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1
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들어가면서
예수님의 성육신 직전의 역사에 대한 성경의 침묵은 주목할 만하다. 이 400년의 공백기를 ‘신구약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 혹은 ‘초기 유대주의’(early Judaism)라 부른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의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기간에 일어난 세상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의 배경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시기는 크게 페르시아제국 시대와 그 후 헬라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별히 유대교가 이 두 시대에 어떻게 반응하면서 생존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유대교의 헬레니즘화의 수용과 거부가 흥미로운 주제이다.
1. 페르시아 시대
1-1. 고레스
캄비세스 (Cambyses)의 아들 고레스가 페르시아제국을 일구어 냈다. 주전 559년 나이 40세의 고레스는 안샨(Anshan)이라는 작은 왕국을 상속받았다. 이 왕국은 바벨론제국의 경쟁관계에 있었던 메데제국(Median Empire)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무렵 바벨론의 왕은 나보니두스(Nabonidus 혹은 Nabu-naid)였다.
철학자요 신비가였던 나보니두스왕은 바벨론의 神 마르둑(Marduk)으로부터 고레스가 정복자로 등장할 것을 들었다. 마르둑 신의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가 바벨론 이외의(수메르와 아카드의) 이방신들을 의존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나중에 고레스가 바벨론에 진격해 왔을 때 환영했다.
BC 550-549년에 고레스는 자신의 군주였던 메대왕 아스티아게스(Astiages)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바벨론제국은 나보니두스의 아들 벨샤르우술(Bel-shar-usur)이 통치했다. 안샨(Anshan)의 수도인 파르사(Parsa)에 메데왕 아스티아게스가 고레스를 정복하려고 왔을 때, 그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고레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고레스는 관대한 정복자였기에 메대의 관료들을 그대로 살려두어 그 직을 유지하도록 했다. 고레스는 메데제국의 영토를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그 당시 세계의 열강들이었던 리디아(Lydia)와 바벨론도 고레스에 의해 정복당했다. 그리고 이집트는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 II)에 의해 정복당했다.
고레스는 그리스, 파르티아(Parthia) 그리고 히르카니아 (Hyrcania)도 정복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귀환조치 시켰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이방인인 고레스가 도구로 사용된 경우이다. 이 귀환을 그 당시의 국제 정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팔레스타인에 친 페르시아 정책과 기운을 심어둠으로써 애굽을 정복하는데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고레스의 관대한 성격은 그의 현명한 국제 정세를 읽는 눈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고레스와 유대인의 관계를 살펴보자.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 BC 537년 경, 고레스는 포로 귀환하던 약 5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 편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빼앗아 왔던 성전 기구들을 돌려보냈다(에스라 6:3-5). 고레스의 칙령대로 팔레스틴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을 재건하고 제사를 회복했다.
이때 팔레스틴의 북쪽 지역인 사마리아에는 앗시리아의 정복자들에 의해 추방된 포로들인 사마리아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재건을 방해했다(스 4:5). 페르시아인들은 고레스를 ‘아버지’라 불렀고, 그리스인들은 ‘스승이며 입법자’로 여겼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고레스는 바벨론 포로를 종식시켜 새 시대를 연 하나님의 종이었다. 고레스는 신민들에게 페르시아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그리고 인도의 고대문명들을 종합하는 일을 했다.
1-2. 다리오
고레스 사후 다리오가 페르시아를 통치했을 때 이스라엘에서 학개와 스가랴가 선지자로 있었다. 다리오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도로와 우편제도를 발전시켰다. 그의 상비군은 기병 2,000명, 귀족 출신 보병 2,000명 그리고 불사신들(immortals) 10,000명 정도의 소규모였다. 주전 512년 경 다리오는 7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스키토족(Scythians)을 공략했는데 이것이 아시아와 유럽의 첫 번째 군사 접촉이었다.
다리오는 BC 518년경에는 나일강과 수에즈만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기도 했다. 다리오는 계속하여 그리스를 점령하려고 원정했다. 한 예로 마라톤에(Marathon)서의 전투에서는 패배를 맛보았고 그 결과 이집트도 다리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집트의 반란이 진압되기 전에 다리오는 죽었다.
1-3. 아하수에로(BC 486-465)
다리오가 고레스의 딸 아톳사에게서 나은 아들인(히브리어로) 아하수에로(에 4:6; 에스더서의 부림절을 참고하라; 페르시아말로는 크사야르사(Khshayarsha; 영어로는 크세르크세스, Xerxes)가 35세에 다리오 후임자로 발탁되었다. 아하수에로는 이집트의 반란을 잠재우고 바벨론의 반란도 잠재웠는데, 스스로 ‘페르시아와 메데의 왕’이라고 부름으로써 바벨론은 영원히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임을 나타냈다.
BC 480년 경 아하수에로는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46개국으로 구성된 군대의 병력을 보충했고, 엄청난 함대도 동원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군대가 페르시아를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하수에로가 아테네를 정복했지만, 살라미스(Salamis) 해전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그는 조로아스터교도였고 자기 과시를 좋아했다. 그 후 즉위 20년 만에 그의 친위대장인 아르타바누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1-4. 아닥사스다 1세(BC 465-425)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Longimanus: ‘손이 긴 사람’이란 뜻. 그의 오른 손이 왼손보다 길었다고 함)가 왕이 되었을 때, 애굽 그리고 그리스 등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할 책임을 떠맡았다. 다리오가 시행했던 효율적인 행정제도가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가 아닥사스다에게 포로귀환을 요청했다.
페르시아 제국 시기에 바벨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물질에 눈이 밝았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닥사스다 제 7년에 유대인들이 아하와(Ahava)에 집결하여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약 7개월이나 소요되는 귀환 길에 오른다. 귀환 후 에스라는 재건 사업을 추진했는데 특별히 잡혼(mixed marriage) 문제를 처리했다.
이때 느헤미야의 활약도 컸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성전재건에 힘쓴 후 12년 만에 다시 페르시아의 수사(Susa)로 돌아왔다. 그는 귀환한 백성들 가운데 잡혼과 율법의 준수의 해이가 다시 문제로 대두되자(느 13:23-24) 2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이런 배경이 구약 성경의 마지막 내용이다. 아닥사스다 때로부터 사실상 페르시아는 기울기 시작했다.
그 후 다리우스 2세와 아닥사스다 2세(BC 404-358)의 통치 때는 애굽, 구브로, 페니키아, 시리아에서 반란이 더욱 만연했다. 과도한 세금과 총독직의 세습화도 큰 문제였다. 그 후 아닥사스다 3세는 애굽을 다시 정복했는데 조상 다리오 시대의 영화를 회복하려고 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체결했다. 하지만 아테네 근처의 마케돈(마케도니아, Macedon)은 이것을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주전 338년에 필립과 알렉산더의 통솔아래 아테네와 싸워 승리했다.
아닥사스다 3세는 환관 바고아스(Bagoas)에 의해 독살 당했다. 다리오 3세(느 12:22)가 주전 336년에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같은 해에, 알렉산더는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333년 다리오 3세는 잇수스(Issus)에서 참패당했다. 다리오 3세의 죽음은 곧 페르시아제국의 몰락이었다. BC 550-330년 동안 융성했던 제국이었다.
1-5. 이 당시의 유대인의 상황
BC 722년에 앗시리아에게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이방 나라에서 사마리아로 이주해온 사람과 잡혼이 많아졌다(왕하 17:24-29). 그 결과는 일부는 여호와 신앙을 견지했으나 다수는 이방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가 만연해 졌다(왕하 17:33). 그 후 즉 약 150년 후, BC 586년에 남 유다도 망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정착하자 사마리아인들은 위협을 느껴서 그들을 반대했다. 귀환했던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강해진다면 그들의 소유지를 빼앗길 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성전재건에 동참하려고 했으나 귀환자들은 이방인과 같은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수용할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의 통치자였던 산발랏은 성벽과 성전 재건 사업을 무력으로 반대했다. 그 후 사마리아와 유대인은 원수로 지냈다.
1-6. 이집트의 엘레판틴의 유대인들
1907-8년에 이집트의 아수안(Assuan) 근처의 엘레판틴 (Elephantine: 코끼리 마을)에서 BC 500-400년 사이로 추정되는 아람어 파피루스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대부분은 유대인이 작성한 사업문서였다. 성경인물과 같은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BC 407년 유대 총독인 Vigvai에게 보낸 편지에, 이집트의 제사장들이 지방 행정장관들의 도움을 얻어 엘레판틴에(예루살렘의 성전을 본 따) 세운 유대인의 성전을 파괴한 기록이 있다. 반 유대인 감정이 컸음을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이 유대인들은 정통 유대인이라고 자부했으며 유월절을 지켰다. 하지만 이들 유대인들은 종교 혼합주의적 생활을 했다. 이들의 기원은 여전히 신비이다. 엘레판틴의 파피루스는 유대인의 정착이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의 애굽 침입 이전이라고 밝힌다. 캄비세스가 애굽 신전은 파괴했으나 유대인의 신전은 훼파하지 않았다.
1-7. 디아스포라의 회당
아마 바벨론 포로기에 최초의 회당이 건립된 것 같다. 회당(synagogue; 히브리어로는 ‘케네세트’- 이 단어는 지금도 이스라엘의 의회를 지칭함)은 신구약 중간기 디아스포라의 삶의 중심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귀환을 원치 않아서 디아스포라로 남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제사제도는 중단되었으나 기도, 율법의 연구와 가르침은 계속되었다(겔 8:1; 20:1-3). 호주 10명만 모이면 회당이 하나 세워질 정도였다. 참고로 디아스포라에게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의 결정은 여전히 유효했다.
회당예배는 아주 자유로운 형식을 취했다. (남자 혹은 여자) 회당장은 예배를 감독했으며, 회당의 사환(눅 4:20)은 ‘하잔’(hazzan)이라 불렸는데 성경을 낭독자에게 건네주고 다 읽은 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하잔은 (지방)산헤드린의 대리로서 범법자를 매질 할 수 있었다.
1-8. AD 2-3세기의 회당 예배의 요소
기도
쉐마를 읽음(Shema: 신 6:4-9, 11:13-21 그리고 민 15:37-41로 구성됨),
기도
율법 낭독(안식일에는 7명이 낭독함. 낭독 후 통역자[methurgeman]가 아람어로 번역[targum]해 주었다)
선지서 낭독(아마 율법을 설명하기 위해)
감사기도
성경 교훈의 설명(눅 4:20)
(설교자 혹은 회당장이 행한) 제사장적 복의 선포와 회중의 아멘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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