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고사성어]故事成語

[살롱] 李圭泰 識子

好學 2010. 11. 13. 22:23

 

[살롱] 李圭泰 識子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여기에는 최선책과 차선책이 있는 것 같다. 최선책은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이치를 깨닫는 일이다. 필자는 몇 년 전에 인도의 뿌나라는 도시에 자리잡고 있는 ‘라즈니쉬 아쉬람’에 간 적이 있다. 아쉬람은 일종의 명상센터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 아쉬람에는 일세를 풍미했던 라즈니쉬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아쉬람 내에 있는 ‘삼마디 홀’이라는 공간도 그 중의 하나다.

삼마디 홀에는 라즈니쉬가 남긴 유언이 영어로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I was never born. I never died. I just visited this world from 1931 to 1990.” 번역하면 “나는 결코 태어난 적도 없고, 나는 결코 죽은 적도 없다. 나는 단지 이 세상을 방문했을 뿐이다. 1931년에서 1990년까지.” 라즈니쉬는 죽으면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원리를 남은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갔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무엇인가. 바로 자식을 낳는 일이다. 자식의 종류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혈자(血子)이고, 다른 하나는 식자(識子)이다. 혈자는 피를 전수 받은 자식을 일컫는다.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일도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에 들어간다. 식자는 ‘식(識)’을 전수 받은 제자나, 저술·작품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식(識)은 그 사람의 정신과 사상을 말한다. 제자는 스승의 사상을 이어받은 식자인 것이다. 저술이나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다. 저술에는 저자의 사상과 혼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본인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 사상이 세상에 남아있으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식’이 중요한 것이다. 선인(先人)들이 피가 전해진 혈자보다도, 사상을 전수 받은 식자를 더 중요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 세상을 뜬 이규태 선생은 73년 인생을 글만 쓰다 간 사람이다. ‘이규태 코너’는 무려 6702회까지 갔다. 칼럼 하나하나를 ‘식자’라고 생각한다면, 선생은 이 세상에 무려 6702명의 자식을 낳고 간 셈이다. 필자는 지난 1년6개월 동안 선생과 같이 칼럼을 연재하는 영광을 누렸다. 마지막 가는 선생의 삶을 돌이켜 보니, 당신께서는 한 세상을 원도 한도 없이 살다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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