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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 (les dialogues)

好學 2010. 10. 25. 20:28

 

플라톤

 

1) 형이상학적 이원론

플라톤은 처음에 어떤 대상이 소속된 부류나 종을 ‘이데아’로 표시하였으나 나중에는 대상의 본질이나 본성 혹은 존재론적 존재로 사용함으로써 사물을 현상세계와 이데아세계의 체계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즉, 감각에 의해 지각되고 형체를 지닌 세계를 현상으로 보고, 오성에 의해 인식되지만 형체가 없는 세계를 이데아(혹은 形相)로 표현하였다.

 

이데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로서 참 존재이지만, 현상은 시공간에 국한된 질료로서 헛된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철학은 프로타고라스의 인식의 상대성과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절대성에 대한 종합으로 본다. 다시 말해 현상적 경험은 우리에게 상대적 진리를 제시하지만, 오성은 절대적 진리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때 현상세계는 이데아세계의 模寫(혹은 分有)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데아가 구체적이고 물질적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관념론이다.

 

2) 윤리학 이론

우주가 우주 나름대로의 우주적 정신을 지니듯이 인간 또한 나름대로의 영혼을 갖는다. 즉, 우주가 대우주로 간주된다면 인간은 소우주로 간주될 수 있다. 우주가 선과 악의 세력으로 다투듯이 인간도 선과 악의 세력으로 다툰다. 그러나 선이 이데아요 현상적 이데아의 分有이므로, 인간의 도덕적 과제는 선을 쌓는 일이다. 선을 쌓고자 하는 노력이 성사됨으로써 인간은 완전한 행복을 보상받는다는 것이다.

 

3) 정치철학

플라톤에 따르면 개별적인 현상세계가 각각의 이데아를 모사하듯이 국가도 선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적인 국가가 존재한다. 이상적인 국가는 정의의 이데아가 실현되는 국가이다. 정의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는 국가이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공동체가 개인 내면의 균형이나 개인간의 균형 여부에 달려있다고 지적하면서 인간의 영혼을 덕의 근간으로 보았다. 그는 영혼을 ① 머릿속에 위치하는 지적인 부분 ② 가슴속에 위치한 용기의 부분 ③ 간장에 위치한 욕망의 부분으로 나누었다. 지적인 부분은 인간에게만 발견되는 것으로 영혼이 不死的이다. 용기의 부분과 욕망의 부분은 영혼이 육체에 속해 있는 것으로 可死的이다.

 

각각의 영혼들은 완전성의 상태에 이르면 그에 따르는 덕을 발휘한다. 즉, 지적인 부분은 ‘지혜’의 덕이, 용기의 부분은 ‘의지력’의 덕이 그리고 욕망의 부분은 ‘절제’의 덕이 발휘된다고 한다. 이러한 덕은 타고 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르쳐질 수도 있다고 봄으로써, 국가는 사람들이 덕스러워지도록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은 고유의 특징적인 덕에 따라 사회 계급이 정해진다. 즉, 지적인 사람들은 수호자로서 철학자들이 국가의 관리를 맡고, 용기를 지닌 사람들은 전사로서 국가를 외부로부터 방어하며, 욕망의 사람들은 직인으로서 물질적인 재화를 생산한다.

 

개인의 계급은 타고난 능력이나 덕의 실현 여하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계급인지를 가리기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플라톤의 국가는 민주적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가 언제나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즉 불가피하게 불완전한 정부 형태가 등장할 수 있는데 첫째,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 통치하는 명예국가 둘째, 부자들이 통치하는 과두국가 셋째, 계급을 타파하고자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대중이 통치하는 민주국가 끝으로, 악이 판치는 참주국가를 예시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플라톤은 철인 군주 대신에 정치적 군주를 제시하였으며, 군주제가 잘못되어 나온 것이 참주제이고 귀족제가 잘못되어 나온 것이 과두제이며, 민주제가 잘못되어 나온 것이 우민정치라고 하여 자신의 정치 이념을 수정하였다.

 

(2) 아리스토텔레스

 

1)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인식과 실재의 일치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 마음의 표상인 관념이 객관 세계의 대상과 일치할 때 진리는 존재하며 그렇지 못하면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으로 논리학을 생각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논리적 추론에는 연역법과 귀납법의 형식이 있다. 연역법은 삼단논법으로서 보편자(어떤 원리)로부터 개별자(개별적인 사례)를 추론하는 형식이며, 반면에 귀납법은 개별자로부터 보편자를 추론하는 형식이다.

그에 의하면 논리적 추론에는 두 가지 근본 법칙이 있다. 하나는 ‘하나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모순율과 ‘하나의 명제는 참이 아니면 거짓이다’는 배중률이다.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원리들을 즉각적으로 이해하며 증명 없이도 확실한 공리로 용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라고 하는 10개의 궁극적인 개념들 즉 ① 실체 ② 분량 ③ 성질 ④ 관계 ⑤ 장소 ⑥ 시간 ⑦ 상태 ⑧ 소유 ⑨ 능동 ⑩ 수동 등을 열거하고, 이 중 ① 실체를 한 사물(대상)의 본질로 간주하였으나 나머지 범주들은 사물(대상)의 한정적인 우연성으로 보았다. 즉 한 대상에 관한 진리를 대상의 본질과 동일시하였으나, 대상에서 우연성들이 떨어져 나간다하더라도 대상의 본질은 잃지 않는다.

 

2) 형이상학

플라톤의 경우 감각세계는 이데아세계(형상)를 모방함으로써 스스로를 실현시키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형상들은 현상세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실현시킨다. 즉, 그의 경우 플라톤의 보편자(형상)는 항상 개별자(경험대상) 안에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 본질(형상)은 감각경험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본질은 감각경험에 의해 지각 가능한 외양을 취한다. 다시 말하면, 장미의 씨앗이 만개된 꽃의 장미로 자라나듯이 자연은 어디에서나 스스로의 가능성(씨앗)을 실현(장미)시킨다. 즉 사물(질료)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전개된다.

이제 형상으로 하여금 질료 안에서 현실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원리를 밝혀야 한다. 장미의 이데아는 질료 안에서 현실태가 될 때 실재적인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질료도 어떤 형상을 취할 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질료는 스스로 운동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질료는 가능태에서 현실태가 되도록 작용이 가해지는 어떤 것에 의존해야 한다. 그것이 완성태이다. 완성태는 현상 속의 각 본질로 하여금 스스로를 실현시키는 원리이다. 모든 질료는 완성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형상 없는 질료란 있을 수 없다.

완성태의 개념이 등장함으로써 세계의 목적론적 개념이 철학적 원리로 대두되었다. 그에 따르면, 신이 창조한 일체의 것은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연은 헛되이 무엇을 만들지 않는다.’

 

3) 윤리학

인간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最高善을 지향한다. 따라서 최고선은 여러 가지 행위를 한정하는 근거가 된다. 최고선은 곧 행복이라 불리며, 행복은 인간의 능력이 지적 통찰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온전하게 발휘되는 활동에 있다고 한다. 인간의 능력은 이성의 능력이며, 이성의 실현은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활동에 있다.

인간의 행동을 이성적 질서에 적합하게 발현되도록 영혼 속에 있는 힘이 德이다. 그러므로 덕은 실천적인 행동에 지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덕이 지성과 실천적 행동을 내포하므로 그에 대응하는 지적 활동과 실천적 활동이 있다. 지적 활동은 이성적 사유의 작용이며 실천적 활동은 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인도되는 행동이다.

올바른 행동이 습관처럼 행해질 경우 덕은 비로소 몸에 배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올바른 행위는 양 극단 사이의 중간이다. 극단은 결핍이건 과다이건 간에 언제나 나쁘다. 왜냐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행위는 비도덕적이거나 不正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양 극단 사이에서 中庸을 주장한다. 중용이 곧 덕인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 (les dialogues)


 

플라톤의 작품들은 [대화]로 구성되어 있고, 철학의 본질적 요구에 상응하는 문학적 형식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합리적이고
공통적인 탐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대화 덕분에, 말하자면 묻고 대답하는 방법적 기술 덕분에 도달된다. 플라톤이 말하듯이 사유
자체는 영혼이 영혼 자체와 내적 대화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대화는 인간들 사이의 연관을 이성 위에 근거하는 것이지, 폭력에 근거하여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 담론은 가장 강력한
법칙을 선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의 법칙을 지닌다. 그러나 모든 담론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진리에 대한 신중한
탐구에 근거하는 철학적 대화를 소피스트의 담론에 대립시켰다. 소피스트들은 아테네 민주정치에서 진리에 주목함이 없이 여론을 지배하는
것만을 가르친 자들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생애와 사상에 비추어서 세 가지 단계를 구성하고, 그에 따라 대화편들은 세 가지 그룹으로 구분한다.

1.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영향 하에 있는 젊은 시절의 초기 대화편들이 있다. 이 대화편은 스승에 대한 기억을 소생시키고 그의
사상을 옹호하며, 소크라테스의 검토 방식을 대화 장면으로 삼고 있다. 소크라테스적 방식은 비판적 질문을 던짐으로서 대화자의 편견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성숙기의 대화편이 있다. 중기 대화편들은 아카데미 창설시기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는 중기 대화편들에서 아직도 대화의
인도자이고, 중기 대화편들은 플라톤 학설 즉 "본질에 관한이론"의 중요 지위를 차지한다.

3. 노년기 대화편들은 보다 박식하고 난해하며, 플라톤 사상의 발전에서 폭발적인 시기에 해당한다. 플라톤은 성숙기의 대화편에서
전개했던 철학으로 되돌아가면서도 이를 더욱 깊이 탐구하기도 하고 또는 변형시키기도 한다. 후기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은 이제
중심인물이 아니며, 심지어 플라톤의 마지막 작품 『법률(Les Lois)』에서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존재와 지식(Etre et Savoir)

지식이란 무엇인가?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공언한 것과 또한 개개인만큼이나
진리가 많이 있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플라톤(Platon)은 진실한 지식의 보편성과 비시간성을 확정하며, 지식은 상황과 개인과
계기에 따라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말한다. 안다는 것, 그것은 인간적 견해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넘어서는 것이며, 사물의 다수성을
보편적 정의(definition)의 단일성(unite)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렇게 탐구된 정의는 그 정의에 娩聆求?대상이 있어야 말한다. 만일 아름다움의 정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아름다음을 예시하는
개별자들의 경우와 독립적으로 "아름다움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물 존재 자체는 생성에 종속되는 감각적 경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적 세계는 변화, 다수성, 다양성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견해[doxa]에 의해
알려지며, 견해에서는 그 세계가 똑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듯이 그 극한에서 지식을 견해로 환원하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e)에 의해 옹호된 보편적 운동성의 이론을 함축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어떤 안정된 실재성도
영속적 실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지식이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자체와 동일하고 영원하며 변화하지 않는 존재들 즉 이데아들(Idees 그리스어로
eidos 또는 본질들)로 이루어진 다른 세계가 필요하다. 본질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실재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의미에서 "이념(관념 idee)"이 아니다. 이것은 비물질적인 존재이며,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지식이
될 수 있는 존재이며, 완전한 객관성(대상성 objectivite)을 지닌 존재이다. 이 존재가 충만된 실재인데 반하여 감각적
실재성은 그림자(ombre)에 불과하다.

감각적 실재성에 관하여 말하자면, 실재성이란 그것이 지식이 될 수 있는 본질에 참여하는 만큼만 실재적이다. 플라톤은 이
참여(participation)이론을 통하여 초월적이고 외재적이며 상위적이고 가지적 세계는 감각적 세계의 존재 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모든 사물의 궁극적 토대는 아니다. 본질들 자체는 원리이다. 왜냐하면 그 각각은 자체와 동일하고
본질들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고의 실재성이란 절대적으로 하나이며 단순하고 비조건적이며, 다른 어떤 사물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물을 규정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조건적이고 절대적 초월의 원리는 본질을 넘어서 "선(le Bien)" 또는
"선의 일자(Un-Bien)"이다.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은 감각적이든 가지적이든 간에 이 일자를 통해서 대상들의 존재이며 알려질 수
있는 존재로 가능하게 된다.

이성의 변증법과 사랑의 [변증법]

이 [인식]은 플라톤에 따르면 정신적 전환처럼 알려졌다. (동굴의 비유 『국가론(Politeia)』제7권
514-517) 그 전환에 의해, 우선 감각적 세계 즉 신체의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며(플라톤은 '철학 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혼을 가두고 있는 신체로부터 영혼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인 세계로 어려운 상승을 하는
것이다. 이 지적인 세계는 진실로 철학적 교육이 요구되며 이 교육은 아카데미의 주요 목표이고 그래서 그 교육은 수학적 지식으로 짜여져
있다.

그 다음에 최상의 지식으로 즉 학문에 이르는 길은 변증법을 거쳐야 한다. 수학자는 "하강"하는 방식에 의해 가설의 토대에
두려워하지 않고, 가설로부터 귀결을 이끌어 낸다. 변증론자는 가설로부터 가설의 원리(본질)로, 가능하다면 "선의 이데아"인 비조건적
토대에 도달할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간다.

변증법은, 모든 담론을 넘어서 선의 일자에 대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관조로 통로를 열어야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합리적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이 합리적 방식을 사랑의 변증법과 겹쳐 놓는다. 이 후자의 변증법(『향연(Le
Banquet
)』은, 그 고유한 방식 때문에, 지적 관조에 이르는 이성과 동일한 결과로 미 자체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 나중에야 우리에게 충족되어지는, 갈망(부족 manque)의 표시이다. 이렇게 사랑은 지식에로
도약을 허용한다. 사랑은 정신적 고양의 원리이며, 이 고양의 과정을 통하여 신체의 아름다움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결국에는 모든
아름다음의 절대적 원리인 본질이 드러난다(se devoiler)

[회상]과 [산파술] Reminiscence et maieutique

인식한다는 것, 그것은 감각세계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이며, 자신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 산파
페나레트(Phenarete)가 신체(아기)를 출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에 비유해서 소크라테스는 정신을 태어나게 하는 기술 즉 산파술을
실행한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대화자에게 자신들 속에 지닌 진리를 계시(드러내게)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산파술은 회상의 이론을 열어 놓는다. 만일 어떤 이가 자신의 고유한 이성에 의해 진리를 재인식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인식한다는 것은 회상하는 것이다"(『메?Menon)』). 정신은 지적 진리를 이미 관조했었고,
그리고 나서 그것은 감각적 신체 속에 들어가면서 망각했다. 이 이론은 자주 영혼의 가지적 세계로의 이동이나 다양한 재생의 구현과 같은
신화의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철학의 본질적 고민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탐구하는 것은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지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도덕과 정치

[철학]적 사색의 마지막 목표는 [실천적 영역]이다. 지적세계의 관조에 이르는 동굴 밖으로 상승한 후에 철학자는 다시 내려와야 한다.
그는 감각적 세계로 달아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선 도덕적으로 다시 말하면 정의롭게 처신하여야 한다. 그러한 것은 정의 자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의지적으로 나쁘게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도덕성은 근본적으로 무지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우리는 감성적 충동에
맹목적이기 때문에 부정의를 실행한다. 플라톤은 인간을 최상의 선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을 탐구하여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 첫 번째
철학자이다. 그러나 철학의 실천적 방향은 도덕적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정의는 도시국가의 일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정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하며 정의로운 [국가]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