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훈련 1.
진정한 묵상은 일종의 심리학적 요법이 아니라 신학적인 은총이다.
토마스 머톤(Thomas Merton)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대적은 다음 세 가지, 즉 시끄러움과 조급함과 혼잡함을 통하여 크게 역사 한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들을 "물량주의"에 빠지게 했을 때 만족한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급함은 마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귀이다."
우리가 우리 문화(우리의 종교 문화 포함)의 피상성을 탈피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재창조의 침묵 속, 묵상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묵상의 세계를 체험한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하여 우리를 성령과 만나는 이곳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그와 같은 말이 현대인들의 기에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묵상 기도 학교의 학생으로 등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한다.
성경의 증인들
묵상은 성경 저자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은 묵상이라는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두 가지의 히브리어를 쓰고 있는데 그 두 단어는 성경에서 약 58회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 하나님께서 하신 행위를 되풀이하여 말함, 하나님의 법을 반추함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느 경우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의 결과인 변화된 행위를 강조한다. 묵상에 대한 성경 적 이해는 그 어느 것이든지 회개와 순종을 핵심적인 특징으로 한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쳤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무강하나이다.....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97,101,102).기독교의 묵상과 동양 및 일반 세상의 묵상을 가장 잘 구분 짓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순종과 충성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묵상 방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창 24:63).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시 63:6). 시편은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 119:148). 시편의 첫 시는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여"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복 있는 자"(시 1:2)가 되도록 격려하고 있다.
늙은 제사장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린 소년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도록 도와주었다(삼상 3:1-18). 엘리야는 광야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며 "여호와의 세미한 음성"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왕상 19:9-18).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를 보고"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시는 음성을 들었다(사 6:1-8)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는"(렘 20:9) 경험을 하였다. 이 외에도 증인들은 허다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귀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사역 가운데서도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는 습관이 있으셨다(마 14:13).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있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한적한 곳에 계실 때 무슨 일을 하셨을까?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셨다. 그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대화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듣기와 순종하기
기독교의 묵상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이다.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복잡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좀 복잡하게 이야기하겠다. 여기에는 숨은 비결도, 비밀스러운 주문도, 정신 운동도, 환각적인 초월 의식도 없다. 다만 위대하신 우주의 하나님, 만물의 창조주께서 우리와 교제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있을 뿐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했고, 하나님은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셨다. 즉 교통한 것이다. 그러다가 타락이 왔다. 타락의 가장 큰 의미는 영원한 교제가 깨어졌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손을 내밀어 거역하는 자녀들을 찾으셨다. 가인, 아벨, 노아,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모세는 여러 번 흔들리고 주저앉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 실제로 성경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출 33:11)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는 친밀한 관계, 교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ㅇlfj한 친밀함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조금 배우고 나서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이렇게 하여 그들은 위험부담 없이 종교적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세를 선두로 하는 선지자와 사사 반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현재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신 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발길이었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그 나라의 삶이 어떠한가를 본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속자와 왕으로 알게 하는 살아 있는 교제를 확립해 주셨는데, 그것은 모든 일에 그의 말씀을 듣고 항상 그를 순종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듣고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본보이셨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리라"(요 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요 5:3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이며 자기 양은 그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다(요 10:4). 예수님은 보혜사, 즉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진리의 성령께서 오실 것이라고 이야기하셨다(요 16:13).
누가는 그가 기록한 두 번째 책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안으로 볼 수 없음에도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 후에도 "행하시며 가르치기를" 계속하셨다고 시사한다(행 1:1). 베드로와 스데반은 둘 다 예수님이 신명기 18;15에 있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고 지적한다. 모세는 말하는 자이고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이었다(행 3:22,7:37).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부활하셔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다. 그분은 성령을 통해서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 빌립을 인도하여 새로이 미전도 지역에 가게 하시고(행 8장), 자신의 메시아 됨을 바울에게 보이시고(행 9장), 베드로에게 그의 유대 민족주의를 가르치시고(행10장), 교회를 인도하여 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다(행 15장), 우리가 거듭거듭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기초로 사는 법을 배우는 모습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묵상에 대한 성경의 토대이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분은 게으름을 피우거나 뒷짐지고 계시지 않았다. 그 분은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선지자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이 이 사실을 경험하였다. 그 동안 충성된 신자들이 묵상에 대해 써 놓은 엄청난 양의 글들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모른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주님과 항상 교제하는 즐거운 삶을 간증하는 것이 그들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다. 카톨릭에서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동방정교에서 서양의 자유 교회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한결같이 "방해받지 않는 교제 가운데 그의 임재 안에서 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한 신비주의자는 "기도는 지성을 가지고 마음으로 내려가 거기서 어디나 계시고 모든 것을 보시며 당신 안에 계시는 주님의 면전에 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성직자 제레미테일러는 "묵상은 만인의 의무이다"라고 선언했다. 현대에 와서 루터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왜 묵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성경의 증거들과 경건의 대가의 증거들이 이처럼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기용 부인이 말한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깊으심"을 체험하라는 은혜로운 충고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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