C.E. 에 일어났으나 , 이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유대인들에는 보다 강력한 제재가 있게 되었고, 이들의   계속적인 정치적 혼란은 4-5세까지 이르게 된다.

 
6 .팔레스타인의 새 주인들

 '95 성경지리학  이스라엘史
유태국을 멸망으로 이끈 가장 큰 재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과 그 성의 파괴에 있다.
이 일이 있기 2년 전, 캐샤레이의 이방인들은 2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수천명을 노에로 팔았다.
다마스커스의 주민들은 불과 하루 동안에 만명의 유태인의 목을 잘랐으며, 예루살렘성 포위 당시에만 해도 11만 6천이나 되는 유태인의 시체가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함락 후 거의 10만명의 망명인들이 체포되어 노예로 팔렸다. 요세푸스는 백만명 이사의 유태인들이 포위 당시와 그 여파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고 추산한다. A.D 115년경에 사이렌, 이집트, 싸이프러스와 메소포타미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서방 세계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를 시작으로 차츰 기독교화해 나가는 동안, 유대인들의 지위는 제한되기 시작하였다. 곳곳에서 에수의 사역과 관련된 장소를 '성지'로 규정해 나가면서,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비잔틴 세계에서 몰려 오는 많은 성지 순례자들을 맞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또 많은 주요 신학적 교리가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팔레스틴에 기독교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의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유스틴 황제가 즉위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즉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권리와 재산 보호의 법적근거를 제거해 버렸으며, 유대교에 대한 지위를 하락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일어난 많은 신학적 논쟁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팔레스틴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혁신적인 조치 중의 하나는 유대법을 국가법과 동등한 규정으로 적요시켜 나가고, 기독교 내의 각종 제도를 유대교의 그것들로부터 분리시켜 나간 것이었다.
나아가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유대교적인 전통과 관점으로부터 떠나 기독교적인 성경 해석 방식에 의해 해석해 나갔다. 이러한 비잔틴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제국의 통치기간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에 이르렀을 때, 유다의 남은 자들은 페르시아와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맞서 싸웠다. 유대인들은 갈릴리로부터 가아샤랴, 룻다를 거쳐 614년 5월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을 정복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페르시아의 친유대 정책은 3년이 채 못 되어, 617년에 역전되어 친기독교, 반유대인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처형 되고, 유대인의 지위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교회는 유대인을 이집트와 주변 사막으로 추방하였으며, 이에 반대하고 나선 유대인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해와 더블어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공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 사이에 갈등은 640년에 팔레스틴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아랍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유대인들은 이제 수 세기 동안 새로운 '악한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모슬렘의 등장은 유대인 기독교와의 갈등이나 증오심과는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유대교와의 기독교의 갈등이 유대교 율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 비하여, 유대교와 모슬렘의 만남과 갈등은 유일신 사상을 지지하는 두 법전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아라비아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면서 이 지역의 이웃 문화에 상당한 접촉이 있어 왔다. 특히, 아랍인들과 인종적, 언어적으로 친족이었다. 그런 점에서 모슬렘의 경전인 『코란』은 유대교의 많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무하마드가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이해되면서, 그리고 그들의 신이 '유일신 알라'로 신봉되면서, 이러한 신앙을 인정 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이단'일 뿐만 아니라 이교도였다. '움마'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는 칼과 순교를 '움마'에 속한 자에게는 완전한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이들은 모든 이슬람 제국에 퍼져 나갔으며, 특히 이들은 10세기의 예루살렘에서 금욕적이고 개인적이며 합리저긴 종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시온의 통곡자들', 또는 '장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이 또 한 차례 모슬렘의 손에 넘어간 것은, 터키 지역에서 이집트로 온 '종들'의 후예인 마멜룩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13세기 초의 일이다. 본래 마멜룩은 이집트의 군대에서 종사하던 노예들로서, 알말리크 알사나이 무하마드가 이끄는 그들은 지배자들을 전복시키고, 남부 러시아 및 발칸 반도 주변의 새로운 노예를 규합하여 강력한 군사 봉건 제도의 정권을 이룩한 자들이었다.
 
1301년,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중되어, 카이로에있는 모든 교회의 회당이 문을 닫게 되었다. 정부는 기독교인에게 파란 터번을, 유대인에게는 노란 터번을, 그리고 사마리아인에게는 붉은 터번을 각각 쓰게 하였다. 이 시기의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는 그 힘이 쇠잔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악고, 욥바 등의 경우 거의 그 이름조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에는 아직까지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었으나 주변 지역은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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