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智慧묵상/[성서묵상]성경말씀

묵상의 훈련 3.

好學 2011. 1. 30. 19:33

묵상의 훈련 3.

 


진정한 묵상은 일종의 심리학적 요법이 아니라 신학적인 은총이다.
토마스 머톤(Thomas Merton)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갈망할 것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프레드릭 파버(Freederick W. Fa-ber)의 다음시를 긍정하는 때가 있다.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하니
그 얼마나 기쁜가!
그 생각을 하고
그 이름을 호흡하고
이 땅에서 그 일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그러나 묵상을 하는 사람들은 영적 해이와 냉담함과 바라는 마음의 부족이 빈번한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자신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해주기를 바라는 경향을 끊임없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간접적인 메시지를 듣기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결정적인 실수 하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보다는 인간 왕을 달라고 고집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다. 종교의 역사는 왕, 중재자, 제사장을 취하려고 거의 필사적으로 애쓰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된다. 그와 같은 방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변화의 필요를 회피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있다는 것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방법은 도덕적 변화의 필요 없이 종교적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편리하다. 중재자의 종교에 의하여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현실은 오늘의 문화를 조금만 관찰해도 알 수 있다.


묵상을 대단히 두렵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묵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들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다.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은 묵상이 종교 전문가들(제사장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제사장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만들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 같다. 워싱턴에 있는 구세주의 교회(the Church of the Saviour)의 교인들은 얼마동안 이 방면의 실험을 계속하였다. 결국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우리가 20세기 또는 21세기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나니아에게 명백하게 지시가 주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지시를 받을 수 있다는 암시를 가지고 있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순종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일에 개입하신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순종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현재의 스승과 예언자로 아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소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소원은, 바꾸어 말하면 은혜의 선물이다. 묵상을 위한 소원과 은혜 받기를 기도하는 일없이 그냥 묵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얼마 가지 않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묵상을 하려는 소원과 묵상을 시작하도록 하는 은혜는 보다 더 큰 은혜에 대한은연 중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은혜의 선물"을 구하고 받는 일을 우리들로 하여금 내적 여정을 지속적으로 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은 앨버트 공의 말대로 "성도들의 묵상은 묵상되는 자, 즉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불붙는다."

상상을 성화 할 것


우리는 상상을 통해 아주 쉽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 알렉산더 화이트는 "그리스도인의 심상이라는 신성한 직분과 화려한 봉사"라고 말했다.
추상적인 묵상만으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좀더 깊이 오관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단순하고, 상당히 초라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자신도 이 방법으로 가르치시며 늘 상상력에 호소하셨다. 많은 경건의 거장들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권장한다.


아빌라의 테레사도 "나의 명철로는 숙고할 수 없으므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궁리하여 그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들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녀의 말에 동감할 것이다. 우리들 역시 지적인 접근을 했지만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냉담했었음을 알고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상상은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프랑수아 드 살르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서 우리가 묵상하는 신비한 것 안에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켜 이리 저리로 배회하지 않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새를 새장 안에 가두거나 매를 가죽끈으로 묶어 손안에 머물게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들은 상상은 신뢰할 수 없으며 약한 자에게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서 상상을 반대한다. 그런 우려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우리의 모든 능력과 마찬가지로 상상도 타락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성(타락한 상태의)을 취하여 거룩하게 하신 후 그의 선하신 뜻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상상도 사탄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모든 능력이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상을 가진 피조물로 만드셨다. 그리고 피조물의 주이신 하나님은 상상을 구속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신다.

상상에 대한 또 하나의 우려는 인간의 조작과 자기 기만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바 "지나친 상상"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상상해 낼 수 있다. 성경도 악한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을 한다고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룸 1:21)? 그러니 우려를 가질 만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헛된 노력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생각을 하고, 그의 앞에서 즐거워하고, 그의 진리와 길을 원한다. 우리의 이런 삶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상상력을 그의 뜻을 위해 사용하신다. 실제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체험은 어떤 일이 가능하다는 영상을 받는 체험이다. 종종 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그림이 떠오른다. 그리하여 그 그림에 그들과 함께 동참하노라면 깊은 탄식이 나오거나 눈물이 흐르게 된다. 후에 그들이"어떻게 그걸 알았습니까?"라고 물으면 "글세. 몰랐어요. 다만 보았을 뿐 이예요"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상상을 성결케 하여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의 성육신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 맞도록 적응시키시고 육화하셔서,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상상을 이용해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르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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