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智慧묵상/[성서묵상]성경말씀

묵상의 훈련 2.

好學 2011. 1. 30. 19:33

묵상의 훈련 2.

 


진정한 묵상은 일종의 심리학적 요법이 아니라 신학적인 은총이다.
토마스 머톤(Thomas Merton)


묵상의 목적


묵상을 할 때 우리는 토마스 아켐피스가 "예수님과 친한 친구관계"라고 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 속으로 들어가 그 자세를 편히 즐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흔히 편재라 함)는 신학적 교리에서 찬란한 현실로 변화된다. "그가 나와 함께 걸으시며 나와 함께 말씀하신다"는 말을 경건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 된다.


내 말을 잘 이해하기 바란다. 어떤 감상적이고 즉흥적이며 입에 발린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은 성경에 나타난 높이 들린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모르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 줄 따름이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그가 왕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죽은 자처럼 엎드러졌다고 했는데 우리도 그래야 한다(계 1:17). 내가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체험했던, 무척 다정하면서도 두려울 정도로 존경스러운 그런 체험과 더 가까운 것이다.


묵상할 때에 우리는 정서적 영적 공간을 만들어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성소를 건축하실 수 있게 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라는 놀라운 말씀은 볼래 신자들을 위한 것이지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삶을 주님께 맡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먹고 함께 대화하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알 필요가 있다. 주님은 우리 마음속 성소에서 영원한 성찬을 하기 원하신다. 묵상이 이 문을 열어준다. 그래서 우리가 특정 시간에 특정한 일을 묵상할지라도 그 목적은 이 생명력 넘치는 현실을 삶 전체에 실현하난 것이다. 움직이는 성소가 우리의 성품과 행위를 들어온다.


이런 유의 내적 교제는 우리의 속 사람을 변화시킨다. 마음속 성소의 영원한 불길이 타오르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불이 부정한 모든 것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항상 곁에 계시는 우리의 스승께서는 늘 우리를 인도하여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룸 14:17)을 누리게 하신다.
그의 길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 "의무"가 아니라 "소원"으로 그래야 한다. 우리의 욕구와 열망이 갈수록 그의 길과 맞추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갈수록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성령의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같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흔히 있는 그릇된 생각들

기독교의 묵상 개념을 중요시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을 동양종교의 묵상 개념과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 두 가지 개념이 세상을 나누어 놓는다. 동양의 묵상은 마음을 비우기 위한 노력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묵상은 마음을 채우기 위한 시도이다. 이 두 개념은 이처럼 전혀 다르다.


동양의 묵상에서는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개성과 자아를 버리고 범아와의 일치를 강조한다. 이 세상의 수고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비인격의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을 동경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상실된다. 실제로 개성은 궁극적 환상으로 간주된다. 다만 비참한 존재의 바퀴로부터 도피가 있을 뿐이다. 매달리거나 말씀을 들을 하나님은 없다. 초연이 동양 종교의 궁극적 목표이다.


기독교의 묵상은 초연의 개념보다 더 높은 것이다. 물론 초연도 필요하다. 20세기 베네딕트파 수도승 피터는 이것을 "사색의 안식"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초연함과 결부시켜서만 생각하면 위험하다. 악한 것을 비웠으나 선한 것을 채우지 않어 나중에 처음보다 더 나빠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것을 보여준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4-26).


그렇다. 초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초연을 넘어 집착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주위의 혼란으로부터의 초연은 하나님께 더 잘 집착하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의 묵상은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나님께 드리는 데 필요한 내적 안전함으로 이끌어준다

묵상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묵상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는 생각이다. 묵상은 마음속을 탐구할 시간이 있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오해다. 이분야에 탁월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이 특별한 소수의 영적 거장들이 되기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박장 대소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활동-호흡과 같이 자연스럽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특별한 은사나 정신적인 능력이 없어도 된다고 말한다. 토마스 머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실로는 대단히 단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정교한 기술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세 번째 오해는 묵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기며 20세기에는 전혀 맞지 안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The Brothers Karamazov)에서 묘사한 금욕적인 신부 페라폰트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엄격하고 독선적인 사람으로서 순전히 노력으로 그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구출하고 세상에 저주를 내리는 사람이다. 그와 같은 묵상은 아무리 해도 불건전한 현실 도피(타계 지향)로 이끌고 가서 우리들로 하여금 인생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머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묵상이 생활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 한, 아무런 핵심도 진실성도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퀘이커 교도들만큼 침묵 가운데 듣는 일을 강조한 단체는 없었다. 결과로 그들은 숫자에 비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윌리엄 펜은 이렇게 말한다. "참된 경건은 사람을 세상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더 잘 살면서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한다."


묵상은 흔히 아주 실제적이며, 아주 세속적인 통찰력을 낳는다. 묵상을 통하여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얻는다. 또한 민감한 문제나 업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지침도 얻는다. 어떤 특별한 묵상이 황홀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안내를 받는다는 것은 훨씬 더 보편적이다. 묵상은 보다 훌륭한 시각과 균형을 가지고 평범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아마 모든 오해 가운데서도 가장 보편적인 오해는 묵상을 종교적 형태의 심리학적 조종으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혈압을 내리거나 혹은 긴장을 해소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또한 그와 같은 견해는 우리들로 하여금 잠재 의식의 세계와 접촉하도록 함으로써 뜻 깊은 통찰을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실제로 하나님과 만나 교제했다는 생각이 불합니하게 들린다. 당신이 만약 우리가 순전히 물질적인 우주 속에서 산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묵상을 지속적인 알파(alpha) 뇌파를 획득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에 무한하시며 인격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면, 또한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교제를 기뻐하신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묵상을 사랑의 하나님과 사랑받는 우리사이의 교통으로 볼 것이다.


묵상에 대한 이 두 가지 개념은 서로 완전히 반대된다. 그 하나는 우리를 전적으로 인간적인 체험으로 제한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 들어가게 한다. 그 하나는 잠재 의식을 개발하는 일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발견한 그분 안에 거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분에 대하여" 말한다. 이 둘은 종교적인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또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실재를 위한 자리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의 세계를 믿을 수 있게 될까? 맹목적인 믿음에 의하여 믿을 수 있게 될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영적 세계의 내적 실재는 찾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얻을 수 있다.


나는 종종 영적인 세계가 실제로 있는지를 십 분 동안도 찾아보지 않고 영적인 세계를 거리낌없이 비방하는 사람들을 본다.
영적인 세계의 실재에 대해 실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른 모든 과학적 노력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실험을 해야한다. 우리의 첫 번째 실험이 실패한다 해도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되고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속단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절차를 재조사하고 다시 실험하며 이와 같은 일을 꾸준히 하기를 최소한도 모든 과학의 분야에서 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해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그들 자신의 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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