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교육 3/[시조]古時調

치술령곡

好學 2010. 12. 4. 21:17

 

 

치술령곡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朴堤上)이 볼모로 잡혀 있는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러 왜국에 갔다가 왕제(王弟)는 구하여 귀국시켰으나, 자신은 왜왕(倭王)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박제상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隧述嶺:울산 ·경주 경계에 있는 재)에 올라가 슬픔과 그리움에 겨워 통곡하다가 또한 죽어 치술령 신모(神母)가 되니, 뒷날 백성들이 이 노래를 지어 애상(哀傷)하였다.

 

dia_bluve.gif 요점 정리

circle01_blue.gif 주제 : 남편에 대한 뼈저린 그리움

 

dia_bluve.gif 내용 연구

 신라 때의 가요(歌謠)로 현재 이 노래의 내용은 전하지 않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에 그 유래만 실려 전한다. 즉,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朴堤上)이 볼모로 잡혀 있는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러 왜국에 갔다가 왕제(王弟)는 구하여 귀국시켰으나, 자신은 왜왕(倭王)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박제상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隧述嶺:울산 ·경주 경계에 있는 재)에 올라가 슬픔과 그리움에 겨워 통곡하다가 또한 죽어 치술령 신모(神母)가 되니, 뒷날 백성들이 이 노래를 지어 애상(哀傷)하였다고 한다.

 

dia_bluve.gif 이해와 감상

유래로 미루어 보아 처절한 남편의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dia_bluve.gif 심화 자료

circle01_blue.gif 치술령곡(민요)

  (중모리; 정관용 글, 김현숙 곡)

   밤개 포구에 그대 자취 선연한데 그대 지금 어데로 가고 있나
   미친 세월 낯설은 가녀린 비명 천의 하늘은 혼으로 떠도나니
   그 혼 이제 노래가 되어 그 붉음으로 꽃을 피우고
   노래가 된 그대의 붉은 넋 창공에 높이 솟아 내게 들리니
   음 ---- 포구에 세우친 밤 나는 돌이 되리니

 

circle01_blue.gif 치술신모와 망부석

 신라 눌지왕(訥紙王)에게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두 아우가 다 다른 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눌지왕 9년에 백관(百官)들이 추천함에 따라 왕명을 받은 박제상(朴提上)은 고구려로 들어가서 왕제 보해(寶海)를 데리고 도망쳐 올 수 있었다.

 고구려로부터 돌아온 박제상(朴提上)은 임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그길로 왜국(倭國)에 있는 미해왕제(美海王第)를 구출하려고 바로 율포변(栗浦邊)에서 배를 타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그의 아내가 율포(栗浦)로 달려왔으나 다만 손을 흔들뿐 배는 떠나버렸다.

 왜국에 들어간 박제상(朴提上)은 나라에서 도망쳐 온 것이라 말하여 망명을 요구하며 왕제에게 접근을 하였다.
 하루는 왕제를 도망치게 하고 그는 스스로 남아 잡히는 몸이 되었다. 죄를 추궁하는 왜왕에게 말하였다.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臣子)가 되고 싶지 않으며 차라리 계림의 형장(刑杖)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녹작을 받고 싶지 않소]하는 것이었다.
왜국에서 그는 나라에 욕되게 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지아비의 죽은 소식을 들은후 그의 아내는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멀리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죽은 몸은 돌로 화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혼은 수리새가 되어 날아가 산아래에 앉았다. 새는 다시 날아 남쪽에 있는 한 바위 구멍으로 숨었다. 그래서 마침내 치술신모가 되니 치술령 산신이다.

 사람들은 뒷날 새가 날아와서 앉은 자리를 비자현(飛自峴)이라 하다가 비조(飛鳥)라 부르니 두동면 만화리(斗東面 萬和里)에 있다.

 또 새가 숨은 바위를 은을암(隱乙巖)이라 하며 절을 지어 그 이름 또한 은을암(隱乙巖)이라 하니 범서면 국수봉(凡西勉 菊秀峯)의 은을암(隱乙巖)이 그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장녀 아기(阿奇) 3녀 아경(阿慶)도 같이 울다가 마침내 죽었다한다. 이때 2녀 아영(阿榮)은 따라 죽을 수 없었다.
[만약 내마저 죽는다면 누가 우리 모자(母姉)를 묻어주며 어린 동생 문량(文良)은 누가 거두어 기르리]하였다.
뒤로 신모사(神母詞)와 치산원을 세워 제사를 받들어 왔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만화리에 다만 그 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치술령 위에는 오늘도 망부석이 매서운 눈초리로 멀리 왜국을 바라보고 있다.


                
      '울산의전설과 민요'  울산문화원편찬

circle01_blue.gif 박제상 유적 (朴堤上 遺蹟)

<사진참조> '울주군 홈페이지'

 

circle01_blue.gif 박 제상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때의 충신으로 유명하며 신라 파사왕의 6세손이다.
신라 내물왕 때 이손 신랑주간 등을 지냈고, 418년(눌지왕 1년) 삽량주(경북 양산군) 태수로 있던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첫째 동생 복해(卜海, 또는 보해)를 탈출시켜 귀국했으며 집에도 들르지 않고 다시 일본에 특파되어 볼모로 잡혀있던 눌지왕의 둘째 동생 미사흔(未斯欣, 또는 미해)을 탈출시켜 귀국하게 하였다.
 자신은 체포되어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위를 걷게 하고,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우는 등의 고문을 당하며 일본 신하가 될것을 강요 당하였으나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거절하고 박다진 목도(木島 : 기시마섬)에서 화형을 당해 죽었다. 지금도 갈대 위가 붉은 것은 박제상 피의 흔적이라고 한다.  박제상이 부인 김씨에게는 알리지 않고 일본으로 떠난 뒤 그 사실을 알고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 위에서 몸부림치며 통곡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모래를 장사(長沙)라 하였으며,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을 벌지지(伐知旨 : 뻗치다의 고유음)라 하였다.
 박제상이 돌아오지 않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두 딸과 치술령(述嶺: 수릿재)에 올라가 남편을 부르며 통곡을 하다가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 이 망부석은 현재도 유명한 망부석이며 사람들이 부인 김씨를 치술신모(수릿재 신모)라고 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두 딸 박아기, 박아경 또한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을 하다 죽으니 세 모녀를 "호국삼신여"라 칭하고 치술 신모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국대부인에 봉했다.
왕이 박제상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대아찬에 추증하고 단양(영해)군에 봉했으며, 박제상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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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부석
 삼국시대의 세력관계를 볼 때 신라는 동남의 한구석에서 늦게 일어나 그 힘이 가장 약하고 발전 또한 지지부진하여 반도에서는 북으로 고구려와 서로는 백제세력의 압밥을 받고 또한 바다 건너 일본의 계속되는 침략에도 시달려 오고 있을 때이다.

 신라 제 17대 내물왕이 36년(391)에 왕자 미해(삼국사기 미사흔)와 제 19대 눌지왕 3년(419)에 왕제 보해를 차례로 왜국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있었으나 두 나라는 오래도록 풀어주지 않았다. 눌지왕이 나라의 왕으로 다시 없는 영화를 누렸으나 두 왕제를 이웃 나라에 볼모로 보냈으니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 때 삽량주간으로 용맹과 지혜를 갖춘 박제상이 신하들의 추거함에 따라 왕명을 받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왕제를 구출하여 돌아왔다. 그러나 눌지왕은 한편은 반가우나 왜국에 인질로 있는 미해왕제를 생각하니 간절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를 본 박제상은 자청하여 일본의 미해왕제도 구출해 올 것을 말하고 그 길로 일본을 향해 율포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이 일을 알게된 박제상부인은 남편의 뒤를 따랐으나 그는 이미 배를 타고 손을 흔들 뿐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박제상은 거짓으로 계림왕이 나의 부모를 죄없이 죽였으므로 도망하여 왔다하고 항상 미해왕제를 모시면서 틈을 보아 왕제를 배를 태워 도망가게하고 그는 남아서 잡혀 일본왕의 신하되기를 한사코 거절하다가 마침내 목도에서 소사되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미해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백관을 명하여 굴헐역에서 맞이하고 잔치를 베풀며 국내에 대사령을 내리고 박제상 부인을 국대부인으로 책봉 그의 딸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오랜 뒤 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어서 마침내 치술신모가 되었다.

 한편으로 울산읍지에 의하면 부인이 죽어 몸은 화석이 되어 한많은 망부석이 되고 넋은 새가 되어 은을암에 숨었다고 한다. 또 큰 딸 아기와 막내딸 아경도 어머니를 따라 죽어 화석이 되니 망부석 좌우에 두 돌이 있다 하였다. 2녀 아영만은 내마저 따라 죽으면 어미와 동생을 누가 묻어주며 또 동생 문량을 누가 양육하랴 하고 죽지 않았다 한다.

낭군을 기다리다 죽어 망부석이 된 이야기는 중국에도 있다. 무창의 망부석은 먼데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날마다 산 위에서 기다리다 그만 돌로 화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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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을암
 은을암은 국수봉에 있는 바위이며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 치술신모에 관한 설화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박제상이 눌지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가서 왕제 복호를 구출하고,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왕제 미사흔(삼국유사는 미해)을 왜국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오게 한 후 그는 끝내 신라의 신하됨을 주장하다가 죽었다. 이 일이 있은 오랜 뒤에 제상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정을 못이겨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어서 마침내 치술신모가 되었다.

 울산지방의 속설에 김씨부인은 죽어 몸은 화석이 되어 망부석이 되고 넋은 새가 되었다. 새가 된 넋은 한 마을에 와서 앉았다가 날았다 하여 그 곳을 비조라 하며 또 새는 한 바위 구멍으로 들어가 숨었으므로 그 바위를 이름하여 은을암이라 하였다. 비조는 두동면 만화리에 있으며 은을암은 국수봉에 있다.

 속된 설화의 뒤에도 숨은 암시가 있기 마련이다. 설화에 숨어있는 시사에는 신모의 신시가 들어있다. 신모의 뜻에 따라 비조에 신모사와 치산원을, 은을암 앞에는 은을암을 세워 그를 사제하였다는 것이다. 국수봉은 국사봉의 음전함이니 여기에서 신모를 위한 국가의 제전이 있었음을 산이름이 말하여 주는 것인데 은을암과 은을암은 먼 옛날에는 바로 그를 위한 국사당 그것이었을 것이다.                     
   

 

<자료참조>      '영해(寧海)박씨(朴氏)' ,    '울산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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